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49. 말씀을 길로 삼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1:1-6
설교일시 2007/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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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길로 삼아
시1:1-6
(2007/12/9)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렇다. 의인의 길은 주님께서 인정하시지만,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 이중적인 책임
옛날 어느 선생님이 사람 人자 다섯을 써놓고는 제자들에게 해석해보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스승은 그 뜻을 친절하게 새겨주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옳은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람다운 게 뭐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답다’는 접미사는 사전을 찾아보니까 “일부 체언 밑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목사답다’, ‘아버지답다’, ‘기독교인답다’는 말은 그래도 대충 느낌이 오는데, ‘사람답다’는 말은 감을 잡기가 좀 어렵습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입니까?

그는 두 가지 차원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일 겁니다. 하나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책임입니다. 일전에 우리 교회에 오셨던 정희수 감독은 이것을 간명하게 ‘거룩성’(holiness)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습니다. 사람은 함부로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자각하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하나님이 보내신 존재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보내신 분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화에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만, 우리야말로 기억 상실증 환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물가물해지는 우리의 기억을 회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릅니다. 우리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를 모르고, 육체가 하자는 대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배신이고, 어버이이신 하나님에 대한 불효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내 뜻, 내 욕심을 자꾸 덜어내고 그 자리에 하늘의 뜻을 채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또 다른 책임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을 향한 것입니다. 에덴 이후를 살고 있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동생을 죽인 후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에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항변했던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무정한 성정을 극복하면서 누군가의 좋은 이웃이 되는 데 있습니다. 정희수 감독은 이것을 ‘환대’(hospitality)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누구라도 와서 마음 편히 쉬어 가고, 살아갈 힘을 회복할 수 있는 환대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부름 받은 우리의 소명입니다. 저는 이렇듯 하나님에 대한 책임과 이웃에 대한 이중적 책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제 남은 인생의 과제로 삼으려고 합니다.

• 숙제를 마칠 수 있는 기회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면도를 하려고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생기를 잃은 나 자신의 모습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라면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고 묻겠지만, 저는 거울 속에 있는 그 사나이의 시선을 자꾸 피하려고 합니다. 현대인들이 침묵과 고요를 싫어하는 것은 어쩌면 자기의 실상과 마주하기 싫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자기와 딱 마주치게 되면 절로 이런 노래가 나옵니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 길을 잘못 든 듯한 느낌이 드는 겁니다. 왤까요? 그것은 세월에 등 떠밀리며 사는 동안 ‘나’ 곧 세상의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나’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인생의 의미물음(Sinn-frage)에 스스로 대답을 준비하지 않은 이들은 언제라도 허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 늙어서 무슨 인생의 의미물음? 그냥저냥 살다 가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끝까지 그 물음 앞에 서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의 생을 드러내기 위해 일단 악인들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1)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이 구절은 누가 복 없는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는 사람이고, 부귀영화를 좇아 죄인의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이고, 스스로의 성취에 도취되어 영혼이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꾀’는 ‘일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교묘한 생각이나 수단’을 뜻합니다. 우리말에서 ‘꾀’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꾀보’, ‘꾀자기’, ‘꾀병’이라는 단어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악인의 꾀는 달콤합니다. 달콤하기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악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정도를 묵묵히 걷는 사람들은 어리석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마련입니다. 정말 그들이 어리석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꾀보들은 부자가 될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어느 순간 든든하다고 여겼던 그들의 집은 허물어지고 벌거벗은 그들의 모습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이게 역사의 순리입니다. 시인은 악인을 가리켜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악인의 길은 망한다.”(5, 6b)

못을 박듯 들려주는 이스라엘 지혜자의 음성이 강력합니다. ‘악인의 길은 망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삿됨이 드나들 길을 막고 헛된 유혹이 흘러들 틈을 막아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든든함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원칙이 분명해야 합니다.

• 대나무는 마디 있음을 귀히 여긴다
원칙을 세우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입니다. 대나무는 마디 있음을 귀히 여긴다(竹貴有節)는 말이 있습니다. 대나무가 매운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것은 마디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살이에도 마디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그 마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성경’의 ‘經’은 베나 천의 날줄 그러니까 세로줄을 일컫는 말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베나 가마니를 짜던 모습을 떠올려봅니다. 날줄을 먼저 틀에 걸어놓은 후에 북으로 씨줄을 넣고 바디로 내리칩니다. 중심이 되는 것은 날줄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세로의 중심, 수직의 중심이 바로 서야 삶도 가지런해지는 법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날줄입니다. 시편 1편 시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런 저런 잡다한 설명을 다 생략하고 단 한 마디의 말로 핵심에 이르고 있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그는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2)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은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복된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한 해가 다 지나가는 데도 성경 구절 하나가 내 속에 들어와 나의 길이 되지 않았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의 별명은 ‘한 책의 사람’입니다. 물론 여기서 ‘한 책’이란 성경을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웨슬리가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척도가 되어준 것은 언제나 성경이었습니다.

시인은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꿔읽어도 무방하겠습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하가’(hagah)의 번역어인데 그다지 적절한 번역은 아닙니다. ‘묵상한다’ 하면 바닥이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 광경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마치 사자가 자기 먹이를 움키고는 기쁨에 겨워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말씀의 향기를 맡고, 씹고, 맛을 음미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합니다. 혹시 깨끗이 핥아놓은 개밥 그릇을 본 적 있으십니까? 시인 정호승은 밥을 다 먹은 개가 빈 밥그릇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 광경을 보다가 문득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밥그릇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생각해봅니다. 어떤 일이든지 대충 해치우고 얼른 다른 일로 옮겨다니지 않았는가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음을 얻은 듯 말합니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밥그릇> 중에서)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그 밑바닥까지 핥고 또 핥는 것입니다. 여러 번 읽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철저히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사도 요한이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에게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천사에게 손을 내밀자 천사가 말합니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계10:9) 이게 무슨 말입니까? 두루마리를 받아먹으라니요?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온 존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살과 피로 변하듯이 말씀은 우리의 인격과 삶으로 화육해야 합니다. 귀로만 듣는 이들에게 하나님 말씀은 꿀같이 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감동 되는 구절에 밑줄을 긋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일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않거나, 설사 읽는다 해도 밑줄만 긋습니다. 말씀을 인용할 줄은 알지만 그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아 나를 바꿀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 하는 일마다 잘 된다니?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전체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읽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말씀 한 마디라도 붙잡고 철저히 궁구하다 보면 삶의 중추가 보이게 마련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삶의 입장이 생깁니다. 그걸 붙잡아야 삶이 요동치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걸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3)

이 구절을 읽으면서 늘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이건 우리 현실 경험에 들어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악인이 잘 되고, 선인들이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목도합니다. 그러면 시인의 이런 고백은 願望思考(wishful thinking)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여기에 우리의 딜렘마가 있습니다. 저는 단적으로 말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 된다’는 말이 옳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들에게 복을 내리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시들지 않게 생기를 불어넣어주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잘 된다’는 말을 내 욕망이 이루는진다는 뜻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 보면 어려움도 겪습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이 그랬고, 사도들의 운명이 그랬습니다. 그럼 그들은 불행한 이들입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승리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나의 나됨을 지킨다는 것보다 소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줏대가 바로 서면 조금 덜 먹어도, 조금 덜 편안해도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우리의 걸음걸이를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려는 마음이 속에서 솟아나오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연말을 향해 가면서 우리 마음이 스산한 까닭은 창고에 많은 것을 거두어들이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루어야 할 존재의 목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날줄로 삼고, 우리의 시간과 삶의 조건들을 씨줄로 삼아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걷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2월 09일 12시 33분 5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