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9:19-29
설교일시 2009/03/22
오디오파일 s20090322.mp3 [709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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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그래서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왔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아이에게 즉시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다.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셨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그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쳐 말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 예수께서 무리가 어울려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셨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서,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 아이는 죽은 것과 같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섰다. 예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 귀신 들린 현실
한 달에 한 번씩 교우들과 산에 오르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걸음이 느린 이를 기다려주고, 격려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까지 나눠 먹으니 그만입니다.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숨이 가빠오면 동행들은 말을 잊습니다. 그럴 때면 들숨과 날숨을 의식하려고 애씁니다. 무겁고 복잡한 마음은 내뱉고, 소박하고 가벼운 마음을 맞아들입니다. 산길을 걷는 시간은 그래서 기도의 시간입니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걸으며 우리는 산행이 인생살이를 닮았다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은 준비해주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만났고, 호렙산에서 모세는 가시떨기나무 같이 하찮은 이들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는 여호와닛시의 하나님을 만났고, 출애굽 공동체는 그리심산에서 선포되는 축복의 메시지와 에발산에서 선포되는 저주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에 지쳤던 이들은 나지막한 동산에서 주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들었고,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거룩한 주님의 모습과 만났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주님의 애절한 기도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 삶은 산 아래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세 제자가 산에서 내려온 후에 벌어진 한 사건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산 위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았던 제자들은 뭔지 모를 고양감에 들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산 아래 현실은 그들을 달콤한 기쁨 속에 머물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제자들이 큰 무리에게 둘러싸인 채 율법학자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때 산을 내려오시는 예수님 일행을 본 무리들은 몹시 놀라 달려와서 인사를 건넵니다. 여기서 말하는 ‘놀랐다’는 단어는 거룩한 것 앞에서 느끼는 경외심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마가는 이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주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소란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너희는 그들과 무슨 논쟁을 하고 있느냐?” 물으시지만 제자들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러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서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에 들린 자기 아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디서나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를 거꾸러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고, 몸이 뻣뻣해진다는 것입니다. 전형적인 간질병 증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쉽게 귀신들림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 본문에 대한 게으른 접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상황을 바꾸어보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그는 멋진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가혹한 식민지 정책 때문에 그의 미래는 불투명합니다. 죽도록 농사지어 봐야 이런저런 명목의 세금으로 다 빼앗기고, 때로는 강제 노역에 끌려갈 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분노감이 쌓여갑니다. 어떤 때는 미칠 것만 같습니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습니다. 어떤 때는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을 터뜨릴 때도 있고, 자해를 하기도 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마음을 알면서도 도울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더욱 딱한 것은 이 젊은이가 이를 갈고, 거품을 물고 화를 내다가도, 결국에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에 그만 제풀에 지쳐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사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보아야 제대로 보입니다.

