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4.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
설교자 양재성
본문 창 1:12, 31 마 16:13-20 롬 12:2
설교일시 2010/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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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

“이 반석위에다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문들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16/13-20)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12/2)

환경주일과 청파교회
지난 6월 5일은 유엔이 정한 <환경의 날>이고, 지난 주일과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정한 <환경주일>입니다. 오늘만이라도 한국교회가 환경에 대한 설교를 하고, 신음하는 피조세계를 위해 기도하고, 자연생태계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특히 청파교회는 그 꿈을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로 정하고, 창조세계의 청지기가 되려고 기도하는 교회이기에, 그 의미가 더 크다고 봅니다. 실제 우리교회 환경부는 몇 주 전부터 환경주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였습니다. 지금 청파교회는 단순히 한 교회가 아닙니다. 청파에 속한 공동체만 행복하고 좋은 교회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로, 환경선교의 모델교회로 세워져야할 요구를 하나님과 한국사회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교회안과 밖이 통해야 합니다. 교회는 지역, 사회, 나라, 세계, 우주에 열려 있었습니다.

청파교회의 꿈
청파교회의 처음 꿈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여는 녹색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둘은 대단히 놀라운 꿈입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면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아울러 자신을 온전히 비워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하고, 나는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야 합니다. 내 재능을 가지고 그분이 사용하게 하고, 내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쓰게 하며, 내 재산을 가지고 그분이 사용하게 해야 합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불가능한 삶을 살자고 다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정말 여러분은 그런 꿈을 꾸고 있습니까? 예수께서 여러분의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꿈 말입니다.
실제 바울은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분의 몸이며, 우리는 몸의 지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몸으로 온전히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꿈입니다. 오늘 환경주일을 지키며 창조세계의 청지기로 거듭나기를 원하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녹색은총이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가장 큰 범죄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는 지난 100년 동안 인류가 저지른 가장 큰 범죄행위는 환경파괴라고 지적했습니다. 환경파괴는 하나님이 지구를 통해 인류에게 준 가장 값진 선물을 파괴한 것이며, 자연 속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린 불신앙의 극치입니다. 아울러 자연을 황폐화시킴으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살생행위이며 자연의 신비를 벗겨냄으로 영성과 감성을 무력화시키는 반생명적 반영성적 행위입니다. 이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생태계의 소중함을 망각하게 하는 인류사에 가장 큰 상실의 경험입니다. 인류에게도 가장 큰 불행입니다.

하나님이 경탄하신 자연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로 자연 안에서 살다가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서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자연의 한 지체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한 몸인 셈입니다. 자연을 사랑하고 잘 돌보는 일은 인간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자연을 함부로 대하거나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임과 동시에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반인륜적인 행위입니다. 즉 그 사람이 자연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의 인격과 시대의식, 신앙정도를 가늠하게 합니다. 벌레 한 마리, 들꽃 한 송이를 어떻게 보느냐가 하나님에 대한 시각교정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자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은 저 스스로 하나님을 추구합니다. 하늘이 운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구하거나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이 창조질서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만물을 가르치시고 명령하시고 충고하십니다. 하나님은 만물에게 자신을 따르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만물의 근원인 하나님, 당신에게 서둘러 오라고 명령하십니다.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돌멩이도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들꽃 한 송이도,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그러기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메아리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창조의 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한 농부의 생명사랑
얼마 전, 신문에 한 농부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그 농부는 트랙터로 논을 갈다가 삽날에 개구리, 미꾸라지, 물고기 등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옛날 소로 논을 갈 때는 그렇지 않았지요. 논에 그렇게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는 줄을 몰랐었다고 합니다. 논엔 벼만 자라는 것이 아니고 온갖 생물들이 자라고 있었고 논은 실로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이후로 그 농부는 오지게 다짐하였습니다. 논을 소로 갈고,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농사를 짓기로 말입니다. 이것이 하늘이 주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의 영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입니다.

