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 더불어 걷는 길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4:9-12
설교일시 2009/01/04
오디오파일 s20090104.mp3 [709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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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 Que sera sera
새해를 맞은 지 벌써 나흘째입니다. 벌써 작심삼일이란 말이 빈 말이 아님을 실감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겨우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올해 우리의 길양식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전도서의 저자인 코헬렛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바람을 잡는 것처럼 덧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돈도 명예도 학식도 권력도 봄날의 긴 꿈처럼 속절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알 수 있는 일보다 알 수 없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사실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찬 것처럼 보입니다. 그럼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코헬렛은 허무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낙천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즐거움을 누리며 살라고 말합니다. 케 세라 세라(Que sera sera)의 인생관인 셈입니다. 이 말은 세간의 오해처럼 내 멋대로 살 테니 참견 말라는 말이 아니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말 테니, 미래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말고 지금을 한껏 살자는 권고입니다. 이것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의 세속적 번역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온전히 집중하여라. 내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로 동요하지 말아라.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막상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네게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마6:34)

• 외로움이라는 질병
한결 실감이 나지요?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한껏 살아내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다른 이들과 협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시종일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혼자보다는 함께 일하는 게 효율적이고, 혼자 걷는 것보다는 함께 걷는 게 좋고, 혼자 눕는 것보다는 함께 눕는 게 따뜻하고, 혼자 싸우기보다는 함께 싸우는 게 승산이 높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참 진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진부하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닙니다. 서양정신은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자유란 남들에게 아무 것도 강제당하지 않으면서 전적으로 자기의 자발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경우 ‘타인’은 늘 우리의 자유에 걸림돌로 작용하기 일쑤입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서 지옥”이라고 말했던 싸르트르의 말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홀로 자족적인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술과 마약, 그리고 쾌락으로 도피합니다. 때로는 배타적이 되고, 이웃에게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로움은 쉬 사라지지 않습니다. 소금물을 들이킨다고 갈증이 해소되지는 않는 법이지요. 요즘 우울증이 늘어나는 것은 타자들과의 소통이 줄어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묻는 율법교사에게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그를 피하여 지나갔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는 것이지요. 이 이야기 끝에 주님은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눅10:36) 주님은 ‘이웃’의 경계를 설정하거나 범주화 하시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의 방향을 ‘이웃 되어주기’로 바꾸어 주실 뿐입니다. 종교, 문화, 피부색, 나라도 이웃의 경계일 수 없습니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이 세계에 회복시키려는 마음입니다.

제랄드 메이가 <<사랑의 각성>>이라는 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옆집에 사는 할아버지는 아주 괴팍한 노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뒷마당에서 놀기 시작하자 노인은 철조망을 치고 자기 집 마당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루는 아들 폴의 고양이가 그 집 장미 덩굴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폴은 고양이가 그 집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습니다. 며칠 후 결국 고양이는 죽고야 말았습니다. 노인이 쥐약을 먹였던 겁니다. 가족들 모두가 분노해서 뭔가 복수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폴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가 입을 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우 외로운 분일 거예요. 우리가 그분에게 생일 파티 같은 것을 해드렸으면 좋겠어요." 이 어린 천사는 우리에게 이웃 되어주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토요일 교회에서 모이는 독서모임에서 이번 주에 읽은 책은 카렌 암스트롱의 <<마음의 진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현재 빼어난 종교학자이자 작가인 저자의 자서전입니다. 카렌은 17살에 부모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수녀원에 들어갔으나 7년 만에 환속한 전직 수녀입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 부과되는 수녀원에 머무는 동안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성경도 기도도 예전도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결국 수녀원을 떠난 카렌은 점차 신앙생활로부터 멀어졌고 급기야는 종교와 종교인들을 경멸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바울 사도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동참하면서, 어떤 묘한 여운을 느끼게 됩니다. 나중에 카렌은 12세기의 십자군 운동을 연구하던 중,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그는 십자군들에게서 허무주의를 봅니다.

