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2. 꽃 진 자리에 남는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8:31-37
설교일시 2008/03/23
오디오파일 s20080323.mp3 [467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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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진 자리에 남는 것
롬8:31-37
(2008/3/23, 부활절)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죽으셨지만 오히려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며,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하여 주십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 죽음은 최후의 말이 아니다
온 누리에 부활의 빛이 찬란한 오늘,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흐린 날씨조차도 우리 마음에 깃든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곧 정의’라는 폭력의 신화에 짓눌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근원적인 힘은 사랑과 희생임을 일깨우기 위해 애쓰시다가 주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사랑과 희생이 실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드러내는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십자가 아래 서있던 사람들은 한결 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죄 없이 고통당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보인 조롱과 멸시는 힘이라는 ‘물신’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드러내는 표징이었습니다. 힘이 정의라고 믿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을 손에 쥐는 것입니다. 둘째는 힘 있는 자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입니다. 문제든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인간다운 삶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힘이 정의가 아님을 단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얼어붙었던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새싹처럼 우리 마음에 경이로움을 안겨줍니다. 부활은 세상의 질서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그 질서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치 시간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새로운 세상의 모퉁잇돌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세상의 임금들이 일어나 음모를 꾸미고, 주님의 뜻을 가로막으려 할 때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가 웃으신다. 내 주님께서 그들을 비웃으신다”(시2:4)고 노래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오만한 세상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파안대소입니다. 사도 바울은 호세아를 인용하여 죽음의 패배를 이렇게 선언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 삶을 모른다면
부활의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더 이상 죽음은 지배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흔히 죽음 이후의 문제인 줄만 아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현실입니다. 어느 날 季路가 孔子에게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삶을 모른다면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이면 焉知死리오, <<論語>>, 先進編 11章)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문답을 두고 유교는 죽음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자의 이 대답은 ‘지금 여기’의 삶을 소홀히 하면서 죽음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뜻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한번 주어진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공자님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朝聞道면 夕死라도 可矣니라, <<論語>>, 里仁編, 8章)고 했습니다. 굉장히 비장하지요? 하지만 구도자의 자세는 이러해야 합니다. 이런 목마름이 없다면 진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道’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일 겁니다. 만일 그것을 알고 그것을 거스르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뜻을 알고 사신 분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몇 마디 말씀은 참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요4:34)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요5:19b)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요5:36)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양식으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누구를 본받으며 사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존재를 증언합니다.

● 인간에 대한 예의
부활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철저히 생명을 아끼고 존중하는 삶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급격하게 무너지는 현장입니다. 사람들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다 분주합니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늘 다른 곳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각박하고 황폐해져 다른 이를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전락합니다. 어느 영어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회전문 앞에서 다른 이에게 ‘먼저 들어가라’ 할 때 하는 말이 뭐지요?” 선생님이 기대한 답은 ‘after you’ 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뭐 그까짓 질문을 하냐는 듯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go away.’ 해석하자면 ‘저리 가, 꺼져’라는 뜻 쯤 될 겁니다. 우리 삶이 꼭 이렇습니다. ‘after you’ 해야 할 때 ‘go away’ 하며 삽니다. 늘 내가 우선입니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에서 이물질이 나와도, 참치 캔에서 칼날이 나와도 회사는 쉬쉬 하며 숨깁니다. 알려지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돈이기 때문입니다. 반찬을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려고 온갖 인공색소와 인체에 유해한 것들을 넣는 이들도 있습니다. 돈 때문에 마땅히 따라야 할 인간의 길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납치되어 살해된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의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범인은 전형적인 ‘사이코패스’(psychopath)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이코패스란 겉은 멀쩡하면서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는 악마가 아닙니다. 다만 병들고, 파괴된 사람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깊이 병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유대계 이탈리아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나치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자기의 경험을 담은 책입니다. 그는 자기가 그 참혹한 수용소에게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세상은 우리에게 짐승 같은 삶을 강요합니다. 많은 결혼 이민자들이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중국은 독립을 구하는 티베트인들의 외침을 무자비한 총격으로 막았고, 많은 나라들이 이 일에 침묵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 꽃 진 자리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이 날 이런 우울한 이야기를 하게 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 두려움 없이 생명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한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환난도, 곤고함도, 박해도, 굶주림도, 헐벗음도, 위협도, 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부활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은 세상이 만들어놓은 쳇바퀴 속에서 살아가기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지켜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도구는 친절과 따뜻함, 너그러움과 감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고백이 큰 울림이 되어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어느 시인은 가슴이 아파 눈물이 나는 그 절망의 자리, 꽃이 진 자리야말로 열매의 자리라고 말합니다(落花處餘實). 이혜진 양과 우예슬 양이 진 그 자리, 베트남 신부 쩐타인란이 죽어간 그 자리, 자유를 위해 흘린 티베트인들의 피가 흐른 그 자리에서 우리가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찌 부활을 믿는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 원통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2008년에 부활을 고백하는 우리의 소명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 각자에게 품부된 고귀한 생을 맘껏 누리며 사는 세상을 꿈꿀 수 있는 까닭은 주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류애라는 숭고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낙심치 않는 것도 주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3월 23일 12시 21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