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53. 갈 길 멀고, 밤 깊어도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37:1-9
설교일시 2009/12/31
오디오파일 s20091231.mp3 [10370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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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길 멀고, 밤 깊어도
시37:1-9
(2009/12/31, 송구영신예배)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너의 의를 빛과 같이, 너의 공의를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하실 것이다.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아라.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는 자들과,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는 자들 때문에 마음 상해 하지 말아라.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 에벤에셀
우리의 한 해를 이 자리까지 인도해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기쁨의 시간도, 슬픔의 시간도 함께 겪어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흐뭇한 기억도 있고, 후회스러운 기억도 있습니다.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것을 받아 누린 한 해였습니다. 교우들이 내게 준 사랑과 존경은 과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길에서 만나 오랫동안 함께 걸었던 이들도 고맙고, 새로운 동행이 된 이들도 고맙습니다. 지구별 여행자인 우리가 이렇게 만나 생을 나누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신비한지 모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하고 권고합니다.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다는 것, 함께 울 사람이 있다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제가 특별히 감사드리는 것은 우리가 생명과 평화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억압과 착취의 땅인 애굽을 떠나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살아가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출애굽 공동체처럼, 우리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길이 늘 따뜻하고 평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가파른 길을 오르며 지친 형제자매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고, 서로의 아픔에 대해 모른 척하기도 했고, 오히려 상처를 덧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히고 또 상처를 입으며 살아갑니다. 사소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일들로 인해 우리 관계에는 금이 갑니다. 마음의 앙금을 해소하고, 형제자매의 사랑으로 서로를 얼싸안지 못할 때 우리의 시간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시인 도종환은 “열정이 식은 뒤에도/사랑해야 하는 날들은 있다/벅찬 감동 사라진 뒤에도/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고 노래했습니다. 아무리 힘겨워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고, 지금 옆에 있는 이들이 우리가 부둥켜안고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계속해서 “그러나 풀이란 풀 다 시들고/잎이란 잎 다 진 뒤에도/떠나야 할 길이 있고//이정표 잃은 뒤에도/찾아가야 할 땅이 있다”(<저녁 무렵> 중에서)고 노래합니다. 우리가 기어이 찾아야 할 땅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 평화가 들풀처럼 번져가는 곳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는 많은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용산 참사,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 북한의 제2차 핵실험을 둘러싼 긴장, 쌍용차 사태, 유명인들의 자살, 세종시와 4대강을 둘러싼 논란…. 돌아보면 가슴 시린 일들이 많습니다. ‘풍요로움에 대한 욕망’이 ‘함께 사는 세상’의 꿈을 유린하는 현실을 보며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 맑은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1-2)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불평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오히려 악으로 기울어질 뿐이다. 진실로 악한 자들은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8-9)

세상 현실만 바라보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질서에 눈을 뜨면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는 필요하지만 노여움과 격분과 불평만으로는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없습니다. 평화와 생명의 나무는 굳은 살과 같은 마음에서는 자랄 수 없습니다. 오직 새 살과 같은 마음이라야 자랄 수 있습니다. 옛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이를 일컬어 깨달음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면 이를 일컬어 강하다(見小曰明, 守柔曰强 - 老子, 52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 믿음이고, 격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생명을 지향하는 것이 소망이고 사랑입니다.

• 기쁨의 뿌리
하지만 역시 삶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자’, ‘사람들의 좋은 면을 보자’, ‘화내지 말자’, ‘부드럽지만 유약해지지 말자’. 홀로 있을 때의 장한 다짐은 가치관이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어려운 상황을 만나는 순간 흩어지고 맙니다. 팔뚝에 ‘차카게 살자’고 문신을 한다 하여 착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많은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아기를 어를 때 사용하는 언어와 강의나 인터뷰를 할 때 사용하는 언어는 달라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언어와 직장에서의 언어가 다릅니다.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알맞은 말은, 은쟁반에 담긴 금사과”(잠25:11)라 했습니다. 관계의 다른 이름은 ‘사이’입니다. ‘사이좋다’는 말은 좋은 관계를 이르는 말입니다. 관계는 또 ‘調和’이기도 합니다. 나의 나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남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흔히 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나 힘을 이용해서 다른 이들을 자기의 뜻에 동화시키려고 합니다. 그것은 폭력입니다. 윗사람이라 하여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으로 통일’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차이를 인정할 뿐 아니라 존중할 때 평화는 시작됩니다.

