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7. 거둠과 심음의 리듬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4:31-38
설교일시 201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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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둠과 심음의 리듬
요4:31-38
(2010/7/4)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이 예수께,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셨다.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고 서로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그리하면 씨를 뿌리는 사람과 추수하는 사람이 함께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말이 옳다. 나는 너희를 보내서,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거두게 하였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 한 사람 깊이 만나기
성경의 아름다운 장면은 우물을 배경으로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우물가에서 이삭의 신부감인 리브가를 만납니다. 리브가는 먼 길을 걸어온 그 낯선 노인을 위해 물동이를 내려 손에 받쳐들고는 노인에게 물을 대접합니다. 또 여러 차례 물을 길어 노인이 끌고온 낙타들에게 먹이는 수고도 아끼지 않습니다. 남을 넉넉하게 배려할 줄 아는 그 여인은 결국 이삭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하란으로 피신한 야곱이 우물가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있을 때 외사촌인 라헬이 다가옵니다. 야곱은 얼른 일어나 무거운 돌을 들어내고 라헬을 위해 물을 긷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그들은 부부가 됩니다.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친 모세는 어느 날 우물가에서 목자들에게 쫓겨날 처지에 있는 미디안의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을 도와 양 떼에게 물을 먹인 인연으로 르우엘의 사위가 됩니다. 결혼에 목마른 이들이 있다면 우물가에 한번 가보면 어떨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수가(Sychar) 성에 살던 한 여인이 우물가에서 나눈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대목입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하여 아무도 오지 않는 한낮에 우물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보는 순간, 예수님은 여인의 외로움과 고통을 직감하셨습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며 접촉을 시도합니다. 여인은 예수에게 유대 사람이 어떻게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며 불퉁거립니다. 그 자신이 사회의 통념과 관습에 의해 상처를 입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관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실 물’이 예수님께 건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실 물’이라는 기호를 통해 대화는 이어졌습니다. 문답이 진행될수록 여인은 그 낯선 유대 남자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그 분의 존재는 여인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던 절망과 원망의 마음을 녹여냈습니다. 지금 그 과정을 상세히 살펴볼 시간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천하보다도 귀하게 대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주님은 여인을 정성을 다해 만나십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예수님의 삶을 요약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소회三笑會라고 들어보셨습니까? 삼소회는 1988년 장애인 올림픽을 앞두고 가톨릭 수녀와 불교의 비구니 스님 그리고 원불교의 교무들이 모여 장애인을 위한 음악회를 열면서 결성된 모임입니다. 몇 해 전 이 여성 수도자들이 세계 각지에 있는 각 종교의 성지를 함께 순례했습니다. 그분들과 동행했던 조현 기자는 바라나시의 티베트 불교대학에서 달라이 라마를 만난 후, 건물 밖으로 걸어나오다가 목격한 한 장면을 들려줍니다. 현관 앞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쁜 일정 때문에 빨리 차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차에 오르지 않고 한 사람 앞으로 다가섰습니다. 사람들 중 가장 병들어 보이는 노인 앞이었습니다. 훨체어에 탄 노인은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 말로 뭔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하던 달라이 라마는 그를 꼭 껴안았습니다. 노인은 울먹였고, 달라이 라마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비서들이 채근했지만 그는 노인 앞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오열했고, 또 한참이 지났습니다. 노인의 오열이 멈추자 달라이 라마는 그를 다시 한번 가슴에 안았습니다. 그리고 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노인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가슴에 사랑의 불을 지폈던 것입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그는 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인류에게 가르쳐 준 셈입니다.(조현, <<지금 용서하고 지금 사랑하라>>, 54-57쪽)

• 보람을 먹고 산다
예수님을 만난 그 여인의 마음도 휠체어 노인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누군가에게 자기 속에 일어난 그 놀라운 변화를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의미를 되찾은 이의 기쁨이 그런 것일까요? 어리둥절해진 제자들은 그 어색한 상황을 벗어나려고 구해온 음식을 주님께 드리며 “랍비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누가 잡수실 것을 가져다 드렸을까?” 하며 수군거리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34)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다고 한 것이 안중근 의사였던가요? 발터 벤야민이라는 유대계 독일학자는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나찌를 피해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코앞까지 다가온 국경경비대를 피해 숨을 죽이고 있던 와중에 가방에 있던 괴테의 시집을 꺼내 읽었다고 합니다.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그게 발터 벤야민다운 행동입니다.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게 바로 우리의 양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양식을 먹고 사십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게임이나 인터넷 서핑을 양식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버스나 지하철에 앉아서도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는 이들도 많아졌습니다. 그런 양식을 먹으면 마음의 헛헛함이 사라질까요?

