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성탄. 임마누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사 7:10-14
설교일시 2007/12/25
오디오파일 s071225.mp3 [432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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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사7:10-14
(2007/12/25)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 국가적 위기 앞에서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우리의 이웃들, 특히 태안반도 주민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손문상 화백은 <태안과 성탄>이라는 그림에서 사람들 틈에 섞여 방제복을 입고 바위에 묻은 기름을 닦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기름을 닦고 계신 예수님은 어쩌면 가슴이 새카맣게 타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닦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우리 삶의 자리와는 무관한 저 편에 계신 분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오시는 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God-(is)-with-us)이라는 뜻입니다. 풀무불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의 세 친구들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사자굴 속에 던져졌던 다니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 광야로 내쫓긴 하갈과 이스마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야말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제 책상에는 케테 콜비츠(Kaethe Kollwitz1867-1945)의 판화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그 작품에는 두 손으로 빈 밥그릇을 받쳐 들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동정을 바라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떠돌이가 된 아이들이 구호단체의 급식을 받는 모습입니다. 위를 향한 아이들의 시선은 필경 밥을 나누어주는 어른들을 향한 것이겠지만, 제게는 그것이 하늘을 향한 하소연처럼 보입니다. 성탄을 기뻐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아이들의 빈 밥그릇을 채워주는 것, 그 아이들의 슬픈 눈동자에 기쁨을 돌려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임마누엘의 비전은 남왕국 유다가 큰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에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신흥강대국인 앗시리아의 팽창정책에 맞서기 위해서 시리아와 북왕국 이스라엘은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힘만으로는 앗시리아를 막아낼 수 없었기에 그들은 유다도 그 동맹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유다가 거절하자 시리아-이스라엘 동맹군은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왕과 백성의 마음은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습니다. 그때 예언자 이사야가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아하스 임금 앞에 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 시리아 이스라엘 동맹군이라는 것은 “타다만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으니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위기는 분명 위기입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은 ‘중심’입니다. 중심이 무너지면 모든 게 무너집니다. 이사야가 데리고 간 아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는 끝내 중심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곧 남은자들에 의해 계속되게 마련임을 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 한 아기
그러나 공포심에 넋을 잃은 아하스는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구하라고 말하지만 그는 그것도 거절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이 아니라,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사야는 주님께서 다윗 왕실에 주는 징조를 예고합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나오는 ‘처녀’라는 말에 집착하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동정녀 탄생 교리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처녀는 마리아이고 임마누엘은 예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처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알마’(alma)는 결혼을 했지만 아직 출산하지 않은 여인이나, 가임기에 있는 여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을 그리스말로 옮기면서 번역자들은 ‘알마’를 ‘파르테노스’(parthenos), 즉 ‘처녀’라고 옮겼습니다. 이사야는 아기의 탄생이라는 일상적인 일 속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려 한 것인데, 그리스말로 번역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뭔가 초자연적이고 신기한 탄생 이야기로 바뀐 것입니다. 이사야는 포위된 조국을 위해 태어난 운명의 아기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말합니다. 그 아기는 참 어려운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수많은 위기를 견뎌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키고 보호해야 할 그 아기의 존재야말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징표라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 던져진 역설적인 희망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 비쳐진 한 점 불빛입니다.

• 임마누엘의 징조가 된 사람들
한 아기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강대한 제국 로마의 식민지 변방에서, 그것도 말구유에 내려온 비천한 아이, 우리는 그분을 임마누엘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만나 참 사람의 길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눔과 섬김과 돌봄이야말로 참 평화의 길임을 배웠습니다. 떳떳한 삶의 길을 배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는 것은 그런 삶이 지금도 여전히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에게 주어진 소명은 또 다른 임마누엘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은 절망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서해 바닷가에 엎드려 기름을 닦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마음속에 드리운 어둠을 지우는 빛이 되고 있습니다. 논현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배정철(46) 씨는 1999년 3,000만원을 시작으로 매해 액수를 올리다가 올해는 1억 원을 얼굴 기형 환자들의 수술비용으로 내놓았습니다. 미담의 주인공들은 많고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사실을 삶으로 증언하는 이들입니다. 죽임의 농법을 버리고 유기농으로 전환한 농부들, 이주 노동자들을 성심으로 돌보는 사람들, 다문화 가정을 돕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피조물 사이의 막힌 담을 헐고, 끊어진 다리를 이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어두운 세상에서 별빛처럼 환히 빛나는 사람들, 그들이야말로 임마누엘의 징조가 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정부를 이끌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각계에서 욕구들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외국계 기업들은 규제완화와 노동의 유연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정규직은 늘어날 것이고, 양극화는 심화될 것입니다. 미국은 한미 FTA의 조속한 체결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함께 북한을 압박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하스 왕이 다스리던 시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국제정세 속에서 임마누엘의 소식을 듣습니다. 희망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겨자씨 한 알 속에서 천국을 보셨던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은 아름다워집니다. 성탄절은 이처럼 새로운 삶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이후 우리의 삶이 임마누엘의 징조로 우뚝 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7년 12월 25일 12시 03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