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51. 움돋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34-38
설교일시 2007/12/23
오디오파일 s071223.mp3 [6113 KBytes]
목록

움돋이
눅1:34-38
(2007/12/23)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였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 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보아라,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 님이 오신다
대림절이 시작될 무렵 저는 어느 때보다 고요하게 기다림의 절기를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마치 유조선 기름 유출 사건과 대통령 선거의 열기 속에서 녹아버린 것 같습니다. 엄벙덤벙하다보니 벌써 네 번째 촛불이 밝혀졌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환해졌나 돌아보니 부끄러움뿐입니다. 제 책장에는 가난한 페루 소년의 사진이 한 장 놓여 있습니다. 발그레한 얼굴에 수줍은 미소가 그렇게 천진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 그 얼굴을 거울삼아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저런 웃음 지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워합니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일수록 표정이 해맑습니다. 돈이나 욕심으로 오염되지 않은 無垢한 얼굴 앞에 설 때마다 ‘내가 뭐 하고 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얼굴에는 아벨을 살해한 가인의 독살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연말이 되어 우리 마음이 스산해질 때면 죽비소리처럼 우리를 깨우는 소리가 있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다”(눅3:4b-5)

이 말씀은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와 욕심으로 굽은 길을 반성조차 없이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예언자는 그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칩니다. 거칠고 험한 길을 평탄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이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혀야 합니다. 마음 상한 사람을 보면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굽은 길을 곧게 하는 일이고, 기다림에 충실한 삶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만날 생각에 가슴 설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그 만남의 시간을 가급적이면 늦추고 싶은 사람입니까? 지금 제 마음은 급합니다. 님이 오신다는 데 그만 늦잠이 들어 버린 사람의 마음을 노래한 함석헌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맑고도 거룩하신 그의 몸을/헤뜨린 이 속에 어찌 맞을꼬?/오, 내 맘이 급해./쓸자, 닦자, 고치자,/물을 뿌리자,/묵고묵고 앉고앉고/이 먼지를 다 어찌하노?/언제 이것을 아름다이 하노?”(<님이 오신다> 부분)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셔 들이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를 지나쳐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몸이 되어줄 이를 찾고 계십니다. 당신의 손이 되어 병든 사람, 마음 상한 사람, 귀신들린 사람을 어루만질 사람 말입니다.

• 새 생명의 모태
성탄 절기 때만 되면 떠오르는 이가 있습니다. 마리아입니다. 교회 전통은 마리아를 아주 우아하고 고귀한 여성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교회 전통이 그에게 덧입힌 이미지일 뿐입니다. 그의 실제 모습은 우리가 <마리아의 찬가>라고 부르는 노래 가운데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눅1:46b-48)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δουλη)이라 지칭합니다.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진솔한 고백입니다. 고대근동 사회에서 ‘종’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물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게다가 여자 종은 모든 종 가운데서도 하위에 속하는 존재로 아주 비천한 존재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처지를 그런 ‘여종’의 처지와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한 자기의 처지는 여종의 비천함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에게 하나님은 그런 처지의 사람들을 ‘보살펴주시는’ 분이십니다. 보살펴준다는 말이 하나님과 연결될 때에는 구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마리아의 하나님은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시고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는 분”이고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는 아직 남편과 동거하기도 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전갈을 받았을 때 몹시 놀랐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그대에게 임하시고, 더없이 높으신 분의 능력이 그대를 감싸줄 것”이라는 말을 듣자 곧 그 말을 수용합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사람들을 높이시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그 하나님의 일에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말입니다. 이 말을 통해 마리아는 비천한 삶을 팔자로 여기고 사는 역사의 객체(卽自的 民衆)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역사의 주체(對自的 民衆)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기 몸을 자궁으로 내놓은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마리아의 ‘움’(womb)에 들어온 아기야말로 새로운 세상의 단초 즉 ‘움’(새싹) 혹은 ‘움돋이’입니다. 움돋이는 초목의 뿌리나 베어낸 데서 나오는 움을 일컫는 말입니다.