정치참여인가? 종교개입인가?
혹자는 4대강 정비 사업에 종교가 반대운동에 나서는 것은 종교의 정치참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보여 질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 정부가 그 사업을 추진하는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종교는 종교 본연의 자리가 있습니다. 생명의 자리입니다. 종교의 마당인 생명이 정치세력에 의해 침해당했는데도 종교가 가만히 있다면 종교적 신성에 대한 직무유기입니다. 생명은 종교의 영역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도전행위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생명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경제개발이란 미명하에 무수히 많은 생명이 죽임당하거나 죽음으로 몰린다면 그것은 정치가 종교영역을 침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생명을 보호하고 보전해야 할 책무가 종교에 있기 때문에 저항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4대 종단이 벌리고 있는 4대강 지키기는 정치 간섭이 아니라 정치의 종교 간섭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이며 저항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4월 23일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반대성명을 낸바 있습니다.
사실 역사상 한 사안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대규모로 반대해온 현안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반대를 위한 반대자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고, 정부의 발목잡기라고 정죄할 것이 아니고, 그 의견을 수렴하여 충분히 검토하고 수정하여 긴 시간을 두고 할 일이지, 서둘러 추진할 일은 더욱 아닌 것입니다. 실제 자연은 한 번 무너지면 100년 아니 1,000년이 지나도 원 상태로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국교회
저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는 일에 한국교회가 많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이명박 정부가 국민의 사랑을 받는 정부로 기억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4대강 사업은 파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에 침묵하다가 이명박 정부가 이것 때문에 무너진다면 이명박 정부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파국으로 가는 길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파국은 국민적 불행이며 기독교의 불행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파국으로 가는 길을 막자는 것입니다.

4대강 정비 사업 강행은 한 수행자의 소신공양을 불러왔습니다.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붓고 자신의 몸을 심지삼아 불태워 부처님께 드리는 것이 소신공양입니다. 단순히 분신자살이 아닙니다. 문수스님이 소신공양을 한 이유는 4대강 정비 사업으로 생명의 신음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것을 듣고 더 이상의 살생을 막는 길에 자신의 몸을 불살라 드린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메시지입니다. 이를 무시하는 것은 더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나단 선지자와 같은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절대 권력자 다윗의 허물에 대하여 누구도 말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나단은 비유를 통하여 다윗의 죄를 지적하여 다윗이 회개하고 새로운 길로 가도록 도왔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명입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
프란치스코는 태양을 형제로, 달을 자매로 불렀고, 늑대를 형제로, 사슴을 자매로 부름으로 자연을 확장된 가족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자연은 늘 신비롭고 친숙하며 귀한 존재입니다. 실제 프란치스코처럼 자연과 깊은 교감을 나눈 사람도 드뭅니다. 그는 물고기나 새들, 들꽃과 심지어는 이리와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듯 생태적 감수성은 놀랍습니다. 프란치스코만 특별한 감수성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겐 생태적 감수성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상실한 것입니다.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자연을 하나님의 연인으로 묘사했습니다. 자연 세계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하나님조차도 매혹되어 자연 세계로 내려오신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떠오르는 태양, 들녘에 춤추는 노을, 저 푸른 창공, 흐르는 강물, 6월의 눈이 시리도록 푸른 나뭇잎, 형형색색의 꽃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이 경탄하신 자연은 처참하게 병든 자연의 신음소리와 더불어 아직도 경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또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소라고도 말하였습니다. 결국 자연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성소입니다. 자연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쉐리 맥페이그는 자연을 하나님의 몸이라고 은유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강은 하나님의 몸에 흐르는 혈관입니다. 혈관이 막히면 몸이 죽듯이 강이 막히면 자연은 죽고 결국 하나님도 죽게 됩니다. 자연의 재생능력에 기대를 해 보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려운 듯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고자 하는 인간의 불국의 의지가 필요합니다.
생태신학자 도드는 자연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적인 안내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자연은 하나님의 신비로 가득한 생명의 터전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로 연결되어졌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을 파괴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몸에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 신성목독행위입니다. 반면에 자연을 사랑하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과 통합니다.

