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0. 은혜와 열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디도2:11-15
설교일시 2008/05/18
오디오파일 s20080518.mp3 [709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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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건져내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대는 권위를 가지고 이것들을 말하고, 사람들을 권하고 책망하십시오. 아무도 그대를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

• 은혜와 변화
신앙생활의 두 초점은 은혜 체험과 변화된 삶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와 깊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롬5:6)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롬5:8)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롬5:10)

아직 우리가 구원 받을만한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전히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세상 유혹에 속절없이 끌려가고, 선한 일 앞에서는 주춤거리는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긍정이야말로 은총입니다. 찬송가 620장은 “여기에 모인 우리 주의 은총 받은 자여라/주께서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노라”라고 노래합니다. 허물없는 사람이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때 묻고,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그냥 받으십니다. 느슨해진 마음은 조여 주시고, 너무 팽팽해진 마음은 풀어주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제 은총의 선율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값없이 베푸시는 은총을 ‘직설법’(indicative)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서술상 판단의 주체가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문법상의 표현법”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적인 의미에서 직설법이라는 말은 판단의 주체이신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해주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선언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사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스러지고 마는 것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살지 않습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영혼을 팔아 육신의 만족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덧없는 것들을 얻기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절 한번만 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는 사탄의 유혹을 단호히 뿌리칩니다. 결곡한 마음으로 유혹을 뿌리칠수록 그의 영혼은 커지고, 자유의 공간은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붙들어 매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결박들은 풀어집니다. 이게 신앙의 신비입니다.

• 불경건함에 대한 ‘아니오’
사도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기 이전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고, 순종하지 아니하고, 미혹을 당하고, 악의와 시기심을 가지고 살고, 남에게 미움을 받고, 서로 미워하면서 살았습니다.”(딛3:3)

어떻습니까?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때로는 이성으로, 때로는 교양으로 가리고 살지만 자칫하면 범람하는 하천처럼, 우리 마음은 늘 위태롭습니다. 마치 붕붕거리는 벌이 자기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속에 깃든 이기심과 욕망은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이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 안에 머물 때 삶은 새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딛2:12)

할렐루야! 이것이 은혜 안에 있는 삶입니다. 영어 성경은 이 대목을 참 맛있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지 않음과 세속적인 열정을 향해 ‘아니오’라고 말하게(to say 'No') 하고,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게(to live) 한다는 것입니다(It teaches us to say "No" to ungodliness and worldly passions, and to live self-controlled, upright and godly lives in this present age). 아까 하나님의 은총은 ‘직설법’이라고 말했지요? 그 은총에 응답하는 성도는 새로운 삶을 요구받습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신앙의 ‘명령법’(imperative)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겁니다. 성도는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길들이려는 일체의 것들,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게 하려는 온갖 유혹에 맞서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그래서 ‘맞섬’이고 ‘대듦’이고 ‘길들여지는 것에 대한 거부’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은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고, 불의에 맞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의 어두운 열정은 ‘내 코가 석 자’라고 말합니다. 성령은 사랑과 평화와 온유와 절제를 택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욕은 우리에게 ‘분노’와 ‘욕심’을 부추깁니다. 성도는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와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동양의 현인은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자는 밝으며, 남을 이기는 자는 힘이 있고 자기를 이기는 자야 말로 뜻이 굳세다’(知人者智, 自知者明. 勝人者有力, 自勝者强. <<노자>> 33장) 했습니다. 말이 쉽지 나와 싸워 이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배고픔이나 졸음도 이기기 어려운 판에 어떻게 달콤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백전백패까지는 아니어도 승보다는 패가 많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제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라고 노래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해줍니다.