마리아는 결코 연약한 여인이 아닙니다. 역사의 변혁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강인한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아멘’이 성탄절이라는 선물을 세상에 가져왔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당신의 움(자궁)이 되어줄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올 초에 나는 대법원에 예배를 인도하러 갔다가 참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서울고법의 최재형 부장판사입니다. 그는 작년 7월에 10살짜리 아들 영진이를 새로 얻었습니다. ‘보육원 어린이 4박 5일 가정체험 행사’로 인연을 맺은 영진이를 아들로 맞은 것입니다. 갓난아이였던 진호를 6년 전 입양한 터라 주변에선 말리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영진이가 ‘입양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그의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 부부는 영진이를 아들로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만난 기업은행의 부행장인 유희태 씨와 그의 아내 박길주 씨도 몸이 불편한 쌍둥이를 입양하여 기르고 있었습니다. 탤런트인 차인표 신애라 씨도 아이를 입양하여 키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의 움돋이가 된 사람들입니다. 입양 이야기만 했습니다만 세상에는 정말 아름다운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절망하는 것은 불신앙임을 그들은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동행
그런데 마리아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의지도 큰 몫을 했겠지만, 엘리사벳이라는 여인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주저하고 망설이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엘리사벳의 예를 들어 말했습니다. “그대의 친척 엘리사벳도 늙어서 임신하였다.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라 불리던 그가 임신한지 벌써 여섯 달이 되었다.” 그리고 못을 박듯 말합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엘리사벳의 존재 자체가 마리아에게는 큰 힘이었습니다. 두 여인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했습니다. 그 매혹적이지만 당혹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고마운 일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 손을 잡아준다는 것, 그것처럼 든든한 일은 없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책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진리만을 향해 용맹정진하는 보기 드문 목사님이었습니다. 책과 함께 보내온 편지글에는 나와의 만남을 기대한다면서 “한 늙은 목사의 외로움이 저 혼자만의 외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제 글을 읽으면서 ‘저기도 한 사람 있구나’ 싶었다면서, 보내는 책을 만나기 전 수인사(修人事) 여겨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수’는 ‘닦을 修’이지만 저는 그것을 ‘손 手’ 자로 오독하여 마음에 갈무리해두었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마음으로 내미는 손을 기쁘게 잡았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일상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상한 의미를 가질 때도 있습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아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남편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침묵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은 가장 절실한 말을 아내에게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것이 열병환자건 나환자건 가리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내 병든 몸과 마음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음을 아는 순간 우리 내면에서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엘리사벳의 존재는 마리아에게 ‘나는 홀로가 아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불신과 의심과 냉소와 독단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마음 든든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연약합니다.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 해도 지독한 외로움은 견딜 수 없습니다. 수많은 바알 선지자들과 아스다롯 선지자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던 엘리야도, 광야 피신 길에 로뎀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죽기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외로움처럼 사람을 무력하게 하는 게 없습니다. 가장 외로운 순간에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절망의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꾸는 <<死海의 호반>>이라는 소설에서 예수의 모습을 새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예수는 기적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기적을 바라고 그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실망합니다. 실망이 분노로 바뀌기도 합니다. 소설에 나오는 예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당신들과 함께 괴로워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작가는 바로 그런 예수에게 매료되어 있습니다. ‘죽어가는 노인의 머리맡에서 하룻밤을 밝히고, 자식을 잃은 어미 곁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고, 해질녘에 앞 못 보는 노파의 손을 잡아 주는’ 예수야말로 그의 구원자인 것입니다.

• 우리의 몸을 빌어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손을 내미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손을 잡아주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성탄절에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은 지금 우리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오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성도란 주님의 ‘자궁’이 되어드리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의 몸을 빌어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로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선 굳은 얼굴을 부드럽게 하십시오. 그리고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십시오. 나를 통해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흘러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십시오. 이것이 성탄절기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동참함을 통해 비천한 여종으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의 베일을 벗어던졌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몸을 일으킬 차례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은 주님을 잉태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어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새로운 세상의 움돋이가 되라는 부름 앞에 서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삶이 주님의 꿈을 이루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2월 23일 12시 12분 4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