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7. 비뚤어진 사랑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5:20-25
설교일시 2008/04/27
오디오파일 s20080427.mp3 [709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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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이 말을 야곱의 자손에게 전하고, 유다 백성에게 들려주어라. 이 어리석고 깨달을 줄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 너희는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너희는 내가 두렵지도 않으냐? 나 주의 말이다. 너희는 내 앞에서 떨리지도 않느냐? 나는 모래로 바다의 경계선을 만들어 놓고, 바다가 넘어설 수 없는 영원한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 비록 바닷물이 출렁거려도 그 경계선을 없애지 못하고, 아무리 큰 파도가 몰아쳐도 그 경계선을 넘어설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는 목이 곧아 고집이 세고 반역하는 백성이어서, 나에게서 돌아서서 멀리 떠나고 말았다. 너희는 마음속으로라도 ‘주 우리의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다. 그분은 제때에 비를 주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철따라 내리며, 곡식을 거두는 일정한 시기를 정하여 주었다’ 하고 말한 적이 없다. 바로 너희의 모든 죄악이 이러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하였고, 너희의 온갖 범죄가 그 좋은 것들을 가로막아, 너희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

• 열 번째 날의 호랑이
호랑이 한 마리가 숲에서 잡혀와 우리에 갇혔습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길들이려고 했지만 호랑이는 끈질기게 으르렁대며 우리의 쇠창살을 이빨로 물어뜯으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자유로운 존재였고 숲의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련사는 호랑이를 굶김으로써 대응했습니다. 그는 여유롭게 중얼거렸습니다.
“무척 사나운 호랑이로군. 하지만 당나귀처럼 굴게 될 거야. 내가 먹이를 갖고 있는데 주지 않을 테니까.”
호랑이는 배가 고파졌고, 조련사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조련사는 고양이처럼 야옹거리면 고기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거절했습니다. 그는 호랑이지 고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틀 후 굶주림에 굴복한 호랑이는 조련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양이처럼 야옹거렸습니다. 하지만 조련사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먹이를 달라고 하자 조련사는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라고 요구했습니다. 백수의 왕으로서의 체신 때문에 호랑이는 그 제안을 거부했고, 며칠을 먹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배가 고파서 결국 호랑이는 당나귀처럼 히힝댔습니다. 그날이 호랑이가 우리에 갇힌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호랑이가 히힝대는 소리를 들은 조련사는 고기가 아닌 한 더미의 건초를 던져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숲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팔레스타인과 한국의 대화>>에 나오는 자카리아 무함마드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 중에서, 165-166쪽)

