2007-45. 사람이 무엇이기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8:1-9
설교일시 200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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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무엇이기에
시8:1-9
(2007/11/11)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는 원수와 복수하는 무리를 꺾으시고, 주님께 맞서는 자들을 막아 낼 튼튼한 요새를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습니다. 크고 작은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물길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람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 놀람을 잃어버린 현대인
“주 우리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 저 하늘 높이까지 주님의 위엄 가득합니다.” 거듭해서 이 구절을 되뇌이다 보면 우리는 일상의 잗다란 일들로부터 벗어나 우주에 가득찬 신비 앞에 서게 됩니다. 시편 8편은 첫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의 크심과 은총에 대해 찬미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단풍철이 지난 듯 싶습니다만, 단풍을 보러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설악산으로 내장산으로 지리산으로 떠났던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돌아올까요? 사진 몇 장이나 고운 단풍 몇 잎, 함께 걷던 이들과의 고운 추억…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의 마음이 조금은 맑아졌을 겁니다. 뭔가를 보며 ‘아!’ 하고 경탄할 줄 안다는 것, 그것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놀랄 줄 모르는 것이 타락한 사람의 특색이라지요? 뭘 봐도 그저 심드렁한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진 사람이거나, 영혼의 샘물이 말라버린 사람일 겁니다.

앤터니 플루(Anthony Flew)라는 영국 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고, 그가 쓴 책은 무신론의 교과서로 통했습니다. “신은 너무 모호한 개념”이라며 신을 부인했던 그가 82세가 된 올해 <<신은 있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그가 신의 존재를 시인하는 논거는 자연의 법칙은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완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마음은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저 큰 하늘과 주님께서 친히 달아 놓으신 저 달과 별들을 내가 봅니다”(3) 하고 노래했던 히브리 시인의 마음과 통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앤터니 플루의 전향에 가장 실망한 것은 역시 과학적 합리성을 근거로 신의 존재를 부정해왔던 무신론자들입니다. 하지만 여든 두 살 노인의 이런 변화는 합리성으로부터의 후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앤터니 플루에 관한 기사를 보면서 구상 선생님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
-<마음의 눈을 뜨니> 중에서

사물들을 실용성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니 총총한 별처럼 빛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눈을 얻기까지 80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삶이 얼마나 풍성했을까요? 대선 주자들은 제가끔 자기야말로 교육문제를 해결할 적임자라고 주장합니다만, 교육 문제의 본질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교육은 영어와 수학도 잘 가르쳐야 하지만, ‘우러러보는 법, 놀라고 경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장엄함 앞에 멈추어 설 줄 아는 능력, 인간 영혼의 보이지 않는 위대함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 사람됨의 뿌리
시인은 세상에 가득찬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압도적입니다. 그는 어린이와 젖먹이들까지도 그 입술로 주님의 위엄을 찬양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있음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찬미라는 뜻일 겁니다. 시인은 마침내 이 시에서 絶唱에 해당하는 구절을 쏟아냅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4)

우리가 자신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만한 푼수가 못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지할 뿐만 아니라 욕망의 구슬아치 노릇을 하느라고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값도 못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유한하고 오류로 가득한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게 시인의 질문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저는 다른 시편에서 찾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103:14)

속은 상하지만 버릴 수는 없는 것이 자식입니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또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아십니다. 우리가 뭐라도 된 듯 떠들지만 우리는 지나가 버리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변화에 종속된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거는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입니다.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수도자가 아무리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수도원을 떠났습니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그는 마지막이라면서 수도원에 돌아왔습니다. 2주쯤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결국 숨어서 마약을 하고 말았습니다. 수도자가 그를 꾸짖었습니다. “자네는 사나이가 아니군. 하려면 정정당당히 하지 그게 뭔가?”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마약을 했습니다. 그때 그 남자와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울고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길로 그는 마약을 끊었습니다.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졌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도 이런 것일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꾸짖기도 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슬퍼하십니다.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옛 삶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지만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늘 유혹에 직면해 있습니다. 식욕, 색욕, 탐욕은 참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잘 참아내다가도 아차 하는 사이에 정신이 몽롱해지고, 불투명한 지경에 빠지기도 하는 게 사람입니다. 우리 힘만 의지한다면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할 것(요8:36)이라고 말하자, 유대인들은 불퉁거리며 대들었습니다. 자기들은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웁니다. 그러자 주님은 강한 어조로 그들을 꾸짖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이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할 터인데, 진리를 거절하고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죽이려는 것을 보면 너희 아비는 악마임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불화 속에서 살아갑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가 그것입니다. 통 크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작은 것에도 바르르 떠는 다라운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품이 넓은 사람이 되어 누구든 받아들이고 싶지만, 작은 모욕이나 손해에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고 싶지만, 자기 일에 전전긍긍하느라 미처 남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불의에 대해서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뒤돌아서서만 투덜거리는 우리들입니다. 이게 우리의 작음입니다. 때로는 진리를 거역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의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기보다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누구든 솔직하게 자신을 돌아보면 자기 속에 악의 전초기지가 있음을 알 것입니다.

이게 에덴 이후를 살고 있는 사람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고, 이것을 아파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유입됩니다. 은총에 눈을 뜬 사람은 비로소 자기 삶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지탱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 우리도 시인처럼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돌보아 주십니까?”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자기 머리에 씌워진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자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다랍기 이를 데 없는 우리에게, 죄에 속절없이 끌려가곤 하는 우리에게,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에게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잘 돌볼 책임을 맡겨주셨습니다. 이 무슨 은혜란 말입니까?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를 믿고 신뢰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원인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을 진 동산지기들입니다. 우리 없이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가기 원하십니다. 이보다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 ‘하나님 앞’, 우리의 설 자리
그러나 우리는 이런 소명을 잊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지구야 병들든 말든,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돈 때문에 벌벌 떨며 삽니다. 미래 세대의 자산을 불태움으로 풍요를 누리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 박사는 우리들의 초상이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의 설화에 의하면 말세의 때가 되면 혼이 없는 사람이 태어난다는 데 지금이 그런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알면 우리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보다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스님들에게 ‘왜 사냐?’고 물으면 成佛하기 위해 산다고 말합니다. 부처를 이루겠다는 것이지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은 너무 작아진 것 아닌가요? 예수 믿어 마음 편하고, 넉넉하게 살고, 성공하고, 죽어 천국 가면 되는 것인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햇빛발전소에서 전기가 생산되면서 우리 교회의 전력계가 거꾸로 도는 것처럼, 이제 문명의 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자꾸 나아가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 댁에 갔더니 일정표를 적어놓은 칠판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글귀 하나가 적혀 있었습니다. “Einsamkeit ist meine Heimat.” ‘고독은 나의 고향’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Du meine Heimat Einsamkeit!”, 즉 ‘그대 나의 고향인 고독이여!’라는 구절의 변형인 듯싶었습니다. 고독이 고향이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고독이야말로 우리를 본래의 자리로 데려다준다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래의 자리는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을 돌아보는 사람은 더 이상 돈에 팔려 다니지 않습니다. 돈에게서 해방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은 총총한 별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어떤 큰 문제 앞에서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알 때 우리 속에 있는 선함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는 동지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만, 훈훈하고 넉넉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우리 속에서 싹트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1월 11일 12시 52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