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0. 아바 아버지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0:17-24
설교일시 200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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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 아버지
눅10:17-24
(2008/3/9)

[일흔<두> 사람이 기쁨에 차서, 돌아와 보고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세력을 누를 권세를 주었으니, 아무것도 너희를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이렇게 아뢰었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은혜로우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 밖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아들 밖에는, 그리고 아버지를 계시하여 주려고 아들이 택한 사람 밖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서서 따로 말씀하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하였으나 듣지 못하였다.”]

•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저는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한솥밥’이라는 글씨를 가끔 들여다봅니다. 식구라는 단어가 자아내는 울림처럼 한솥밥이라는 단어도 뭔가 코끝을 찡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 그들은 밥을 매개로 하여 정서적인 일치감을 맛봅니다. 저는 예수님과 동행이 되어 살았던 제자들이 참 부럽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주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고, 온갖 생의 고통에 짓눌리고 있던 이들을 회복시키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의 현실에 눈을 떴을 것이고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역량을 습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한 배움은 몸으로 익힐 때 일어납니다. 주님이 칠십인의 제자들을 둘씩 짝 지어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라고 파송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설렘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독립이란 그런 것입니다. 두렵다고 피한다면 우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시행착오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풍랑이 두려워 항구를 떠나지 않는 배는 안전하기야 하겠지만, 아무 데도 이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배웁니다. 사도 바울도 신앙생활이란 ‘목표점을 바라보면서 달려가는 것’이라면서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해야 한다(빌3:16)고 말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복음을 들고 나갔던 제자들은 기쁨에 가득 차서 돌아왔습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을 대면, 귀신들까지도 우리에게 복종합니다.” 들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제게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신앙생활이란 칭얼거리는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령관 앞에 보고하는 병사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적과 어떻게 싸워 승리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를 보고하고, 새로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라는 말입니다. 저도 제자들처럼 승리의 보고자가 되고 싶습니다.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믿는 사람답게 산다는 것, 즉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 산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일도 아닙니다. 百聞이 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지요? 저는 그것을 조금 바꾸어 百聞이 不如一行으로 고쳐보고 싶습니다. 신앙은 실천으로 번역될 때 비로소 나의 것으로 체화 됩니다.

제자들이 사탄과의 싸움에서 거둔 개별적인 승리에 도취해 있을 때, 주님은 그런 승리가 사실은 사탄의 권세에 대한 궁극적인 승리의 징표임을 밝히고 계십니다. 스승이란 늘 부분 속에서 전체를 보고, 전체 속에서 부분을 보는 사람인가 봅니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공중의 권세잡은 자인 사탄이 지배하는 곳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무력한 자들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 하늘에 기록된 이름
주님은 아직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던 그 순간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제자들의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십니다. 그들이 정말 기뻐해야 하는 것은 그런 작은 승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굴복한다고 해서 기뻐하지 말고,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20)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으면 자동적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생명책’을 떠올립니다. 마치 심판대 앞에 가면 우리의 행실을 적어놓은 책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은유적인 표현이지 실체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여기서 신적 수동태로 표현된 ‘기록된다’는 단어는 ‘새겨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름이 하늘에 새겨진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존재가 되었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여 당신의 손과 발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신다는 말이 아닐까요?

주님의 손과 발이 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우애를 갖고 타인들의 삶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입니다. 내면에서 고통을 받고, 역경과 모순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북돋워주는 말 한마디가 절실한 사람에게 다가가 친절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입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깊은 강>>에 나오는 오오츠라는 인물은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사랑이라는 말이 낡아빠진 느낌이 든다면 ‘생명의 따스함’, 그렇게 불러 주세요.”

이 말이 참 좋습니다. 예수는 생명의 따스함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일 것입니다. 며칠 전 김정애 성도님의 병실을 방문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나오려는 데 옆 병상에 누우신 분이 다급하게 제게 “목사님이시지요? 저를 위해서도 기도 해주실 수 없나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심장이식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절박한 그분의 심정이 제 마음에 큰 아픔이 되어 다가왔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나오는데 내가 절박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쓰임받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 성공을 위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멈추어 저울질해보십시오. 좋은 집, 좋은 차, 높은 자리가 더 소중한지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 어느 것이 무겁습니까? 저는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쪽을 택하고 싶습니다. 자기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싶으시다면 과연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공감할 줄 알고, 그의 필요에 응답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십시오.

