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 돌을 옮겨 놓아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11:38-44
설교일시 2008/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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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옮겨 놓아라
요11:38-44
(2008/1/27)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따.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을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 친구를 위하여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피해 요단 강 건너편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베다니 마을에 살고 있던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인편에 어떤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요11:4b) 하시고는 그곳에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사흘 째 되는 날 주님은 결심이 선 듯 제자들에게 “다시 유대 지방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적대감에 두려움을 느낀 제자들은 “선생님, 방금도 유대 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요11:8)라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결심은 단호했습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요11:11) 어떤 위험도 주님의 발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봉쇄정책으로 말미암아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가자 지구 사람들이 이집트와의 국경인 라파 검문소가 열리자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모습을 보셨는지요? 저는 저 절망과 죽음의 땅인 가자지구로 들어가기 위해 분리의 장벽 앞에 줄을 서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미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친구를 위해 죽음의 강을 건너려는 예수님의 모습은 무모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15:13)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이야기에 제자들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동료들에게 “우리도 그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장면 이후에는 제자들이 이야기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대신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많은 유대 사람들만이 무대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이야기의 흐름상 그들이 등장할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요?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예수님과의 동행을 거절했던 것일까요? 나중에 십자가를 향해 나아갈 때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지금 혼자 위험 앞에 서 있습니다.

• ‘나흘’의 신화를 돌파하라
예수님이 나사로가 살던 마을에 들어가시자 마리아가 마중 나와 그 발 아래에 엎드리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11:32b) 우리는 죽임의 세력이 지배하는 세상 도처에서 이런 절망의 외침을 듣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화재로 말미암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주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이 어린 것들이 굶어 죽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주님의 부재하심’에 대한 탄식이 도처에서 들려옵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기가 막힌 일을 만나면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탄식합니다. 탄식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없는 이들의 신음 소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호곡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나사로를 가둔 무덤 앞에 이르셨습니다. 더 이상 희망은 없다는 듯 굳게 닫힌 돌문 앞에 서신 주님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나사로의 시체는 저 무심한 돌문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저 강고한 무덤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무덤 앞에 선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1989년 천안문 광장 앞에서 탱크와 마주섰던 중국인들의 심정이 그러했을까요? 1986년 민주화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군인들의 총에 꽃을 매달아주며 평화를 호소했던 필리핀 사람들의 심정이 그러했을까요? 태극기를 펼쳐들고 페퍼 포그(Pepper-Fog) 차를 향해 돌진하던 한 젊은이의 심정이 그러했을까요? 거대한 권력 삼성의 비리를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심정이 그러했을까요?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은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마르다가 다급하게 말합니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자는 말입니다. 괜한 일로 마음의 상처를 덧내는 일만은 피하자는 것입니다. 죽은 지가 나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사흘 후에 몸을 떠났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나흘이 되었다는 말은 그의 영혼이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강을 이미 건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도 ‘나흘’이라는 신화에 갇혀 살 때가 많습니다. 믿음의 반대말은 절망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불신앙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희망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이 시작됩니다. 사탄은 ‘나흘’의 신화를 널리 유포하면서, 기존 질서에 순응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나흘’의 신화에 굴종하기를 거부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요11:40) 믿음이 요구되는 것은 인간의 희망이 끝난 곳입니다.

• 나사로야, 나오너라
사람들이 돌문을 옮겨놓자 주님은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아직 성취되지도 않은 현실에 대한 감사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주님은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절망을 넘어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구하는 우리의 바람을 듣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입을 벌리고 있는 무덤을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십니다. 마침내 나사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어떻게'라고는 묻지 마십시오. 엉뚱한 상상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이 사건이 들려주는 메시지를 놓치기 쉽습니다. 나사로가 무덤 입구에 서있습니다. 마치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 경계선에 서있는 듯합니다. 그의 손과 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습니다. 그러니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걸을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그는 죽음의 사슬에서 아직은 풀려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을 듣습니다.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죽음의 사슬을 풀어주라는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명령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요한은 이야기를 미완성으로 끝마쳤을까요? 그것은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라”는 명령은 2000년 전 유대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주위에는 죽음의 옷을 벗어버리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걱정이 사슬이 되어 우리를 얽어맵니다. 그것들을 풀어내는 방법이 없을까요? 지금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을 놓아버리면 됩니다. 집착이 결국은 지옥입니다.