• 무력한 신앙
아버지는 아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그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으나, 그들은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삶의 자리는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신 이후의 초대교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예수님의 이름을 전했고, 꽤 많은 이들이 그 소식을 듣고 새로운 삶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마가는 사도들이 유대 민중들이 처한 현실에 아무런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은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옴짝달싹못하게 하는 것들의 정체를 폭로하고, 거기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정신적 노예살이를 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때로는 증오심으로, 때로는 무기력증으로, 때로는 헛된 욕망으로. 교회는 바로 이런 영적 구속으로부터 사람들을 풀어내어, 해방의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을 경축하며 살지 못하도록 하는 영을 가리켜 ‘더러운 영’이라 하는데,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는 것은 ‘맑고 깨끗한 영’ 뿐입니다. 자기로부터 해방된 사람, 자기 삶의 뿌리를 하늘에 내리고 사는 사람, 자기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고는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마가가 보기에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무능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현실에 대해 탄식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제자들의 ‘무능’이 예수님에게는 ‘믿음 없음’으로 보였습니다. 요한복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요14:12b)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것은 책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 시대 전체라는 사실입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저는 이 탄식을 현재진행형으로 듣습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의 실체가 빤히 보이는 데도 우리는 그것을 쫓아내지 못해 전전긍긍입니다. ‘풍요’의 나팔소리를 불어대며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는 저 더러운 영들이 보이지 않으십니까? 교회조차 그 나팔소리에 발을 맞추어 걷고 있으니 딱한 노릇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를 탄식하던 주님은 아이를 당신 앞에 데려오라 말씀하십니다. 아이가 주님 앞에 서는 순간, 아이 속에 있던 귀신이 반응을 보입니다. 아이로 하여금 심한 경련을 하다가,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에게 물으십니다.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입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여기서 귀신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그 귀신은 ‘죽이는 영’입니다. 그 영에 사로잡히는 순간 아이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어떤 열정에 사로잡혔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로마 제국에 대한 미움인지,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인지, 자기 파괴의 열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뒤에는 음험한 영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 다시 예수의 마음으로
그 가련한 아버지가 주님께 간청합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이 말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이 가슴 벅찬 선언을 듣는 순간 감격합니다. 현실의 어려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이 문답에서 일어난 미묘한 변화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요청에서 ‘하실 수 있는 주체’는 주님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할 수 있는 주체’를 모든 믿는 이들에게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믿는 이에게는 귀신을 내쫓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생의 문제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이 말을 이해한 것일까요? 그는 주님께 말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24b)

이 말을 풀어보면 이런 뜻이 될 겁니다. ‘나도 모든 것이 가능한 믿는 자이고 싶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가련한 아들 하나조차 도울 수 없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말은 믿음의 만능을 말하는 것인가? 믿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란 말인가? 우리의 현실 경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믿음을 지키려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얼마이며, 악한 자들이 잘 사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수없이 많은 질문들이 떠오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믿는 자의 권능은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믿는 자의 권능은 성령을 통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성령 충만함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행적을 전하는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가장 자주 발견하는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 ‘애긍심哀矜心’으로 하면 된다고 말했던 무위당 선생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아파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기적을 낳습니다. 예수가 그러했고, 성 프란체스코가 그랬고, 마더 테레사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 하나로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25b)

귀신은 마침내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서 나갔습니다. 그냥 나가지 않고 심한 경련을 일으켜놓고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는 죽은 사람처럼 됐습니다. 극심한 내적 고통을 겪은 후 자기를 놓아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과의 만남이, 예수의 존재와의 만남이 그를 새롭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이제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탄식하고 파괴적인 태도로 생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생의 조건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을 일구는 이로 거듭났습니다.

• 소명 받들기
이야기는 마침내 결말에 도달했습니다. 사태의 전개과정 속에서 잊혀지고 있던 제자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따로 주님께 여쭙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28b)

이 질문은 초대교회가 풀어야 했던 신앙적 숙제였습니다. 누군들 맥없이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악한 영들이 준동하는 세상에서 상처입은 사람들을 치유하지도 못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이란 얼마나 참담한 일입니까? 더러운 영을 쫓아낼 권능을 잃은 교회, 혹은 성도들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절박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진부해 보입니다.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

하지만 이 말 이외에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세상일을 풀어내는 데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인생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꾸준히 성실과 인내로 가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문제는 길을 잃지 않는 것이고,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가 중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기도란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 속에 모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기도해야 악한 영들의 실체가 보입니다. 젊은이들을 마치 죽은 자처럼 무력하게 만들고, 때로는 광포하게 만드는 악한 영들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아니고는 그들의 처지에 공감할 수 없고, 주님의 마음이 아니고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는 어찌 보면 더딘 해결책처럼 보이지만, 이 길밖에는 없습니다.

신앙의 일은 더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주님의 마음과 하나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대를 지배하는 증오심, 무력감, 과도한 욕망, 무관심, 무정한 마음, 사나움 등의 악한 영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주님의 놀라운 이적을 전하는 이야기로 듣는 한 우리가 할 일은 감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를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는 이야기로 듣는다면 우리는 할 일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이 우리에게 천둥처럼 들려오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나른한 손과 힘 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12:12-13)

등 록 날 짜 2008년 04월 06일 12시 50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