• 은혜받은 자의 소망
각오가 비상하면 한 두 번은 자기를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삶의 방식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가 자주 사용하던 단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에게 집중한다는 말입니다. ‘집중’이란 단어는 ‘모을 集’과 ‘가운데 中’ 자를 쓸 때는 ‘한 곳으로 모은다’는 뜻이 되고, ‘잡을 執’과 ‘가운데 中’ 자를 쓸 때는 ‘과부족이나 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굳게 붙잡는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후자의 의미, 즉 삶의 모든 순간에 주님을 우리의 중심으로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 執中하는 사람은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도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합니다.”(딛2:13)

지금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까? 고대한다는 말은 아직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매개하는 통로가 되기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성도는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영혼의 깊이와 넓이와 맑음에 있다는 사실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참 삶은 보이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먼 데를 보아야 사람 꼴이 됩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잗다랗게 변한 사람을 보는 것보다 슬픈 일이 없습니다. 저는 낯선 사람을 보기만 하면 앙앙거리는 조그만 강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느긋하게 바라보는 시골 개들을 보면 대인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건 순전히 기호의 문제이겠습니다만, 기독교인은 앙앙불락(怏怏不樂, 마음에 불만을 품고 기뻐할 줄 모름)하는 소인배가 되면 안 됩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정신이 클 수 있겠습니까? 예수의 길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久則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오래 하다보면 절로 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자리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 즉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 흔들리지 않는(主一無適) 근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를 길로 삼았으면 그 길로 줄기차게 가야 합니다. 날 좋다고 가고, 흐리다고 멈추면 안 됩니다. 이런저런 시련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 정신을 굳게 붙잡을 때 영혼의 뿌리는 깊어집니다. 영혼의 뿌리가 깊어진 사람이라야 아름다운 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디베랴 바닷가에 오셔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라”(요21:10)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식탁을 차리고 계신 주님은, 우리도 그 식탁에 기여할 기회를 주십니다.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골칫거리입니까?

•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
사도는 주님이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건져내시고, 깨끗하게 하신 까닭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리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불법에서 건져내심’은 의롭다 인정하심 곧 칭의(justification)에 해당하고, ‘깨끗하게 하심’은 성화(sanctification)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지향하는 바는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열심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분별력이 없는 열심은 참 곤란합니다. 무엇이 선합니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기준은 성서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저는 어느 일간 신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컬럼을 쓰고 있습니다. 어느 날 회의를 하고 있는 데 한 독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는 그 날 아침 신문에 나온 나의 컬럼 내용에 대해서 항의하기 위해 전화를 했던 것입니다. 장로 대통령이 하시는 일에는 그릇됨이 없다는 확신을 가진 분 같았습니다. 견해는 달랐지만 저는 그의 열심에 놀랐습니다. 자기가 확신하는 바를 지키기 위해서 컬럼니스트의 전화번호를 찾아내 항의하는 것은 보통 열심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분을 보면서 바른 분별력을 가진 분들이 이렇게 열심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열심을 다해야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다가 은퇴하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로서 국어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간직하신 분입니다. 선생님은 은퇴 이후에 더 분주한 나날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일은 대통령의 연두 교서를 비롯해서 정부가 내놓는 모든 문건,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나오는 중앙일간지 기사까지 꼼꼼하게 읽은 후에, 잘못 사용된 우리말을 빨간 펜으로 일일이 교열하여 청와대나 신문사에 보냈습니다. 마치 수도사가 정해진 일과를 따라 살듯 그분은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수도사의 엄정함으로 감당했습니다. 어느 신문사는 그 선생님을 강사로 모시고 국어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세상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워지는 것은 자기 분야에서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재성 목사는 환경 선교사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환경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무지한 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입니다. ‘환맹 環盲’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교회가 소극적으로나마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시대 상황의 변화도 한몫을 하고 있지만 양재성 목사의 헌신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말 열심 있는 선한 일꾼입니다. 그는 부름이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이든 달려갑니다. 너무 무리를 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지금은 그를 통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큰 메아리가 들려오리라고 확신합니다.

어느 날 꾀꼬리가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자기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데,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너무 커서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착한 꾀꼬리를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구나.” 주님의 부름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시절이 수상하다고 노래를 멈추면 안 됩니다. 사람들을 권해 아름다운 일에 동참시켜야 합니다. 직설법인 은혜는 동시에 명령법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 틈을 내라고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우리가 덜 갖고도 더 누릴 줄 아는 삶, 욕망을 절제하되 더 많이 감탄하며 사는 삶을 익히고, 그런 삶으로 사람들을 이끌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의 전령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4월 06일 12시 5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