“십자군은 자기네 땅에 살고 있던 유대인한테 손을 내밀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지고 있었던) 이슬람한테서 배우려는 생각도 못했고, 자기들의 공포와 원한을 다스릴 줄도 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죽이고 망가뜨리고 태우고 모독하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기들의 도덕성을 무너뜨렸다.”(카렌 암스트롱, <<마음의 진보>>, 2007, 교양인, 435-6쪽)

‘십자군’이라는 단어 대신 우리 이름을 넣어도 될 겁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도외시하고, 멸시하면서 사실은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허무주의입니다. 인간은 같은 사람을 미워하면서 희열을 맛보는 존재라는 생각에 아연하던 카렌은 어느 순간 세상의 슬픔과 다른 이들의 고통을 절절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 고통을 향해 마음을 여는 순간, 그의 마음에 그렇게도 막연했던, 그렇게도 멀리 계셨던 하나님도 되돌아오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길은 어쩌면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통하지 않고는 찾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서로-지체’ 공동체
사람들은 대개 이중적인 마음에 끄달립니다. 한편으로는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합니다. 소속감은 삶에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다른 이들과 연루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다른 이들이 자기 삶에 개입해 오는 것 같아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서로에 대한 불신과 낯섦을 극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처럼 다양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나이, 성별, 경제력, 학력, 고향을 불문하고 우리를 한 가족으로 묶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신앙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2:20-21)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합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12:26)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바퀴살 서른 개가 바퀴통 하나에 모일 때(三十輻共一轂 -老子, 11章) 잘 굴러갈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예배, 가르침, 사귐, 봉사가 그리스도라는 중심과 연결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이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이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사람됨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작용하는 원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입니다. 혼자서 열 걸음을 걷는 것보다는 열 명이 함께 한 걸음을 걷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걸음이 빠른 토끼는 잘 달리다가 상대를 얕보고 중간에 잠이 들어서 느림보 거북이에게 경주에서 패했다는 것이지요. 재주가 부족해도 꾸준히 노력하면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인가요?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불쾌한 내색을 합니다. 거북이가 토끼를 깨워서 함께 걸어갔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근본적인 지적은 아닙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애초부터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토끼는 우수하고 거북이는 열등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 잘하는 것이 다른 데, 왜 하필이면 토끼가 잘하는 것을 가지고 경주를 하느냐는 말입니다. 경기 종목을 수영으로 했더라면 분명 이야기는 달라졌을 겁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다른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릅니다.

거창 학원에 속한 샛별 초등학교는 좀 남다른 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그려도 잘 그린 그림 못 그린 그림을 가려서 전시하지 않습니다. 모든 학생들의 그림을 다 전시합니다. 문집을 만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학생들의 글을 다 문집에 싣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그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학교는 그 방침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두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참 교육이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우열로 갈라 아이들의 가슴에 그늘을 만들고, 열등감을 내면화시키는 것처럼 나쁜 교육은 없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몸을 골고루 짜 맞추셔서 모자라는 지체에게 더 풍성한 명예를 주셨습니다”(고전12:24).

•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
우리 교회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많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그 길을 힘써 택할 겁니다. 길을 가다 넘어져도 일으켜 줄 사람이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은 수십 번 넘어지면서도 걷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곳에서 기다려주는 엄마 아빠의 품이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누우면 냉기를 이기기 어렵지만 함께 누우면 따뜻해지듯이 언제라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 인생의 겨울이 와도 두려울 것 없습니다. 진리의 선한 싸움을 홀로 감당하려면 쉽게 낙심하게 되지만, 누군가가 내 곁에서 함께 싸우고 있음을 알면 새로운 용기가 솟아납니다.

바알 선지자들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인 엘리야는 승리했으면서도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왕후인 이세벨의 보복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먼 행로에 지친 그가 마침내 시내 산에 있는 동굴에서 밤을 지낼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소명을 주시면서 “나는 이스라엘에 칠천 명을 남겨 놓을 터인데, 그들은 모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왕상19:18)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힘이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민주화의 열망으로 뜨거웠던 대학 시절 우리는 이런 노래를 부르며 동료들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혼자 소리로는 할 수 없겠네/둘의 소리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커단 함성될 때/저 어리석은 자 깨우칠 수 있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
둘과 둘이 모여 커단 힘이 될 때/저 굳센 장벽을 깨뜨릴 수 있네

<교수신문>이 지난 달 교수 등 180명을 대상으로 2009년 희망의 사자성어를 묻는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39%의 사람들이 ‘和而不同’을 택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조화를 이루되, 의리를 굽혀서까지 같게 되기를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길도 그러해야 합니다. 물론 그 조화의 바탕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관계 속에 그리스도를 모실 때 우리는 서로 용납할 수 있습니다. 서로 무거운 짐을 져줄 수 있습니다. 서로 존경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서로 참아줄 수 있습니다. 서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서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서로 대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가슴 벅찬 희망마저 없다면 인생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을 겁니다.

세 겹 줄은 끊어지지 않는다지요? 새해에는 교회와 가정과 개인이, 시민사회와 기업과 정부가 세 겹 줄로 어우러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우리가 이런 아름다운 어울림의 촉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8년 04월 06일 12시 5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