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37. 부스러기의 풍성함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8:1-10
설교일시 2008/10/05
오디오파일 s20081005.mp3 [709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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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 다시 큰 무리가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무리에게 명하여 땅에 앉게 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들어서, 감사 기도를 드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그들에게는 작은 물고기가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것을 축복하신 뒤에, 그것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사람은 사천 명쯤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헤쳐 보내셨다. 그리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 가엾이 여기는 마음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교회의 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제정된 날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먹는 것과 같다지요(A man is what he ate)?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우리는 과연 예수적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요? 우리의 말과 태도, 행동이 예수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지요? 성만찬을 위해 포도주를 따를 때마다 저는 주님께 이런 기도를 바칩니다. “이 잔을 받는 이의 마음에 주님의 마음을 심어주십시오.” 제게는 포도주를 따르는 시간 그 자체가 거룩한 시간입니다. 그러면 대체 그리스도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도 간단히 말해보라고 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입니다. 주님은 오직 그 마음으로 인생을 사셨습니다. 간단하지만 그렇게 산다는 것은 결코 간단치 않은 일입니다.

세계성찬주일인 오늘 제가 잘 알려진 급식 이적 이야기를 본문으로 택한 것은 성찬의 정신이 그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두 번의 급식이적 이야기(6:30-44, 8:1-10)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우리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고, 남은 부스러기가 12광주리나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이적이 일어난 곳을 명시하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 사건이 가버나움의 남서쪽 마을인 마가단 혹은 답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 지역이 유대인들의 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남은 부스러기가 12 광주리라고 말하는 것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와 누가는 또 다른 급식 이적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 이적이 일어난 장소를 명기할 수는 없지만 데가볼리 지역에서 일어난 일임을 마가는 암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은 이방인들의 땅이었다는 말입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이방인을 갈라놓는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활동하신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오늘의 본문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꽃향기가 벌들을 불러들이듯이 주님이 계신 곳에는 수많은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마가는 그들의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먹을 것이 없었다.” 이 말은 육체적인 배고픔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고, 영적인 배고픔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허기졌습니다. 로마의 식민지 백성으로서 수탈과 억압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현실은 어디에서나 각박했던 것입니다. 먹을 것도 없고, 가슴을 뻥 뚫어줄만한 시원한 소식도 들려오지 않는 세상에서 지친 이들이 주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 바로 ‘가엾다’는 말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 예수의 행위의 밑바탕에 있는 마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대상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성례전적 식사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이 빈 들에서,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이 모든 사람이 먹을 빵을 장만할 수 있겠습니까?”(4)

절묘한 번역입니다. 이 구절은 제자들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리들이 겪는 배고픔의 문제는 자기들이 풀기에는 너무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지랖 넓은 예수님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라고 이렇게 스타카토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 제자들은 역시 난감해 했으면서도 “우리가 떡을 사다가 먹이라는 말입니까?”(6:37) 하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질문조차 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 대상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민족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의 그런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으시며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대답합니다. “일곱 개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의 의도를 보아야 합니다. 마가는 빵을 가진 제자들과, 그것을 갖지 못한 무리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할 마음만 있으면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문제의 크기에 압도되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조차 하려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테레사 수녀는 몇 날을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가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음식을 가지고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음식을 받아든 아이는 잠시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어디에 다녀오냐고 묻자 소년은 옆집의 친구도 며칠을 굶었기에 음식을 나눠주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적입니다. 없는 것은 빵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 본문의 갈피에 숨겨진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무리들을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십니다. 이때 땅은 그들의 식탁인 셈입니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들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뒤에,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찬식을 연상시키는 표현들을 보게 됩니다. 떡을 “들어-감사하고-떼고-나누어 주는” 일련의 과정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성찬, 즉 거룩한 식사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 굶주리고 허기진 이를 위해 우리가 가진 것을 내놓고 그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이 이방인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 말은 그 대상이 동족이든, 북한 주민이든, 아시아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그들이 기독교인이든, 이슬람교도든, 힌두교도든, 불교도든, 심지어 그들이 무신론자라 해도 주님의 거룩한 식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그저 돌려보내지 않는 것이 거룩함임을 주님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느닷없이 올지도 모를 나그네를 위해 밥 한 그릇을 늘 이불속에 묻어두곤 했던 조상들의 마음, 까치밥 하나를 남겨두는 마음, 그 마음이 곧 거룩함이란 말입니다. 우리는 대개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마음이 우리 속에 들어오면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됩니다. 받는 것을 좋아하던 삶에서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일러 ‘거듭남’이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 나누면 남는다
주님은 제자들이 ‘가-지-고-있-던’ 물고기 몇 마리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마가는 그 후에 일어난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배불리 먹었으며, 남은 부스러기를 주워 모으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8)

‘그리하여’라는 단어가 이렇게 푸지게 느껴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모든 긴장이 풀어지고, 느긋한 만족감이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여기서 남은 부스러기가 가득 찼다고 번역된 표현은 사실은 ‘부스러기의 풍성함’이라는 표현을 풀어 쓴 것입니다. ‘풍성한 부스러기’가 아니라 굳이 ‘부스러기의 풍성함’이라 한 까닭은 모르겠지만, 왠지 자꾸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듭니다. 빵이든 말씀이든 배불리 먹은 이들의 마음은 너그럽지 않을까요? 가엾게 여기는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을 사로잡은 것은 서로에 대한 호의적인 감정과 친밀함이었을 것입니다. 마틴 부버는 역사란 ‘친밀함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 사이에 번져가는 우정과 사랑, 성만찬은 그 사랑의 원뿌리입니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둔 것이 일곱 광주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주변 일곱 나라를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나누면 남는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말은 주님 안에서는 현실입니다.

마가는 주님께서 이 아름다운 이적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헤쳐 보내셨다고 전합니다.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들의 가슴에 지펴진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꿈은 그들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할 공적 자산입니다. 그들의 가슴에 심어진 기쁨과 소망은 들불처럼 번져가 냉랭한 현실에 지친 모든 이들의 가슴에 옮겨 붙어야 합니다.

지난 목요일 우리 교회 서예반이 글씨를 쓰는 것을 구경하다가 이봉옥 권사님께 글씨 하나를 부탁했습니다. ‘碩果不食’이란 단어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을 통해 배운 단어인데,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고 새길 수 있습니다. 일종의 까치밥과 같은 것일 겁니다. 과도하게 부푼 욕망의 지배를 받는 우리 시대이지만, ‘씨 과실’은 결코 먹어치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씨 과실의 이름은 ‘가엾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들은 이 시대에 주님께서 남겨두신 ‘씨 과실’입니다. 이사야는 이 씨 과실을 ‘남은 자’라 했고 ‘그루터기’라고도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모든 이들이 친밀함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해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어갈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부름에 응답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4월 06일 12시 5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