춘천에는 도장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발이 불구였습니다. 그래도 어렵사리 마련한 일터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화재가 나서 그만 손까지 다 녹아내리고 말았습니다.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던 그 때 그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가족들이었습니다. 여전히 그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 생각에 그는 몸과 마음을 추슬러 일어섰습니다. 어느 날 그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목사님이 막도장 하나를 파려고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반가워하며, 중학교 2학년짜리 딸 자랑을 했습니다. 며칠 전에 딸이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아와서 그의 앞에 내놓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루 종일 매만지며 고마워 하다가, 학교에서 돌아온 딸에게 그 봉투를 내밀고는 말했습니다. “하루 종일 아빠가 고마워하며 만졌단다. 아빠 마음속에 이보다 더 많은 돈이 스며들었으니 이젠 네가 가지렴. 그동안 사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테니 마음대로 써도 된단다.” 다음날 학교에서 전화가 왔더랍니다. “따님이 장학금으로 받은 돈을 도로 가지고 왔어요. 자기보다 더 어려운 아이에게 전해달라고 하면서요. 집안도 어려울 텐데 그냥 쓰시지 않고….” 형체만 남은 손가락으로 도장을 파면서도 그의 표정은 누구보다 밝았습니다. 추위를 겪어본 사람만이 햇살의 따뜻함을 깊이 느낀다지요? 그 가정에 드리웠던 죽음의 너울은 이들 부녀의 마음 씀을 통해 벗겨졌습니다.

세상에는 천과 수건으로 묶인 채 무덤 앞에 서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병든 이웃들을 돌보기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내는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을 돕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 장애인들이나 버림받은 이들을 돕기 위해 자기의 집을 개방한 사람들, 세상 도처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선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나사로의 몸에서 천과 수건을 벗겨내는 사람들입니다. 이 일을 위해 꼭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가진 것은 없다 해도 따뜻한 마음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습니다.

• 할 일이기에 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인종주의, 군사주의, 개발 지상주의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 급격한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세계 도처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남극과 북극이 녹아내리고, 킬리만자로의 만년설이 거의 다 녹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남극에서 서식하는 아델리펭귄은 최근 25년 사이에 65% 가량이 줄었습니다. 남태평양의 많은 섬들이 바닷물에 잠길 날이 멀지 않았답니다. 다들 야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났다고 말하는 격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요11:25b-26)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서는 ‘아니오’라고 말하고, 생명을 향해서는 ‘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보살피고 돌보는 일, 이웃들을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너울을 벗겨내는 일은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주님은 광야까지 당신을 따라 나선 수천 명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계산이 서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쳤을 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남았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일 만큼의 음식이 아니라, 그들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리면서 그들을 먹이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세계가 처한 상황에 비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도 제한적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우리가 시작하면 주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보고 계십니까? 지금 우리의 친구인 나사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돌을 옮겨 놓아라.”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이것은 사랑으로의 부름입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문규현 신부님의 말씀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옆 사람 기운을 북돋워주는 일,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 같이 웃어주고 슬퍼하는 일…이 모든 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손길들이 존재를 존재이게 하고, 생명을 생명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평범한 우리들의 사랑 가득한 삶이 세상을 지탱하는 원동력입니다.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고 튼튼하게 진행되도록 합니다.”(문규현 신부 글, 홍성담 화백 그림, <<그래도 희망입니다>>, 101쪽)

등 록 날 짜 2008년 01월 27일 12시 22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