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39. 땅은 하나님의 것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레 25:23-28
설교일시 200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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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하나님의 것
레25:23-28
(2009/9/27, 희년실천주일)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와서 사는 임시 거주자일 뿐이다. 너희는 유산으로 받은 땅 어디에서나, 땅 무르는 것을 허락하여야 한다. 네 친척 가운데 누가 가난하여, 그가 가진 유산으로 받은 땅의 얼마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 판 것을 무를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으면, 형편이 좋아져서 판 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판 땅을 되돌려 살 때에는, 그 땅을 산 사람이 그 땅을 이용한 햇수를 계산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그 나머지를 산 사람에게 치르면 된다. 그렇게 하고 나면, 땅을 판 그 사람이 자기가 유산으로 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한다. 그러나 그가 그 땅을 되돌려 살 힘이 없을 때에는, 그 땅은 산 사람이 희년이 될 때까지 소유한다. 희년이 되면, 땅은 본래의 임자에게 되돌아간다. 땅을 판 사람은, 그 때에 가서야 유산 곧 분배받은 그 땅을 다시 차지할 수 있다.]

• 안식일, 안식년, 희년
오늘은 추석을 앞둔 주일로 뜻을 함께 하는 교회들이 희년실천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희년(禧年, year of jubilee)이란 ‘은혜의 해’, ‘거룩한 해’를 뜻하는 말입니다. 희년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바로 다음 해, 곧 50년 째 되는 해입니다. 희년의 나팔소리는 빚에 몰려 종으로 전락했던 사람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을 남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해방의 순간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희년의 나팔소리는 인간의 모듬살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격차와 차별을 지우라는 하늘의 명령입니다. 빚은 탕감되고, 종들은 자유인이 되고, 땅은 원주인에게로 돌아갑니다. 절망의 나락에 빠졌던 이들이 다시 한번 일어나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것입니다. 희년은 이스라엘이 꿈꾸었던 평등 공동체의 꿈을 역사 속에서 실현해 갈 수 있는 사회적 장치였던 셈입니다.

사실 희년법은 안식일법과 안식년법에서 발전된 것입니다. 안식일법은 애초에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노동력 착취를 금지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6년 동안 땅을 경작한 후에는 1년 동안 땅을 쉬게 하라는 안식년 규정도 땅의 휴식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안식년이 되면 농토와 올리브밭과 포도밭의 경작을 중지하고 거기서 저절로 난 것도 수확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것은 고아, 과부, 나그네로 표상되는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희년법은 이런 안식년법을 확장한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이런 꿈은 낭만적 유토피아주의처럼 들립니다. 능력껏 많이 벌어서 자식들에게 많이 물려주는 것을 소망으로 삼는 이들에게 희년법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들릴 겁니다. 희년법은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인 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우정에 기초한 나라의 꿈
사실 희년법은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근본적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 고백 속에는 땅은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땅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 위에서 잠시 동안 살다가 떠나는 거류민일 뿐입니다. 이런 생각은 이곳저곳 떠돌며 살던 히브리들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착할 땅과 경작할 땅을 얻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땅은 하나님의 은총의 매개였습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창1:11) 그러니 땅을 사고판다는 것은 불경한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땅을 하나님이 주신 ‘유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주님이야말로 내가 받을 유산의 몫’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님께서 “줄로 재어서 나에게 주신 그 땅은 기름진 곳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시16:6)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기름진 땅이든, 척박한 땅이든, 비탈진 밭이든, 돌짝밭이든 주님께서 주신 곳이기에 ‘빛나는 유산’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꿈꾸었던 샬롬의 세상은 소박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살 것이다.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을 받지 않으면서 살 것이다.”(미4:4) 누구나 다 자기 땅에서 땀 흘려 노동하고, 가족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 앉아 담소하고, 이웃들을 청하여 함께 즐기는 것,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는 세상, 바로 그것이 사람들이 꿈꾼 평화의 세상이었습니다. 땅은 평화 세상의 근간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땅을 무르는 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친척 가운데 누가 천재지변이나 병 등으로 몰락하여 당장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유산으로 받은 땅의 일부를 팔면, 가까운 친척이 그것을 되사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무를 친척이 없다면 그가 판 것을 되돌려 살 힘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땅을 되돌려 살 때는 그 땅을 산 사람이 그 땅을 이용한 햇수를 계산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빼고, 나머지를 치르면 되었습니다. 친척은 몰락한 가족을 일으켜 세워줄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우정과 우애에 기초한 나라를 세워나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 아, 불의한 세상
하지만 에덴 이후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들은 마음의 헛헛함을 이기기 위해 수많은 불안의 대용물들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시내산에 올라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며 아론을 압박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뭔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 합니다. 집을 사고, 땅을 사고, 돈을 모으는 것도 어찌 보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욕망과 불안은 그런 것으로 해소되지 않습니다. 탐욕은 만족을 모릅니다. 물신숭배에 빠진 이들은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데도,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우정이나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 인간관계를 규정할 때 관계는 파탄나게 마련입니다. 우정이 사라진 세상은 삭막한 전쟁터가 됩니다.