이 슬프고 참담한 이야기는 시리아 작가인 자카리아 타메르의 <열 번째 날의 호랑이>라는 단편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 작가인 자카리아 무함마드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이스라엘은 투옥, 검문소, 모독, 고문, 폭격과 학살, 굶주림을 동원해 사람들을 굴복시키려는 조련사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나귀처럼 히힝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싸우고 저항하면서 자기 영혼을 불모지로 만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나는 내 영혼이 증오와 어둠의 바다에서 헤엄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즉각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욕망 충족’이라는 건초더미를 들고 우리에게 히힝거리라고 말합니다. 타락이란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열 번째 날의 호랑이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 social designer
제가 처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 제일 자주 듣던 말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대표기도 때마다 장로님들은 ‘버러지만도 못한 우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참 싫었습니다. 지나친 자기 비하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특히 그런 표현을 싫어했던 것은 그런 기도를 바치신 분들이 일상적으로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아랫것들’을 대하는 ‘상전’처럼 처신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 시간만 되면 ‘주홍빛 같이 붉은 죄’를 탄식했습니다. 참회나 아픔이 없는 탄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문제는 죄의 심각성에 대해 주목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기 가슴을 치는 사람들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다 내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의 무의식은 여전히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저는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많은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나는 죄가 없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죄를 짓고 삽니다. 미움, 시기심, 분노, 인색함, 무관심, 악의, 음란…초대받지 않은 이런 정념들이 불시에 찾아와 내 마음을 지배합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뇌의 프라이버시’라는 말을 보았습니다. 뇌과학의 빠른 발전은 미구에 우리 마음에서 벌어지는 일을 뇌영상을 통해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부부가 이혼 법정에서 말다툼을 합니다. 판사는 아내의 뇌영상을 살피고는 이내 판결을 내립니다. “뇌기능 자기공명영상을 보니 앞쪽 대상피질, 미상핵, 피각 등의 활동이 증가하지 않아 아내의 사랑이 식었음이 입증됐으므로 이혼을 허용합니다.” 무서운 시대가 오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죄의 충동 속에서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기에 망정이지 우리 마음이 화면에 나타난다면 날마다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사람은 천사도 악마도 아닌 중간적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 속에는 죄의 충동과 선의 충동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선의 충동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예수님의 위대한 힘은 ‘엎드림’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야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서 약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지난 월요일 우리 교회에 와서 <교회, 한국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강연한 박원순 변호사는 젊은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꿈을 접고, 제 한 몸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세상이 과연 정상적인 세상이냐고 물었습니다. 박 변호사가 제게 건넨 명함에는 ‘희망 제작소 상임이사’라는 직함 위에 영어로 ‘social designer’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의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모습이 바로 이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창조적인 재능을 가지고 세상에 공헌해야 합니다. 창조를 거절하는 것,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 순리대로 살 수는 없을까?
우리도 모르게 저지르는 죄가 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질서를 교란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은 시종일관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참 놀라운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 머물며 파도가 철썩이며 해안으로 밀어닥치는 광경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 거센 물결이 모래사장 앞에서 스러지는 모습을 보다가 어느 순간 그는 무릎을 쳤을 겁니다. ‘저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모래를 가지고 하나님은 저 큰 물의 경계를 정하셨구나.’ 당연한 것처럼 보이던 세계가 돌연 낯설게 경험될 때 사람은 경외감을 느낍니다. 밀폐된 공간에 들어간 숨이 막혀본 사람이 아니고는 공기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둘러싸여 살면서도 그것을 은혜로 인식하지 못합니다. 봄이 되었으니 꽃이 피고, 여름 되니 열매가 맺히고, 가을이 되니 단풍이 곱고, 겨울이 되니 눈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당연의 세계에는 감사와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세상은 지금 인간의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걸작품인 세상은 병들었습니다. 우리가 순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마침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 이제 광우병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빗장이 열린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장이나 뼈 골수 등도 포함됩니다. 정부는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닙니다. 값싸고 질 좋은 쇠고기를 먹게 되었다면서, 염려되면 먹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만 그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습니다. 소뼈는 알약의 캡슐에 쓰이는 젤라틴의 원료이고, 동물성 화장품에 들어가는 성분의 원료이기도 합니다. 라면 스프와 조미료를 만드는 데도 들어갑니다. 쇠고기를 먹지 않아도 광우병의 가능성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런 위험은 초식동물인 소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사람들이 육골분 사료를 먹이면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식량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유전자 변형 농산물(genetically modified organism)을 만들어냅니다. 아직 그런 식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동물 실험 결과는 매우 놀랍습니다. 유전자 변형 농산물은 피실험 동물의 면역체계와 질병 저항력 약화시킨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슈퍼균을 발생시킨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탄식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너희는 목이 곧아 고집이 세고 반역하는 백성이어서, 나에게서 돌아서서 멀리 떠나고 말았다.”(23)

우리는 아담의 후예답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질서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 결과를 예측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창조의 왜곡이야말로 큰 죄입니다.

• 맹그로브 나무처럼
삶이 참 곤고하지요? 이스라엘의 코헬렛도 삶의 이런 속성을 탄식했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이게 우리들입니다. 죄의 종살이를 하는 이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습니다. 이 말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눈이 있어도 볼 수가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이라는 탄식과 상응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은총으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세상 만물들의 찬미 소리입니다. 그 때문입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누리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주 우리의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다. 그분은 제 때에 비를 주시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철따라 내리시며, 곡식을 거두는 일정한 시기를 정하여 주신 분이시다”(렘5:24) 하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불행은 뭔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너희의 모든 죄악이 이러한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하였고, 너희의 온갖 범죄가 그 좋은 것들을 가로막아, 너희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였다.”(25)

이 한 마디 말씀을 자각하는 순간 삶의 변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되는 육의 생명(bios)은 늘 결핍과 허기를 느낍니다. 그들에게 세상과 이웃은 욕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거기서 소외와 비인간화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zoe)로 거듭난 이들은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는 누군가의 잔을 채워주는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며 다른 이들과의 연대감입니다. 갠지스 강 삼각주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강물을 정화시키는 맹그로브 나무처럼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대지를 정화시키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혹은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며 사십시오. 물질도 나누고, 지식도 나누고, 시간도 나누고, 정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리스도의 몸은 자랍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들 가운데서 악의 영토는 줄어들고, 선의 영토는 늘어날 것입니다. 주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더러 들려 바다에 빠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산을 움직이는 믿음은 사실은 나를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산보다도 더 무거운 내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로 옮겨 놓을 때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내 배만 불리려는 비뚤어진 사랑 때문에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제 진짜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주는 기쁨,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려 할 때 돌연 삶은 축제가 됩니다. 성도는 <열 번째 날의 호랑이>가 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이 자부심으로 일어서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4월 06일 12시 5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