그런데 현대 세계에서 남과 조화를 이루는 일도 쉽지 않지만, 더 어려운 것은 나의 나됨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인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신앙적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에게 불화의 근원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의 시인이 그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만 의지하고, 선을 행하여라.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성실히 살아라. 기쁨은 오직 주님에게서 찾아라. 주님께서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신다.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3-5)

시인은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실한 삶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가치에 매달릴 때 우리 삶은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국가, 풍요, 성공, 쾌락, 명예 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려 할 때 우리 속에는 광대한 지평이 열리게 됩니다. 우리 시대의 가객인 홍순관은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보니 그렇게 넓을 수가 없더라도 말합니다. “낙타를 따라 바늘구멍으로 들어가 봅니다./좁을 줄 알았던 바늘구멍은 좁은 곳이 아니라/보지 못하였던 신비였습니다./너무 넓어, 보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바늘구멍은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닫힌 문이지만, 들어가려는 사람에겐 낙타 수천 마리가 쉽게 드나드는 자유의 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 자기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내맡기고 사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 몸과 마음이 물결 위에 두둥실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부력(浮力)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부력을 체험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삶을 조율하면 하나님은 우리 의를 빛과 같이, 한낮의 햇살처럼 빛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 어쩌다 비틀거려도
하지만 어렵고 난감한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길을 걷는다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과 불편해질 때도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안일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꾸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은 불편함을 야기하는 사람처럼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은 기득권자들에게 늘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고,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그들의 눈은 한 사회의 그늘진 곳에 거하는 사람들을 향했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히브리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고, 억울한 자의 고통을 하감하시는 분이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인권을 보장해주시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걷고, 우리에게 따라 오라 하신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기꺼이 걷지만 어느 순간에는 회피하기도 합니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센 풍랑을 뚫고 물 위를 걷던 베드로도 어느 순간 물속에 빠져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 그의 마음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물 위를 걷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순간 그는 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맡길 때 그는 가벼웠지만, 자기를 의식할 때 무거워졌습니다. 차이는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참 신비합니다. 마음으로 천국을 빚기도 하지만 지옥을 빚기도 합니다. 삶의 실상을 꿰뚫어 본 원효대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빚어지는 것(一切唯心造)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우리들입니다. 요즘 마음공부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인은 우리에게 격려가 되는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23-24)

우리가 늘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혹은 하려는 일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답이 ‘예’라면 그대로 살고 결과에 상관없이 기뻐하십시오. 답이 ‘아니오’라면 그것이 제 아무리 근사한 계획이라 해도 포기하십시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물론 비틀거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기에 우리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뚝이를 가리켜 ‘不倒翁’이라 합니다. 오뚝이가 타력에 의해 넘어져도 엎드려 있지 않고 벌떡 일어설 수 것은 무게중심이 아래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무게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 터전이신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시인은 의인의 발걸음이 흔들리지 않는 까닭은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31)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뿌리 깊으면야
우리 앞에 열리는 2010년이 어떤 선물을 가져다줄 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성공과 실패가 나란히 공존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친절하게 맞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의 계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가끔은 우리가 싫어하고 회피하고 싶은 일들이 복의 계기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가족들이 겪는 고통 때문에 가족 간의 사랑이 깊어지고, 교인들이 겪는 어려움이 교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줍니다. 거꾸로 즐겁고 신나는 일이 오히려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일도 많습니다. 예기치 않게 생긴 많은 돈이 가족 관계를 파탄나게 하고, 노력 끝에 거둔 어떤 성취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어김이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37)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영에 속한 생각과 육신에 속한 생각을 대조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신에 속한 생각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속한 생각은 생명과 평화입니다.”(롬8:6) 육신에 매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멀고, 밤이 깊었을지라도 빛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고정희 시인은 <상한 영혼을 위하여>라는 시에서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뿌리 깊으면야/밑둥 잘리어도 새 순은 돋거니”라고 노래합니다. 상한 갈대 같은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뿌리가 든든하다면 언제든 새 순은 돋게 마련입니다.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 해도 물이 고이면 꽃을 피워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시인은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하고 노래합니다. 이제 불평과 탄식으로 멍든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냉소와 체념으로 병든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이 고쳐주실 것입니다. 새해에는 다부진 결의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새해를 선물로 주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 멋진 일들을 계획해 놓고 계십니다.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몸과 마음과 물질을 내놓을 때, 하나님은 우리 속에 평화와 감사와 기쁨을 창조해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교우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1월 01일 00시 15분 2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