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7. 와서 아침을 먹어라
설교자 김준우
본문 요 21:9-14
설교일시 2007/11/25
오디오파일 s071125.mp3 [7674 KBytes]
목록

와서 아침을 먹어라 (요한 21:9-14) 2007/11/25 청파교회

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성령강림절 후 마지막 주일이며, 왕국주일입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대강절기가 시작됩니다. 교회력은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일생을 중심으로 짜여 있어,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기부터 시작해서, 성탄절, 주현절, 사순절, 부활절, 성령강림절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오늘은 교회력 상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셈입니다. 특별히 왕국주일이라고, 영어로 Kingdom- tide라고, 하나님 나라 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성령 강림의 최종 목표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11월을 위령성월로 지키는데,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묵상함으로써, 자신들의 생활을 반성하고 성실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힘씁니다. 오곡백과를 거둬들이고 난 다음의 빈 들판에서, 낮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게 되고, 나무들도 모두 잎사귀를 떨구고 하늘을 향해 빈 몸으로 서는 고요한 계절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우리의 과제를 생각하며 왕국주일을 지키는 것도 의미가 깊지만,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위령성월을 지키는 천주교의 전통도 참 지혜로운 전통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지상의 어머니, 그 거룩한 교회
돌이켜 보면, 우리가 교회를 통해 신앙을 배울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의 구원의 길을 깨닫게 되고, 우리들 자신의 죄와 부족함도 깨닫게 되고, 단련도 받고,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형제자매들로부터 큰 사랑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은 생각할수록 참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교회를 흔히 “지상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교회가 우리의 신앙을 양육시켜, 죄가 많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을 온전하고 성숙한 인격을 지닌 자녀들로 키우려고 애쓰며 기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상의 어머니이신 교회도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여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수고합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교회를 “거룩한 공회”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지금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들을 거룩한 성도들로 변화시켜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성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성화(聖化)의 은총을 베푸신다는 뜻입니다. 사도신경에는 또한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에 첫째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인들끼리 의사소통을 잘 한다거나, 단순히 서로 상부상조를 잘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틴어로 Communio Sanctorum이란 “거룩함의 교제”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통해 “거룩함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거룩함의 교제는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우리가 덧입게 되고 그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됨을 뜻합니다. 에베소서 4:13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고 한 말씀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의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거룩하게 되는 일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믿습니다. 둘째로,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신앙의 조상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통해 우리가 거룩함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교파를 초월해서, 아시아 사람이든 아프리카 사람이든 백인이든 간에, 지금 함께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살아내는 거룩함을 함께 나누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함”을 생각할 때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불행한 역사가 계속 되풀이되고 외국문화의 영향력이 더욱 거세지는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기 위해, 거룩한 안식일, 거룩한 성전, 거룩한 제사, 거룩한 십일조 등을 강조하다가, 자신들의 신앙을 철두철미 고수하려는 열심이 그만 율법주의로 흘러, 결국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결하게 된 사람들을 차별하고 멸시하고 정죄하는 상태로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사장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거룩한 안식일, 거룩한 성전, 거룩한 제사, 거룩한 십일조가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려버리는 장애물이 되어버렸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시고, 당시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에 맞서서, 가난하고 병들어 불결하게 된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혹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핵심이라고 설파하셨습니다(누가 6:36).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가 자비하신 하나님처럼 철두철미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람들 사이에 자비로운 마음을 갖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심지어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누가 6:27)

