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8. 큰 배움의 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약 3:13-18
설교일시 2007/12/02
오디오파일 s071202.mp3 [739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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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배움의 길
약3:13-18
(2007/12/2)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행동을 하여 그의 행실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그 일은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행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러한 지혜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입니다. 시기심과 경쟁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우선 순결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친절하고, 온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聰明)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말 앞에 잠시 머물러 보십시오. 여러분은 지혜 있는 사람입니까? 귀가 밝고 눈이 예민한 사람입니까? 주님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렘5:21, 막8:18) 세태를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 곧 역사가 뒤바뀌고 있는 기미를 감지하는 예민함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대학입학 시즌이 되어서 학부모와 수험생들의 마음이 바쁜 때입니다. 하지만 대학이 대학 구실을 못한지는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큰 배움이란 무엇일까요? <大學>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큰 배움의 길은 하늘이 내린 맑은 마음을 이지러짐이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가까이 하여 그들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감화시키는 것이고, 지극히 선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공부는 취직 공부가 아니라 마음공부이고, 스스로 선한 자리에 머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밝게 하는 공부는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자기 마음을 하늘에 비추어보며(照於之天) 닦아내야 합니다. 옛날에 어른들은 집안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광 속에 넣어두었던 호리병 모양의 큰 남포(lamp)을 내다가 그을음을 닦아 걸곤 했습니다. 살다보면 깨끗했던 우리 마음에도 그을음이 앉게 마련입니다. 욕심, 이기심, 시기심, 파당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불투명한 존재가 되어 갑니다. 시인 윤동주는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비쳐진 자기 모습을 부끄럽게 돌아보다가, 마침내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다짐합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라도 닦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절박함, 이게 시인을 깨어 있게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충대충 살면서도 그게 목에 박힌 가시처럼 불편하지 않습니다. 이게 타락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닦아보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게 우리 마음입니다. 깨끗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또 다시 저 깊은 곳에서 악한 것, 더러운 것이 올라옵니다. 바울 사도께서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라고 탄식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의지나 반성만으로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맑은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켜 ‘위로부터 난다’(born from above)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위로부터 난 사람을 가리켜 “한번 빛을 받아서(have once been enlightened)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은”(히6:4)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한번 비췸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가야 할 길도 알게 됩니다. 이런 이를 가리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 ‘나’를 잃으면
교회 안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마다 삶의 현장에서는 자기 몫을 톡톡히 해내는 이들입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자리에 있는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도 있습니다. 생활이 넉넉한 이들도 있고, 생계가 걱정인 이들도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따뜻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성정이 가파르고 차가운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큰 문제없이 서로 사랑하며 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갈등도 있게 마련입니다. 갈등이 생기면 참 불편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되도록 빨리 그 갈등을 덮어버리려고 합니다. 하지만 갈등은 한 공동체를 성숙의 길로 인도하는 견인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갈등에 이면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그리고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갈등은 늘 상처만을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제는 늘 ‘한다’ 하는 사람들, ‘안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발생합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면 상대자들은 어떨까요? 지하철에 연기 차단막이 내려가듯 마음문을 닫고 말겠지요. 이쯤 되면 진리는 간 데 없고 경쟁과 시기심과 파벌의식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장 경계하셨던 것은 ‘자기 의’(self-righteousness)였습니다. ‘나는 옳다’는 생각처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옳다’는 주장은 일쑤 ‘너는 그르다’는 판단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옳은 사람도 없고 전적으로 그른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는 선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악합니다. 어떤 순간은 착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야수처럼 돌변할 수 있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걸 아는 게 참다운 지혜입니다. 자기 한계를 인정할 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이 없는 지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최근에 삼성의 비자금 문제니, 경영권 승계니, BBK 사건이니 우리로서는 그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일들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마치 흥미진진한 진실게임을 보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온통 그들이 일으킨 흙탕물 속에 내던져졌다고 생각하니 좀 화가 납니다.