평등공동체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역사 실험에 나섰던 이스라엘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50년마다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희년법도 권력자들의 탐욕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주전 8세기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5:8)

그저 땅을 사고파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특권적인 지위를 이용해 불의한 법을 만들어 가난한 자들의 가산을 삼킵니다.

“불의한 법을 공포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법령을 제정하는 자들아,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 가난한 자들의 소송을 외면하고, 불쌍한 나의 백성에게서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들을 노략하고, 고아들을 약탈하였다.”(사10:1-2)

그런데 성경의 이런 대목을 읽을 때면 왠지 오늘 우리의 현실을 고발하는 것처럼 들리는 것은 왜일까요? 지금 서울은 공사장입니다. 재개발이니 뉴타운이니 이곳저곳에서 토목 공사가 벌어집니다. 많은 땅을 소유한 이들과 건축업자들이 신이 났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들이 오랫동안 살던 삶의 터전을 잃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살던 이웃들과도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자기의 땅에서 유배당한 이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하는 숫자가 무슨 뜻인지 한번 짐작해 보십시오. 1083, 819, 577, 476, 412, 405, 403, 341…이 숫자들은 로또복권 당첨번호도 아니고 은행계좌 번호도 아닙니다. 2005년 8월 12일 기준으로 행자부가 개인명의로 집을 가장 많이 소유한 최고 집부자 10명이 각각 보유하고 있는 주택 수입니다. (손낙구, <<부동산 계급사회>>, 후마니타스).

이런 세상은 우리가 보기에도 불의한 세상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불의한 세상입니다. 이렇게 많은 집을 가지고 있는 이들, 그렇게도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과연 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성서의 어법대로 말하자면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입니다. 공의의 예언자 아모스의 일갈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암2:6-7a)

• 우리 시대의 희년 실천
이것은 인류가 아직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던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 우리의 현실 속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곳곳에서 가난하고 무시당하는 이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살벌한 경쟁의 벌판에 내동댕이쳐져 있습니다. 1990년대에 대중문화와 인터넷의 주역으로 떠오르던 젊은이들은 이후에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구조 조정 과정에서 가장 배려를 받지 못한 계층들입니다. 무한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청년들에게 미래라는 단어는 매우 부담스러운 단어가 되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언제 일터에서 쫓겨날지 몰라 전전긍긍입니다. 다소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주 노동자들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65세 이상의 노인들 가운데서 노후 자금을 마련한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인들의 자살이 급증하는 것도 이런 연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책을 입안하는 이들은 경제 규모만 커지면 이런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거짓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세상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돌봄'의 사회로 전환해야 할 때입니다. 계획하고,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통로를 열고, 더불어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이들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실 세상이 무엇인지를 늘 물어야 합니다.

땅을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땅과 거기서 얻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배부름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님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땅에서 나오는 소산의 일부는 가난한 이들의 몫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들을 돕고, NGO 단체에 후원도 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마이크로 크레딧(소액대출운동) 운동에 동참하는 까닭은 형편이 어려워진 교우들이나 이웃들에게 재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본금이 조금만 있으면 일어설 수 있는 데 돈을 얻을 데가 없어 낙심하는 이들은 소액대출은행에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분들이 추진하려는 사업이 타당성이 있는지 먼저 심사를 받아야 합니다만 기회는 열려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실천할 때, 또 그런 마음으로 살 때 세상은 올바른 자리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희년실천운동에 동참하는 교회들은 다음과 같은 다짐을 선포했습니다.

첫째, 부동산 과다 소유, 집값 짬짜미, 각종 탈법 및 편법 행위를 통해 투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세상의 풍조를 따르지 않으며, 투기 목적 혹은 과시 목적으로 고가주택을 보유하는 주택 과소비를 하지 않는다.
둘째, 토지 임대료 수입은 노력소득보다 우선하여 교회(혹은 공동체)와 지역사회에 있는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해 노력한다.
셋째, 희년정신을 구현하는 토지 보유세 강화정책을 지지하고, 토지보유세(종합부동산세 및 재산세)를 즐거운 마음으로 납부한다.

교회가 지나치게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는 문제에 대한 지적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한국 교회와 교인들이 이런 일들을 실천하기 시작한다면 기독교는 새로워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복을 사모합니까? 아니면 자본주의 세상이 우리에게 약속하는 복을 사모합니까? 주님이 복이 있다 하신 이는 누구입니까?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입니다. 행복은 소유의 많음에 있지 않습니다. 어제 신문에 난 박기호 신부님의 컬럼을 읽다가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공동체 마을을 일구고 있는 그는 얼마 전 돌을 맞은 소화라는 아기를 품에 안고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네 모든 생각과 몸가짐을 신중하게 하여라.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며, 배고픈 이에게 밥그릇을 밀어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벗어주어라. 네가 사는 데 꼭 필요한 것 이상의 물건이 있거든 그것으로 남을 구제하는 데 나누어라.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고 네가 가는 길을 평탄케 해주시기를 늘 간구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에 살든지 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것이다."(한겨레신문, 2009년 9월 26일자, <소화가 살아갈 세상을 걱정한다>)

기원은 더 이어집니다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일상 속에서 희년을 연습하는 길일 겁니다. 추석이 다가옵니다.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더불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을 둔 샬롬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평화의 새 세상을 꿈꾸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09년 09월 27일 11시 58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