인간의 사명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찬양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시편은 만물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자연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자연을 세밀히 들여다봄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알아보게 됩니다. 자연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지으시고 자연을 잘 돌보고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조세계를 잘 돌보는 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초의 사명입니다. 자연을 파괴할 권한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다만 잘 돌볼 책임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생명의 논리
세상은 경제 논리 즉 돈의 논리를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교회도 그런 추세입니다. 교회도 이미 맘몬에 장악을 한 듯합니다. 하나님은 물적 토대를 견실하게 해 주는 분입니다. 기도는 물적 토대를 얻는 통로일 뿐입니다. 예수는 그저 인간의 건강과 편안함과 행복을 얻는 도구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거래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신앙의 신비와 기도의 거룩함은 찾기 어렵습니다. 신앙의 역동적인 힘과 진리의 빛도 상실했습니다. 교회마저 돈이면 무슨 일이든 다 된다고 생각하는 천민자본주의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거룩함을 찾을 수 없다면 한국교회의 불행입니다. 종교의 길은 양보다는 질, 넓이보다는 깊이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실제 돈이 주는 행복보다는 돈이 주는 불행이 더 많습니다. 돈은 결코 온전한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다만 행복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도움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을 다 허비합니다. 이것이 불행입니다.
세상은 경제논리로 나아기지만 기독교는 생명의 논리를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돈이 되는지를 묻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기독교는 그 일로 생명이 사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생명의 논리가 기독교의 기준입니다. “너희는 세상풍조를 따라 살지 말고 믿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살펴 그 뜻을 따라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의 논리를 저버린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버린 것이며 그런 교회는 존재의미가 없습니다. 화려한 예배당에 수만 명이 모여 예배하여도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역겨워하십니다. 두 사람이 모여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면 하나님은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신앙과 눈뜸
“들에 백합화를 보라, 온갖 부귀와 영화로 다 차려 입은 솔로몬보다 저 꽃 하나가 더 잘 차려입었다.”
어느 날 바리새인들이 예수에게 소경을 데리고 왔습니다. 물론 예수를 시험해보려고 온 것입니다. 당시 소경은 조상의 죄든 본인의 죄든 죄의 결과라고 믿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는 죄인취급을 받았고 위축되어 살아가야 했습니다. 번번한 직업도 없었으니 그는 늘 변방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민중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묻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조상 때문이요 아니면 자신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조상의 죄도 아니고 그 사람의 죄도 아니다.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선 예수께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란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입니다. 소유의 세계로 고정된 우리의 눈을 열어 존재의 세계를 보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인간의 풍요와 편리로 고정된 우리의 눈을 열어 우주생명이 서로 공생하는 생명평화세상을 보게 하셨습니다. 인간중심주의의 폐혜를 보게 하고 생명중심주의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기운의 근원
얼마 전 종교생태학자 유기쁨 박사가 저에게 묻습니다.
어디에서 기운을 얻어 그 많은 일을 하느냐고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는 분에게서 받은 질문치고는 고마운 질문이었습니다. 제 일에 대하여 많은 관심과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고서야 그런 질문이 나올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 생각해보니 저는 세 군데서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그것도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다는 사실이 저에겐 큰 힘이었습니다. 주님은 세상 끝까지 나와 함께 하실 것이며 결코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저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고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현재에도 함께 하시며 앞으로도 당신의 뜻을 따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내게 사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총입니다. 이 믿음이 나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저에게 힘을 주는 것은 자연이었습니다. 기회만 되면 자연의 품으로 갑니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옥상에 상자텃밭을 만들었습니다. 자라나는 모습에서 생명의 신비를 느낍니다. 여러 번 상추와 쑥갓, 돌나물, 케일과 셀러드를 뜯어 먹었습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옥상 텃밭입니다. 작물과 만나는 일은 신선한 기운을 얻는 일입니다. 매일 작물과의 대화도 합니다. 어느 날 저녁에 둘째 인하와 물을 주는데 인하가 작물에게 말을 겁니다. ‘목말랐지, 많이 먹어.’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에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어른들은 이미 식물과 대화하는 법을 상실했습니다. 생태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 제가 기운을 얻는 곳은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엔 참 좋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환경운동이나 평화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모두 좋은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저도 괜찮은 사람 아닌가요? 사실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선후배들이 밥 먹는 것을 부담스러워하지요. 음식 남기면 혼난다고요. 저화 받는 것도 두렵다고 합니다. 네가 왜 이런 존재가 되었을까요? 그렇다면 김기석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그래요 참 좋으신 분이죠. 같이 있으면 좋은 기운이 막 내게 들어오는 것을 느껴요. 김기석 목사님 같은 분과 한 시절 길을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기쁜 일지죠. 청파교회는 어떻습니까? 생각만 해도 든든하지요. 이만한 교회가 서울 한 복판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싶어요. 이 교회에 속해 있는 교우들 정말 대단하신 분들이죠. 저는 매일 매일 청파교회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꿈을 따라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요즘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할 기회가 많습니다. 지난 주일엔 향린교회에 갔었습니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신앙의식이 참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식이 참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은 정치가 아닙니다. 정신이죠. 정신을 길러내고 세우는 일은 교회의 몫입니다. 청파교회를 여기에 세우신 것은 주변 이웃들을 섬기는 것은 물론이고 이 시대를 이끌 정신을 세우라고 세운 것입니다.

