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성탄절. 생명의 표징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2:8-14
설교일시 2008/12/25
오디오파일 s20081225.mp3 [709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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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지역에서 목자들이 밤에 들에서 지내며 그들의 양 떼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한 천사가 그들에게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니,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갑자기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여 말하였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메시지1 - 뜻밖의 소식
같이 인사할까요? 예수 나심 좋을시고!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8킬로미터 쯤 떨어진 요단강 서안의 도시 베들레헴은 3만 2천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매우 작은 도시로, 감람나무가 많은 해발 700여 미터 높이의 산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이번 주만도 대략 25만 명 정도의 순례객들이 몰려들었고, 베들레헴에 있는 호텔 객석 3,000여개는 내년 1월까지 예약이 끝난 상태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베들레헴을 찾는 이유는 그곳이 예수님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2천 년 전 어느 날, 인류가 새롭게 태어나던 그날 밤을 회상할 겁니다.

목자들은 그날도 베들레헴 외곽의 어느 한적한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밤은 춥고 길었습니다. 그들은 몸을 옹송그린 채 달콤한 잠을 청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날로 각박해지는 살림살이 걱정에 먼 별빛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별빛은 영롱한데,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은 가물가물 스러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돌연 그들은 아주 낯선 기척에 놀라게 됩니다. 예기치 않은 시간, 예기치 않은 현실이 그들 앞에 펼쳐졌습니다. 한 천사가 나타나고, 주님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췄습니다. 그 초현실적인 광경 앞에서 놀라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목자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그들의 두려운 마음을 어루만지듯 나직하지만 명료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여 준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10-12)

그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던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은 헤롯의 압제 아래서 숨죽이고 살던 모든 백성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좀 이상합니다. 메시아는 불의의 역사를 바로잡을 권능자의 모습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오시는 주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합니다.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기’, 그것도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니요? 기독교의 놀라운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구주로 오신 분은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역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우리의 협력 없이 세상을 새롭게 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처럼, 모든 사람과 피조물이 저마다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새 세상의 꿈은 늘 연약해 보입니다. 누군가가 그 아기의 품이 되지 않는 한, 누군가가 그 아기를 돌보지 않는 한 새로운 세상은 열리지 않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삼고 산고를 겪어낼 사람들을 필요로 하십니다.

성탄절은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을 돌아보라고 명령합니다. 기독교의 상징이 무엇일까요? 웅장한 교회당, 파이프 올갠 연주, 밤마다 불 밝혀놓은 십자가 조형물? 아닙니다. ‘포대기와 구유’, ‘수건과 대야’, ‘십자가’. 이것을 빼놓고는 기독교를 말할 수 없습니다. 가장 연약한 이들을 감싸주는 포대기와 구유와 같은 마음의 사람들, 먼 길을 걸어 지치고 상한 사람들의 발/마음을 닦아주기 위해 몸을 낮추는 ‘수건과 대야’로서의 교회,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헌신의 삶이야말로 구원받은 자의 삶이라고 포대기에 싸인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들어야 할 기쁜 소식입니다.

메시지2 -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뜻밖의 시간, 뜻밖의 장소(예루살렘 성전이 아닌)에서, 뜻밖의 사람들에게 들려온 하늘의 전언에 놀라 목자들이 말을 잊고 있는 사이에 그 천사와 더불어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14)

사람들은 즐거울 때도 노래를 부르지만 슬플 때도 노래를 부릅니다. 좋은 노래를 부르는 순간 어지럽던 마음은 정돈되고, 슬픔은 정화됩니다. 찬양을 뺀 예배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찬양은 우리 마음을 고양시킵니다. 찬양은 우리에게 표면적 질서를 넘어서는 이면적 질서가 있음을 일깨웁니다. 천사들의 노래는 목자들에게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을 것입니다. 당장은 힘 있는 이들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거대한 빙하가 바람을 거슬러 흘러가는 까닭은 바다 밑바닥의 흐름 때문인 것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목자들이 살고 있던 세상의 현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폭력과 탐욕과 광기가 지배하는 세상이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이란 히브리말로는 카보드(chabod)라고 하고, 그리스말로는 독사(doxa)라고 하는 데, 모두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는 말입니다. 광야 생활을 하던 출애굽 공동체의 카보드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앞에서 사라지기도 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겔10:18).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 같아 모두가 희망의 노래를 부르지 못할 때 목자들은 하늘 군대가 부르는 영광송을 들었습니다. 그 노래는 희망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 땅에는 샬롬, 곧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의 사람, 또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됩니다. 목자들은 달려가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았고, 이 아기에 관하여 자기들이 들은 말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목자들은 누구입니까? 제3세계의 굶주린 어린이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선 사람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절망과 두려움을 이해하고 그들 곁에 서는 사람들, 장애인과 이주 노동자들 그리고 도시 빈민들의 삶에 한 줌 햇볕이 되기를 꿈꾸는 사람들, 학생들 모두를 성적에 따라 일렬로 세우려는 세상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세상에 희망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사람, 그 희망을 만들기 위해 산고를 겪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축하는 세계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생명과 평화의 세상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을 가슴에 품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땀 흘린다면, 제 아무리 힘겨운 삶이 우리를 기다린다 해도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혼잡을 뚫고 들려오는 하늘 군대의 노래를 듣고 계십니까? ‘하나님께는 영광’, ‘사람들에게는 평화’, 이것은 하늘의 엄중한 선포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꼭 붙든 사람은 이미 승리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삶이 힘겨울수록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4월 06일 12시 5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