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0. 해를 입은 여인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계 12:1-6
설교일시 2007/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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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입은 여인
계12:1-6
(2007/12/16)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고,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에는 천이백육십 일 동안 사람들이 그 여자를 먹여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이 있었습니다.]

• 묵시록적 세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무통분만이란 없습니다.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려 할 때 세상은 혼란과 소란스러움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어둠은 짙게 마련입니다. 모든 묵시록은 혼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鄭鑑錄’이나 ‘미륵신앙’은 역사의 암흑기에 등장하여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삶이 고통스러워 세상이 한번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든 것입니다. 구약의 묵시록이라 할 수 있는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의 지배를 받던 시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단 위에서 돼지를 잡는 만행을 저질렀고, 율법을 소지했다는 것만으로도 처형시키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다니엘서는 그 암울한 시기에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저 절대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무자비한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소국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성도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에 요한은 하나님의 역사 계획은 결코 좌절될 수 없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시끄러운 소리와 다채로운 색깔, 그리고 혼란스런 광경들로 일렁입니다. 일곱 봉인이 열리면서 흰 말, 붉은 말, 검은 말, 청황색 말이 나타나고, 부르짖는 소리가 들리고, 세상 도처에서 온 사람들의 찬양 소리도 들립니다.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진노의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나타나는 우주적인 재앙도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습니다. 계시록은 우리를 어리벙벙하게 만듭니다. 요한은 어찌하여 세상이 혼돈으로 퇴행하고 있는 광경을 이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일까요? 그것은 혼돈(chaos)을 극복하고 질서(cosmos)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뜻이 세상의 권력자들에 의해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힘 있는 이들이 힘없는 이들을 억압하고, 가진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세상, 불의가 뒤덮고 있는 세상은 임계점에 다다른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세상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열려 하십니다. 그것은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혁명적인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런 변화는 기폭제 노릇을 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 여인과 용
여기 아기를 잉태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장엄한 느낌이 들지요? ‘해를 입은 여인’(a woman clothed with the sun), 이 여인은 아기를 배고 있습니다. 어쩌면 해 같은 존재를 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인은 지금 진통 중입니다. 고통이 얼마나 큰지 울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앞에는 무시무시한 용이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삼켜 버리려고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용은 악의 세력, 혼돈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그는 공중의 권세잡은 자인 사탄이기도 하고,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상 권력이기도 합니다.

용도 영물인지라 여인이 낳으려는 아이가 누구인지를 압니다. 지금은 연약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언젠가는 자기들을 위협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용은 아이를 죽이려 합니다. 여인과 아기 둘 다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여인은 누구이고, 태어나려고 하는 아기는 누구입니까? 여인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아기는 교회가 지켜내야 할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과 생명일 겁니다.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은 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도사리고 있는 용은 붉은색입니다. 사람들은 붉은 용을 공산주의로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붉은 색은 오히려 세상 권력을 쥔 왕들의 자색 옷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행복을 꿈꾸는 이들의 소박한 꿈을 짓밟고, 그들을 무의미한 전쟁터로 내몰고, 가혹하게 수탈하는 세력이야말로 붉은 용이 아니겠습니까? 그 용은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 개인데,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에 내던집니다. 이건 교만해진 권력이 하나님의 질서를 제멋대로 훼손하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절제를 모르는 인간의 욕망은 제국주의적입니다. 그것은 암세포와 같아서 무한한 자기 확장을 꾀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로 여인을 유혹합니다. 자기 한계를 지키지 않는 교만(휴브리스 혹은 하마르티아)이야말로 인간의 원죄인지도 모릅니다. 커지려는 욕망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 희망의 탄생
무시무시한 용의 위협을 받으며 여인은 아기를 낳았습니다. 요한은 그 아기를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즉시 그 아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등치시킵니다. 옳습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그치면 안 됩니다. 태어난 아기는 ‘길과 진리와 생명’입니다. ‘사랑과 평화’입니다. 용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런 가치들은 늘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요한은 그 아기가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다고 말합니다.