에클레시아, 세상에서 불러낸 사람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분주한 일상에서도 제자들을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퇴수회를 떠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인이 ‘예수님도 개고기를 무척 좋아하셨나봐요. 개 사러 비립보에까지 가셨으니 말입니다.’ 해서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어요. 옛날엔 개를 가이라고 했지요. 예수께서 빌립보에 가신 것은 군중들을 피해 제자들과 오봇하게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의 믿음을 견고히 하고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자신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갈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불러낸 것은 너희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두려워마라, 음부의 권세가 너희를 어떻게 못할 것이다. 천국의 열쇄를 너희에게 준다. 하나님의 뜻과 내 말을 따라 살면 무슨 일이든 다 이루겠다.”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이 세상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제자로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사교집단이 아닙니다. 물론 봉사집단도 아닙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이며 평화의 나라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평화세상을 여는 녹색교회를 만드는 일입니다.

외국 평화운동가들이 한국을 방문해 붉은악마들이 응원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평화운동을 역동적으로 한다’며 놀랐다고 말하더랍니다. 의아해서 뭐가 그리 역동적이게 느꼈냐고 물으니 “‘오 피스 코리아’ 대단하던데요”라고 말하더랍니다. ‘오 필승 코리아’를 ‘오 피스 크리아’로 알아들었던 것입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평화운동가에겐 비슷한 말은 모두 평화로만 들렸나봅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꿈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꿈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의 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우리 자신이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위해 말하면 세상은 우리를 고상한 사람들이라고 칭찬한다. 하지만 우리가 평화를 위해 일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우리를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고 말입니다.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 평화에 대하여 말만 하고 평화를 위해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그리스도인, 참 교회가 아닙니다.

청색이 자본주의를 대변하고 적색이 사회주의를 대변한다면 녹색은 생명,생태주의를 대변합니다. 녹색은 그저 색깔을 말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녹색은 이제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녹색가치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녹색은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귀한 존재입니다.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엄성을 갖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생명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가치는 물질의 가치를 넘어서는 최우선적인 가치입니다. 이제 말로만의 녹색이 아니라 진정으로 녹색가치를 추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도 없고, 지구의 미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녹색은 인류 생존의 문제입니다. 세계가 녹색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을 위해서는 아닙니다. 인류와 지구 생태계가 공존하여 살 수 있는 길이 녹색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녹색이 희망입니다. 녹색은총, 녹색신앙, 녹색교회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꿈을 실현하고 세상을 구원할 녹색교회의 이상은 청파교회의 몫입니다. 이 목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과 인간적 기우를 넘어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거대한 꿈을 실현시킵시다.

위대한 과업
영국의 생물학자인 러브룩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라고 보았습니다. 가이아 이론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하여 볼 필요가 있는 논리입니다. 실제 독일의 생태신학자인 프란트 알트는 지구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며 지구는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인간임을 알아보았고 그 인간을 죽이기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요즘 일어나는 자연재해를 보면 그 말이 실현되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토마스 베리는 그의 저서 위대한 과업에서 인간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위대한 과업은 인간중심주의를 생명중심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IPCC의장 파차우리는 과학기술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오직 인간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길-즉 불편함을 감수하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침팬지의 어머니 제인구달 박사는 지구의 희망은 자연의 재생능력과 생명을 살리고자하는 인간의 불굴의 열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청파식구 여러분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불굴의 열정을 가지십시다. 그것이 위기에 직면한 지구와 인류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지구 저편에 있는 몽골은 지구 위기의 중심에 있습니다. 국토의 절반이 사막이고 90% 지역에서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샘의 근원 1500개가 말랐고 하천 760곳이 사라졌고 호수 700곳이 말랐습니다. 길이가 무려 25km가 넘는 울란 호수도 사라졌습니다. 사막화는 몽골 주민들에겐 생존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몽골의 은총의 숲을 조성하는 일은 몽골 주민들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일이며, 지구 생태계를 살리는 길이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몽골 주민들에게 은총의 사업이 될 것입니다. 또한 새로운 선교의 길을 열게 될 것입니다. 청파교회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몽골에 은총의 숲을 조성합니다. 기도와 후원에 깊이 감사드리며 지속적인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만물이 여러분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합시다. 평화 세상을 여는 녹색교회의 실현은 단순히 좋은 꿈이 아닙니다. 이는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뜻을 온 몸으로 붙들고 사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모두 그 주인공들이 됩시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6월 13일 12시 13분 4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