• 감춤과 드러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거듭난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주님은 소위 지혜 있는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 아이같은 이들에게서 실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십니다. 묘하지요? 왜 지혜 있는 사람, 똑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 현실이 보이지 않는 것일까요? 누가는 ‘감추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능동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배제하기 위해 일부러 감추셨다면 그건 공정하지 못한 일입니다. 오히려 이 말은 소위 똑똑하다는 이들 스스로 눈을 감았다는 말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을 고쳐주신 후 주님은 바리새파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9:41고 말씀하셨습니다. 똑똑함과 지혜로움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눈 앞을 가리는 가림막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본다 하는 이들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하늘의 빛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밀가루가 끊어지기까지는 하늘의 만나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엉뚱한 것에 맛들이고 사는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전성은 선생님과의 대화 중에 들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일제 말기의 어느 주일 오후에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님은 헌병들에 의해 연행되었습니다. 잡혀가는 아들을 향해 일자무식의 아버지가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손 목사,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말씀을 기억하게. 그리고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고 하신 말씀도 기억하게.” 이 상황에서 이보다 더 적절하고 강력한 말은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를 통해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손양원 목사의 불안한 마음을 비추는 빛이 되었을 것입니다. 배운 것 없는 그 아버지는 신앙과 인생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습니다. 신적인 통찰력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철부지 어린아이같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마음을 다해 받아들입니다. 공자님은 자신에게는 ‘意必固我’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意’란 다른 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측하고 예단하는 것입니다. ‘必’은 반드시 어떻게 하겠다는 억지입니다. ‘固’란 완고하게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我’란 모든 일을 자기 본위로 하는 이기심을 말합니다. 하늘을 본 사람만이 고개를 숙여 자기를 내려놓습니다. 늘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사는 사람, 늘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은 아직 하늘과 만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예언자도 왕도 보지 못했지만, 지금 제자들이 보는 것을 보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어린아이와 같았던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영악한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세상 물정 모르는 분임이 분명합니다.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그렇고,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준엄하게 질타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는 적당히 비위 맞추는 법을 모르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걸림돌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 천진하셔서 세상 물정을 모르셨던 것일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시면서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10:16)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분처럼 사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하나님은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과의 지극한 친밀함을 일컫는 말입니다. 주님의 삶은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 한 마디로 수렴됩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를 속속들이 압니다. 그리고 상호 위임 가운데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맡겨 주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이 깊은 신뢰야말로 예수의 거침없는 삶을 설명해주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 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테네 시내를 뒤져 그리스어로 된 <<그리스인 조르바>>를 구입한 것도 그의 위대한 자유혼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어를 잘하는 그리스 사람을 찾아 책 속표지에 그리스어로 “자유를 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을 기억하며”라고 써놓았습니다. 장거리를 이동하던 중에 가이드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카잔차키스의 작품 중에서 그리스인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 것이 <<미칼레스 대장>>인 것 같다고 말하자,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대장’이라는 말이 갖는 뉘앙스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깊이 신뢰하고 경외심을 갖는 대상을 향해 일쑤 ‘대장’이라는 호칭을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의 ‘대장’이 예수님에게는 ‘아바 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는 사람은 두려움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셨습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삶의 매순간 함께 하시는 아버지의 숨결을 느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현실이 제 아무리 암담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미움과 증오심으로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비폭력만이 진정한 변화의 동력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기력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것은 배려와 친절과 사랑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미움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지난 화요일 우리 교우 38명을 포함한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새재에 모여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돌아온 후에 저는 이현주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픈 가슴으로, 눈물겹게 아름다운 여주강 따라 걸었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 평화스런 강바닥을 뒤집으며 대운하를 건설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이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돌아설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몰라서 저러고들 있으니 벌을 내리시지는 말고 용서해주십사고, 모두 착한 사람들이니 어서 정신차리고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며 살게 해달라고, 강을 거스르지 말고 따라서 흐르며 살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울러, 생명의 강을 모시는 마음으로 순례하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했어요. 행여나 대운하 건설을 강행하려는 사람들에게 증오나 분노의 감정을 품지 말게 해달라고, 그보다는, 오직 평화를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하나로 충만하여 건강하고 행복한 순례자의 길을 걷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걸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없이는 우리는 이 무서운 세상을 건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 하지만 우리의 싸움은 사랑하면서의 싸움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 막바지에 우리 모두의 가슴에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나오는 기쁨과 소망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3월 09일 13시 34분 2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