여자는 광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광야는 고독한 곳입니다. 온갖 악조건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는 교회의 운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여인을 돕는 자를 세워주십니다. 그릿 시냇가에 숨었던 엘리야는 까마귀를 통해 먹을 것을 공급받았습니다. ‘까마귀’로 상징되는 것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용의 위협이 아무리 커도 아기도 여인도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의 불빛이 가물거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묵시록적 풍경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폭탄 테러로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는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무감각해질 지경입니다. 기후변화로 말미암아 큰 재해를 당한 이들에 대한 보도도 이제는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허베이 스피리트 호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서해바다를 죽음의 바다로 만들고 있습니다. 모두가 사람이 만든 재앙입니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지역 주민들은 망연자실입니다.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죽어가는 뿔논병아리, 내려앉을 곳을 잃어버린 갈매기에게 볼 낯이 없습니다.

이런 묵시록적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이 탄생하고 있음을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12년 전 씨프린스호의 원유 유출 사고로 큰 피해를 입었던 여수 사람들이 와서 큰 피해를 입은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생일을 맞은 젊은이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생일을 자축하고 싶어서 여자 친구와 함께 현장을 찾기도 했습니다. 기름 냄새로 머리가 어지럽고 구토증이 나고, 중금속 중독의 위험이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피해 주민들의 마음 아픔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많은 이들이 현장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광야로 숨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먹이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희망은 연약하지만 결코 죽지 않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어느 시인의 시구가 귓전에 맴돕니다.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십시오
알몸으로 오시는 주여

지난 날
나자렛 예수라는
옷을 입고
가난한 호숫가를 거니셨듯이

오늘은 나를 당신의 옷으로 두르시고
동강난 이 강산에 오십시오.
(이현주,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십시오> 부분)

바로 우리가 알몸으로 오시는 주님의 옷이 되어 드려야 합니다. 믿음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광야로 내몰린 여인을 돌보고 먹을 것을 공급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힘을 북돋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 위로함으로 위로 받고
‘인간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이 우리를 잡아당기고 있습니다. 천사 쪽으로 끌려갈 때도 있고, 악마 쪽으로 끌려갈 때도 있습니다. 누가 잘 사는 사람입니까? 천사 쪽에 더 자주 마음을 두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잘 사는 사람은 다른 이들 속에서 천사가 승리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 어느 잡지에서 본 택시 기사 오문환 씨가 떠오릅니다. “어서 오세요. 최민수보다 멋지시네요.” 택시에 탄 어느 손님을 보고 그가 한 인사말입니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그는 손님들을 기분 좋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손님이 차에서 내릴 때면 폐지를 재활용해 만든 명함을 건네는 데, 거기에는 “빌 게이츠도 갖지 못한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을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에게 머물도록 기도드립니다” 라는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본래 유쾌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1997년에 닥친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고 방황하다가 택시운전을 시작했습니다. 택시 기사로 일하면서 어느 순간 자기처럼 힘들어하는 승객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축복하고 싶어졌습니다. 그의 차는 어떤 의미에서 성전입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이 따뜻해져 위로받고,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게 하니 말입니다.

저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바로 이게 신앙생활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도의 가장 귀한 특권은 누군가를 축복하고, 살맛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있어 누군가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삶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게 잘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자신에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나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나의 자아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의 존재가 내 삶의 방식이 되기를 소망할 때 우리 삶은 조금씩 자유롭고 평화스럽게 됩니다. 택시 기사 오문환 씨는 승객들의 사연을 듣고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위로받고 구원받은 것은 자기였다고 고백합니다. 이게 신앙의 역설적 신비입니다.

해를 입은 여인은 다른 누구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낳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통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평화와 사랑은 벌거벗은 어린 아기처럼 우리 앞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 아기의 옷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아기를 품에 안는 순간 그 아기가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 내면에 평화를 가져오고, 우리 삶에 고요함을 가져오고, 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님은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통해 이 세상에 오시기를 바라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2월 16일 12시 39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