2.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뿌리경험 - “엄마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
당시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렇게 가르쳤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깨닫게 되셨을까요?
우선 역사적으로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의 학살과 헤롯 왕조의 폭정으로 인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친척들을 잃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고, 또한 많은 세금을 감당하지 못해 빚더미에 올라 땅을 빼앗기게 되니까 끼니조차 잇기조차 어렵게 되어, 서로 돕고 살던 이웃조차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제사장들과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옛날의 “거룩의 신학”만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애간장이 타셨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준수만을 강요하는 아버지 하나님보다는 불쌍한 자식들을 무조건 품어 안는 “아빠 하나님” 혹은 좀더 우리의 경험상 정확하게는 “엄마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하나님의 본성으로 꿰뚫어보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둘째로 신학적인 이유로는 예수님께서도 하루에 몇 차례씩 암송하셨을 말씀(Shema), 곧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는 말씀의 의미를 깊이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씀의 뜻은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들이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와 너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결국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는 진리, 심지어 나와 원수조차도 별개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고 결국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마태 5:45)를 깨달으셨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처럼 사회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환경파괴가 더욱 악화되는 상황에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매우 중요한 진리라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스님들은 새벽예불을 드리면서, 목탁도 두드리고 징도 치고, 나무를 깎아 만든 물고기 모습도 두드리고 종도 치고 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삼라만상을 모두 깨워 그 모든 피조물들 속의 불성(佛性)을 일깨운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만물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생태적 관점을 강조함으로써 통전적인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처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 남녀차별도 없고, 계급차별이나 인종차별도 없으며, 정결한 자나 불결한 자에 대한 구분도 없다는 진리를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환경이나 다른 생명체의 종자들에 비해 인간의 필요가 우선하며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피조물보다 월등하다는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이런 하나님 중심의 진리는 우리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진리라고 믿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고백에서부터 삼라만상이 하나라는 진리가 나오며, 여기서 하나님의 본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는 깨달음이 나오며, 우리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게 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하나되어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이런 영적인 연합, 그 거룩함의 교제, Communio Sanctorum이 교회의 본질이 된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도구인 교회
오늘이 성령강림절 후 마지막 주일이면서 왕국주일, 곧 하나님 나라 주일로 지키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 간판을 내걸고 강단에 십자가를 놓고 있다고 해서 모두 예수님의 교회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나라”를 위해 수고하지 않는 교회, 죽은 다음에 갈 저 천당만 가르치는 교회, 출세와 성공과 축복만 가르치는 교회는 결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자연재해로 인해서, 혹은 질병과 사고로 인해서, 혹은 테러와 전쟁으로 인해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고통이 계속되는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기 위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 수고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거룩한 교회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서로 남들을 자기보다 높게 섬기고, 특별히 약한 사람들과 병든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하고, 서로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때, 비로소 우리 교회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지는 나라”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나라는 최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여러 보도들을 통해, 지난 6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납북되었던 어부들과 재일교포 유학생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억울한 징역을 살았는지 하는 것도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보안사와 안기부, 검찰과 판사들이 어떻게 불법을 자행했는지도 자세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최근에는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을 통해, 한국의 대표적인 재벌이 국가의 법질서를 어떻게 짓밟았으며, 정치인과 관료들뿐 아니라 심지어 판검사들까지 어떻게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하수인으로 삼았는지 하는 것도 상당부분 자세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독재정권의 살인적 폭력에서 벗어나고 민주적인 법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귀한 피를 흘렸는데, 이제는 독재정권이 아니라 자본가의 돈이 이 나라의 법질서를 짓밟는 시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또다시 몸서리치게 합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가 교회 자체를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펼치기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지는 못한다 해도, 최소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처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양심의 진실을 말해야만 합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눈과 귀와 입을 막은 채 진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두 눈 크게 뜨고 진실을 지켜보고, 진실을 증언할 책임이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그런 폭력과 광기의 시대, 불법과 우상숭배의 시대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역사 과정에 발맞추어 나아갈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4. “와서 아침을 먹어라”
오늘의 요한복음 본문은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 번째로 다시 만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자, 베드로는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룬 채 뒤척이며 지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자신이 가족들과 생업을 내던지고 따라나섰던 예수님이 자신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점에 대해 한편으로는 환멸도 느꼈을 테지만, 도무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한동안 당황스럽기도 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자처했던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 살아 생전에 좀더 잘 대접해드리지 못한 일들도 후회가 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을 팔아 넘긴 가롯 유다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자신이나 결국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생각이 너무 괴로워 잠을 이루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직접 부활을 확인하고(요한 20:6-7),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주셨고(20:20), 이어서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고 하신 말씀도 들었지만, 도무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따라나섰던 자신이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해 배를 탔으니 아마도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날 밤에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더욱 참담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21:3-4). 그런데 동틀 무렵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시고, 숯불을 피워 놓고 생선과 빵을 마련하신 채 “와서 아침을 먹어라”(2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떠나신 분들의 영정 앞에서 여전히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우리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와서 아침을 먹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들이 세상 떠나셨을 때는 정말로 멀리 떠나가신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그분들의 삶과 가르침을 생각하다보니 어느덧 그분들이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며, 무릎 꿇고 있는 우리의 등뒤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와서 아침을 먹고 기운 차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만큼,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짐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명을 새롭게 각인시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환멸을 느끼면서 앉아 있기에는 우리에게 맡기셔야 할 일들이 너무 많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후회할 일들을 더 이상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믿고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력 상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아침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간곡하게 당부하십니다.
“내 양 떼를 먹여라.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요한 21:18).
주님께서는 이 아침에 참담한 우리를 위해 손수 아침을 차려 놓으시고 우리가 기운을 차려 이 세상의 온갖 어둠의 권세를 이기고 새로운 “빛의 절기”를 맞이하기를 간곡하게 당부하십니다.

등 록 날 짜 2007년 11월 25일 12시 47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