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이 빼돌려지고, 부풀려진 내력은 저같은 문외한이 알 길 없지만, 소위 세상의 한다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그 음험한 자본주의의 매트릭스 속에서 가위눌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분노가 생깁니다. 요즘 부자들이 넘치는 돈을 빼돌리기 위해 관세가 면제되는 고가의 그림을 사는 일이 많다지요? 삼성가의 사람들이 70억 원을 호가한다는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사들여 감상할 때, 130만원의 월급을 받다가 해고된 삼성의 하청업체 하이비트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빼내고 숨기고 바꿔치고 위장하는 일에 솜씨를 보이는 이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식은 살림의 지식이 아닙니다. 그들은 돈과 권세를 얻기 위해 ‘자기’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알려져서 환히 나타나기 마련”(눅8:17)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날 때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우리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은 땅도, 집도, 동산의 나무도, 책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잃었다가도 다시 찾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하에 잃기 쉬운 것이 ‘나’라고 했습니다. “변치 않을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지, 고작 땅 주인 되는 데 인생을 걸어서야 되겠는가?” 정신이 번쩍 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마16:26)하신 말씀도 아마 같은 뜻일 겁니다.

• 낭패
야고보는 이처럼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지식 혹은 지혜를 가리켜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악마에게 속한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간지가 통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성장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그리스도의 정신에 위배되는 선택을 할 때, 그 교회는 외적으로는 성장하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내적인 생명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중요한 척도는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단 하나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고집스러워 보일지라도 이런 원칙을 든든히 지킬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더뎌 보여도 정도를 걷는 것, 홀로 백 걸음을 앞서 나가기보다는 함께 열 걸음을 가려는 마음,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기보다는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며 함께 나아가는 것, 바로 이것이 교회가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지름길로 가려고 서두르다 보면 반드시 낭패를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狼과 狽는 이리과의 짐승인데 꼬리가 길어서 서둘러 달리다가 제 꼬리를 밟고 넘어진다지요? 낭패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크기의 신화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나는 한국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교회 성장주의 때문이었다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문화 지체 cultural lag’라는 말을 아시지요? 오늘날처럼 기술을 비롯한 물질문화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사회규범이나 정신의 성숙이 그를 따르지 못할 때 생기는 현상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나는 지금 한국 교회가 외형적 성장에 비해 내실을 갖지 못한 ‘영적 지체 spiritual lag'를 겪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혜를 주시는 까닭
주님은 열매를 보아 그 나무를 안다 하셨습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실체를 말해줍니다. 병든 터전 위에 세운 교회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도 없고, 생명의 샘물을 공급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초막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자 유대 사람들이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런 학식을 갖추었을까?”(요7:15)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 것이 위로부터 오는 지혜의 특색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끌고 가서 넘겨줄 때에, 너희는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말아라. 무엇이든지 그 시각에 말할 것을 너희에게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막13:11)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상황에 대한 재빠른 판단이나 경험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하늘의 뜻을 경청하는 태도입니다. 저는 가끔 이런 경험을 많이 합니다.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가서 마음이 뒤죽박죽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 마음을 고요히 하고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은 제 입에 말씀을 넣어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같은 경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사50:4-5)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까닭입니다. 그것은 ‘지친 사람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온 마음으로 부둥켜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땅의 지식은 갈등과 분열과 시기심을 유발함으로써 결국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옵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순결, 평화, 친절, 온순, 자비, 선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하늘의 지혜로 세례받지 않은 땅의 지혜는 정욕적이고 악마적일 수 있습니다.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길은 하늘의 지혜를 구하고, 그 지혜를 따라 살아가려는 결단입니다.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이 계절은 큰 배움의 길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겸허하게 마음을 열고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에게 부끄럽고 사람에게 민망한 일을 끊어버려야 떳떳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선하고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고 이웃들에게 다가가 주님의 사랑을 덧입히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2월 02일 12시 42분 5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