예수님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고 사셨습니다.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의 뜻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은 병든 사람을 만나면 고쳐주셨고, 귀신 들린 사람을 만나면 귀신을 쫓아내 온전한 삶을 살도록 도우셨고, 외로운 사람을 만나면 벗이 되어 주셨고, 방황하는 이들을 만나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주님은 물처럼 만나는 모든 사람 속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생명의 보람은 누군가의 가슴에 기쁨을 주는 데 있습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누군가의 요구에 응답할 때입니다. 자기 보호 욕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동물과 인간이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을 영적인 동물이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절망의 어둠이 다가올 때 쉽게 넘어집니다. 하지만 자기 삶이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쉽게 절망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헛된 일에 분주한 이들을 바라보며 탄식하듯 외칩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양식을 얻지도 못하면서 돈을 지불하며, 배부르게 하여 주지도 못하는데, 그것 때문에 수고하느냐? ‘들어라,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으며, 기름진 것으로 너희 마음이 즐거울 것이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사55:2-3a)

“그 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암8:11)

양식 아닌 것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풍요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우리 영혼이 파리해진 것은 마땅히 먹어야 할 양식을 먹지 못해서가 아닙니까? 지금이야말로 예수님의 양식을 우리의 양식으로 삼아야 할 때입니다.

• 인생은 추수
주님은 바로 지금이야말로 추수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은유적 표현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지금 여기서의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보십시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b)라고 말합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추수의 날은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입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여야 할 때도 지금이고, 강도만난 이웃에게 다가서야 할 때도 바로 지금이고, 신음하는 피조세계를 돌보는 일도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추수입니다. 내일은 우리의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시간입니다. 조건이나 형편이 좋아지면 나누며 살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봅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형편이 좋아져도 남을 돕지 못합니다. 나눔은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추수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거두는 것, 누리는 것은 이전에 다른 사람이 심은 것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내가 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다른 이의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일 뿐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은 심고, 한 사람은 거둔다’는 격언을 인용하고 계십니다.

“수고는 남들이 하였는데, 너희는 그들의 수고의 결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38b)

인생의 성숙은 이걸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고마움을 알 때 인생은 기쁨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사는 것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입은 옷, 우리가 사는 집…어느 하나 우리가 만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누리고 사는 풍요로움과 자유는 앞선 세대의 헌신과 숭고한 희생 덕분입니다. 심은 이가 따로 있고 거두는 이가 따로 있다는 말씀이 옳습니다. 한 세대 전,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했던 분들 덕분에 우리는 풍요를 누리고 있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희생 덕분에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의 수고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 희망의 파종
그렇기에 추수꾼의 역사적 책임은 또 다른 파종자가 되어 미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으로 뭔가를 심고 있습니다. 장차 광풍이 될 바람을 심는 사람도 있고, 장차 신바람이 될 바람을 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만나는 이들의 가슴에 어떤 씨앗을 심습니다. 사랑과 이해와 관용의 씨를 심을 때도 있고, 오해와 미움과 증오와 절망의 씨를 심을 때도 있습니다. 이 무정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심정은 많이 황폐해졌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창고에서 꺼내는 것들이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세상의 재료입니다.

우리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일종의 허무주의입니다. 세상이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갖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살자가 늘어나고, 흉악한 범죄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자기 욕망을 다스리지 못해 괴물로 변해버린 이들이 거리를 활보합니다. 우리 마음은 점점 옹색해지고, 자기를 지키며 살기에 급급합니다. 갑각류처럼 두꺼운 껍질을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심어야 하는 일꾼들입니다. 결과를 걱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만 걱정하면 됩니다. 바울 사도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철저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망에 근거한 낙관론은 위험할 때가 많습니다.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것은 베트남 전쟁 때 하노이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미국 장군의 이름에서 따온 말입니다. 그는 8년 동안의 포로생활 끝에 풀려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붙잡고 여러 가지를 물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먼저 죽어갔느냐는 질문에 그는 ‘낙관주의자’라고 대답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사람들에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의미심장합니다. 낙관주의자들은 ‘이번 크리스마스 때면 나갈 수 있을 거야’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욕구가 좌절될 때마다 그들은 ‘부활절에는’, ‘추수감사절에는’ 하다가 결국 낙담하여 자살하거나 병들어 죽어갔다는 것입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크리스마스까지 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비했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 주중에 몽골에 다녀왔습니다. <은총의 숲> 조성 현장을 둘러보고, 나무도 심었습니다. 급속하게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몽골에서 우리가 심는 나무가 얼마나 잘 자라고, 또 그 나라의 소망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작했습니다. 사막에 꽃이 피게 하시고, 광야에서 샘이 솟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홍순관은 앨리스 워커의 시에 곡을 붙여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 노래는 독재자들에 의해 부모형제, 그리고 연인까지 다 잃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오면 나무를 심으라고 속삭입니다. 홍순관은 우리가 쉴 수 있는 푸른 숲마저 사라진다 해도 또 다른 숲을 시작하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법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가장 외로운 시간, 우리 곁에 말없이 다가오시어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생명을 살리고 풍성하게 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신 분이십니다. 그 주님은 우리 속에 우정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셨습니다. 그 꿈은 허황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름다운 추수와 파송의 잔치에 기쁨으로 동참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7월 04일 12시 01분 3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