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6. 오, 복된 약함
설교자 김기석
본문 갈 4:12-16
설교일시 200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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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복된 약함
갈4:12-16
(2007/11/18)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

• 측은지심
프랑스의 현직 대통령은 사르코지입니다. 그는 얼마 전 아내 세실리아로부터 이혼을 당했습니다. 둘 사이의 오랜 불화가 배경이기는 하지만 세실리아는 퍼스트 레이디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며 남편의 곁을 떠났습니다. 우리 통념으로는 잘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로버트 라이시는 미국의 클린턴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일이 늘어나면서 삶의 만족감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장관직을 사임하고 가족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가 쓴 <<부유한 노예>>라는 책은 삶의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으로 24년간 일하면서 보수와 진보 간의 균형추 역할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2005년에 전격적으로 조기은퇴를 선언하고 초야로 돌아갔는데, 그 까닭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습니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의 최근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그는 결국 남편을 요양원에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남편인 존 오코너는 다른 알츠하이머병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아내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는 지금 요양원에서 만난 ‘케이’라는 할머니와 함께 편안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인 샌드라는 남편의 그런 모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그의 행복을 함께 기뻐한다고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 듯 싶습니다. 그는 1994년에도 암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암환자들에게 자신의 유방암 수술 경험을 소개하면서 희망을 가지라고 당부하기도 했습니다.(2007/11/15일자 한겨레신문 18면).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동물 세계에서 벌어지는 냉엄한 현실에 마음 아파합니다. 다쳤거나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초식동물들은 여지없이 육식동물들의 먹이가 됩니다. 연약함은 곧 죽음과 직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惻隱之心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심성 속에 약한 것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심어놓으셨습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도 꽃이나 어린아이 앞에 서면 표정이 선하게 풀어지고, 그 난폭했던 행동도 자제하게 됩니다. 아기의 눈을 들여다보는 어른들의 눈길은 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이들의 표정은 따뜻합니다. 물론 세상에는 야수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약한 사람들을 먹잇감처럼 여기며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사람다움은 누군가를 돌볼 때 발현됩니다.

• 전화위복
바울 사도가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번째 선교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소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해안을 이용하지 않고 케스트루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지역의 번화한 도시인 버가에 상륙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력자로 따라 나섰던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아마도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 일로 상심했습니다. 그도 또한 건강이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는 버가 선교를 포기하고 곧장 소아시아의 내륙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습니다. 해안 풍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텐데, 그곳은 버가에서 약 16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몸이 성치 못한 이들이 걷기에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겁니다.

갈라디아 지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안팎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낯선 곳이 주는 심리적 중압감과 더불어 건강도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지역민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날을 회고하면서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입니다. 바울의 약함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선의 본능을 깨웠던 것입니다. 사람은 보통 강자나 빈틈없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저항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약자를 볼 때면 동정과 연민을 느낍니다. 흥미로운 것은 도움을 베풀 때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평화로워진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강하고 똑똑해서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런 충동과 경계심 때문에 세상은 경쟁의 마당이 되어 버렸습니다. 경쟁의 논리는 ‘너 죽고 나 살자’입니다. 물론 모든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경쟁의식이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쟁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많습니다. 경쟁의 창날이 부딪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은 가뭇없이 사라집니다. 거칠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물론 연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화도 잘 내고, 욕심 사납고,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람됨은 연약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확보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할지를 가르치는 교사들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히4:15). 주님도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구원에 감격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류가 경험하는 온갖 부정적인 일들을 다 맛보셨습니다. 고통, 외로움, 수치심, 상실감, 쓰라림……. 두 팔을 벌리운 채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을 능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은총,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연약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말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 그렇고, 가난한 집안에서 살아간 것이 그렇고, 나그네가 되어 떠돈 것이 그렇고,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것이 그렇습니다.

• 그 감격은 어디에 있는가?
연약한 이들을 보듬어 안으며 우리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때 연약함은 그와 나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됩니다. 그래서 나는 ‘오, 복된 약함이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연약함은 갈라디아 사람들과 복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습니다. 돌봄을 받은 자가 돌보아 준 이들에게 복음이라는 선물을 내놓았습니다. 연약함을 돌보는 일을 통해 부드러워진 사람들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기적과 표징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율법 준수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바울의 메시지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에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바울 일행을 박해했습니다. 바울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도 복음을 전했지만 그 때마다 유대인들의 테러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급기야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약한 것은 생명에 가깝고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는 옛말처럼 ‘내가 옳다’는 유대인들의 자기 확신이 그들의 눈을 감겨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지방은 바울의 마음에 두 가지 상반된 기억으로 떠오르는 곳일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줄 듯이 사랑으로 돌보아 주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눈에 불을 켜고 대드는 증오에 찬 유대인들에 대한 기억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마음에는 거센 격랑이 일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함께 겪으며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복음의 길을 떠나서 율법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복음이 주는 내적인 감동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감동이 사라질 때 사람들은 형식에 집착합니다. 어떤 규정을 지키고,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신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주님과 만난 감동이 사라진 자리를 율법주의자들이 파고 들었고, 사람들은 그 유혹에 속절없이 넘어갔던 것입니다. 날을 지키고, 할례를 받고, 율법 규정을 지키는 것이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만족감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신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습니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 앞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3:1)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4:15)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습니까?”(4:16)

• 햇살을 마시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았을 때 그들은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감격이란 지속성이 없는 감정입니다. 그것은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타오르지만 다음 순간이면 스러져버리고 맙니다.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감격에 대한 기억과 하루하루 직면해야 할 일상입니다. 그 기억을 붙잡고 한 순간 한 순간 스러지지 않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길은 때로는 팍팍하고 때로는 지루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내이고 성찰입니다.

십자가의 은총과 신비를 든든히 붙잡으십시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어떤 외적 규정을 지키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과 허물과 죄성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귀의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싶은 내적인 열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기쁨과 행복을 바깥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짜릿한 감동을 원합니다. 하지만 일상은 언제나 잿빛입니다. 늘 그날이 그날 같을 뿐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격이란 내 속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랑 고백을 들은 이의 눈에 세상이 무지개빛이듯 하나님의 사랑을 자각하는 이들에게 세상이 온통 신비로 가득 찬 곳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시를 들어보십시오.

유자차를 마신다.

지난여름 어느 날
아무도 몰래
어느 유자나무 위로
내려앉은 햇살을

물에 풀어 마신다.
(이현주, <유자차를 마신다> 전문)

유자차 한 잔을 마시면서 지난 여름 어느 날 유자나무 위로 내려앉은 햇살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신비가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풍성합니다. 많이 소유해서가 아니라,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강하게 보이기를 원합니다. 고개를 한껏 세우고 목덜미의 깃털을 세워 스스로를 크게 보이게 하는 수탉처럼, 앞발로 흙을 흩뿌리며 공격 태세를 보이는 황소처럼, 사람들은 남들에게 크게 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씁니다. 스스로 크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연약한 사람들 곁으로 선뜻 다가서지 못합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연약한 이들 속에 가장 귀한 선물을 감춰두셨습니다. 그들 곁으로 다가서지 않는 한 우리는 자아의 무게, 생의 무게로부터 해방될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공급되는 힘이 우리로 하여금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게 합니다. 겨울의 초입, 스산한 우리 마음에 좋으신 주님의 은혜가 햇살처럼 비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1월 18일 12시 43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