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 네 칼을 도로 꽂아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26:47-56
설교일시 2008/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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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도로 꽂으라
마26:47-54
(2008/3/16)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하였다. 그런데 예수를 넘겨줄 자가 그들에게 암호를 정하여 주기를 “내가 입을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잡으시오” 하고 말해 놓았다. 유다가 곧바로 예수께 다가가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하고 말하고,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하고 말씀하시니, 그들이 다가와서 예수께 손을 대어 붙잡았다. 그 때에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손을 뻗쳐 자기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서, 그 귀를 잘랐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나의 아버지께 당장에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시기를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강도에게 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서 가르치고 있었건만, 너희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이렇게 되게 하신 것은, 예언자들의 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그 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다.]

• 기막힌 전락
오늘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주님은 올리브 산에 있는 벳바게 마을에서 출발하여 나귀를 탄 채 느릿느릿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 성문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펴고, 또 어떤 이들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들뜬 소리도 들려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은 착잡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염원과는 달리 성전 체제에 기생하면서 자기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파탄은 빨리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습니다. 거룩한 분노가 그를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종교 기득권자들을 두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비판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그들의 허물과 죄를 지적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종교적 권위라는 우산을 쓰고 호가호위(狐假虎威) 해왔던 그들의 가면이 벗겨질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그 가면을 붙잡으려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것만이 이 혼란을 수습하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기득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막힌 전락 아닙니까? 지금도 이런 종교 기득권자들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습니다.

• 힘에의 유혹
예수를 없애려는 그들의 음모에 가담한 것은 유다였습니다. 주님은 이미 그의 배신을 눈치 채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내 빵을 먹는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는 시편을 인용하심으로써 마음의 비통함을 드러내셨습니다(요13:18). 하긴 배신이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배신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친밀함과 신뢰가 졸지에 뒤집힐 때 누구라도 어지럼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신감이 다른 어떤 감정보다 쓰라린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해석은 다양할 수 있지만 나는 그저 숨겨진 권력에의 욕망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는 예수의 길, 즉 사랑과 자기 희생을 통해 사회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기대했던 것은 ‘물리적인 힘’(force)이었습니다. 사실 세상은 그러한 힘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돈과 권력과 대중의 지지처럼 매력적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힘은 ‘내적인 힘’(power),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건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유다는 신뢰했던 예수님의 길이 자신이 기대했던 길이 아님을 알자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것이 곧 예수에 대한 폭력에 가담하는 행동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를 어떻게든 없애려는 종교 기득권자들의 이해와, 자신이 느낀 배신감에 대한 보상이 필요했던 유다의 이해가 만나 예수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유다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 일행이 그들의 체포작전에 물리적으로 저항하리라고 예측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리적 힘’을 숭상하는 이들은 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들은 그렇기에 자신의 힘을 과시함으로써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합니다.

유다는 곧바로 예수님께 가서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하고 말하고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사말로 사용된 단어 ‘카이로 chairō’는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하는 인사말 속에 담긴 아이러니가 씁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무나 잘 아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유다에게 물으십니다. “친구여,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 주님은 그를 ‘친구’로 부르십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 ‘헤타이로스’(hetairos)는 ‘서로 연결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그를 여전히 자기와 연결된 사람으로 보고 계십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렇듯 깊습니다. 주님에게 유다는 길을 잃은 사람일 뿐, 몹쓸 배신자가 아닙니다. 사랑의 문은 유다에게도 열려 있습니다.

• 두려움을 넘어
그 밤, 겟세마네의 밤을 떠올려봅니다. 모두가 흥분상태에 있었을 것입니다. 칼과 몽둥이로 무장한 이들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당혹감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거친 숨결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오로지 고요한 것은 예수님 뿐입니다.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서성이다가 죽음을 통해 진리를 증언하기로 마음을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누가복음은 제자들이 “주님, 우리가 칼을 쓸까요?”(눅22:49) 하고 물었다고 보도합니다. 폭력은 강자들이 약자를 굴복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약자가 두려움 때문에 저지르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한 제자가 칼을 빼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쳐 귀를 잘랐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를 지키려는 열성이 그렇게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걷는다고 자부하는 이들도 위기의 순간에는 폭력의 유혹을 받습니다. 귀를 자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때로는 상대를 말살시키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들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칼을 믿는 사람들이 되는 겁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되갚으려는 마음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토대는 허물어집니다.

예수님은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도 유명한 말씀이라서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칼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늘 직면해 있습니다. 칼을 든 사람은 휘둘러보고 싶다지요? 일단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을 행사해보고 싶은 유혹은 즉각적인 것 같습니다. 차를 타고 가노라면 보행자가 걸리적거리는 것 같고, 크고 고급스런 차를 타면 작은 차들이 눈에 거슬립니다. 체육대학의 신입생 신고식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절교육을 명분으로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인사법부터 가르칩니다. 90도 이상으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조폭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선배들은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 후배들을 굴리고 또 굴립니다. ‘하나’라는 선배의 구령에 ‘개념을’, ‘둘’에 ‘찾자’고 복창을 했다지요?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개념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힘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 존재의 슬픈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포기할 수 없는 것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는 말씀이 새삼스러운 것은 그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힘을 평화를 일구고, 누군가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일에 사용하지 않는 한, 그 힘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누가복음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눅22:51). 따지고 보면 그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불의한 체제의 하수인이 되어 살고 있을 뿐, 그들을 악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즉시 네 편/내 편, 선인/악인으로 가를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서 잘못과 허물을 찾으려 할 때 우리 시력은 2.0을 넘어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죄인으로 규정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조차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들 속에 있는 연약한 것, 혼돈, 두려움, 상처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도덕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지도, 정죄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지도 않고, 창피를 주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들 손에 너무나 예리한 칼이 들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길을 걷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예수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존 디어(John Dear) 신부는 <<살아 있는 평화>>라는 책에서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고자 한다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 안에 있는 폭력을 뿌리뽑고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하고, 쓰라림과 앙심을 놓아 버리고 서로 화해하며, 하나님의 영이 자유롭게 우리 사이를 운행하시도록 자신을 열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제 저는 미켈란젤로(1475-1564)가 제작한 조각작품 ‘피에타’ 사진 두 개를 앞에 두고 묵상을 했습니다. 하나는 산 피에트로 성당(San Pietro Basilica)에 있는 잘 알려진 작품입니다.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제작한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올려놓고 비탄에 잠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감정적인 동요는 보이지 않습니다. 초월적인 고요함이 느껴집니다. 그 작품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마리아입니다. 다른 하나는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 성(Sforzesco Castello) 박물관에 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입니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조각에서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면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름다운 균형과 비례가 도드라진 산 피에트로의 ‘피에타’보다, 투박하고 거친 느낌의 이 ‘피에타’가 제 마음에 큰 감동을 주는 것은, 아마도 고통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겁니다. 만년의 미켈란젤로의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께서 오히려 세상의 모든 아픔을 업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등에 업혀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납치당해 주검으로 돌아온 사랑하는 딸 이혜진 양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는 아이들, 청년 실업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티베트 독립을 외치다가 박해를 받아 죽어가는 사람들, 낯선 땅에 정착하려 왔다가 남편의 폭력으로 죽어간 베트남 여성들, 개발의 덫에 걸려 신음하는 자연세계…. 상처입고 찢기신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그렇게 업고 서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힘에 대한 숭배입니다.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은 사랑과 신뢰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등에 업혀 있는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이 있다는 확신과, 그들 편에 서려는 결단과 행동입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와 신음하는 온 세계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3월 16일 12시 33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