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1. 외딴곳으로 가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막 6:30-32
설교일시 2010/08/01
오디오파일 s20100801.mp3 [7551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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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곳으로 가자
막6:30-32
(2010/8/1)

[사도들이 예수께로 몰려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그에게 보고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를 타고, 따로 외딴 곳으로 떠나갔다.]

• 리셋 버튼
주님의 은총 가운데서 우리는 지금 대서 절기를 지나 입추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무더위에 지쳐서인지 몸과 마음이 다 무겁습니다. 잠을 충분히 잔 것 같은 데도 피로하고, 별 일이 없는 데도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가수 장기하는 도시인들의 이런 상황을 역설적으로 노래했습니다. 혹시 <별 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를 들어보셨는지요?

“네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 거다/뭐냐하면/나는 별 일 없이 산다/뭐 별다른 걱정 없다/나는 별 일 없이 산다/이렇다 할 고민 없다///네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오늘 밤 절대로 두 다리 쭉 뻗고 잠들진 못할 거다/그게 뭐냐면/이건 이건 네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 거다/이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 거다/하지만/나는 사는 게 재밌다/하루하루 즐겁다/나는 사는 게 재밌다/매일매일 신난다”

장기하를 만날 수 있다면 정말 별 일 없이 사냐고 묻고 싶습니다. 그는 이 노래를 아주 무표정하게 부릅니다. 이렇다 할 고민도 없고, 사는 게 재미있는 사람의 표정이 아닙니다. 노래를 들으면 의도적으로 세상과 거리두기를 하려는 젊은 세대의 안간힘 같은 것이 느껴져 안쓰럽기도 합니다.

제가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은 근 5년 이상 쓴 것인데, 아직도 건강합니다. 가끔 사는 게 권태롭다는 듯이 반응 속도가 느려져서 탈이지 그런대로 쓸 만합니다. 문자를 보거나, 사전을 찾을 때 너무 게으름을 부리면 가끔씩 reset 버튼을 눌러줍니다. 그러면 불필요한 것들이 정리되면서 속도가 빨라집니다. 가끔씩 우리 삶에도 reset 버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어지럽혀진 우리 마음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가벼워질까요? 휴가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소중한 기회입니다. 바캉스(vacances)는 라틴어의 바카티오(vacatio)에서 온 말인데, 바카티오는 ‘텅 비우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휴가는 그래서 삶의 reset 버튼이 될 수 있습니다. 휴가철이 되면 늘 떠오르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 행동주의를 경계하라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일을 다 보고하였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생명 살림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세상살이에 시달리며 마음이 굳어진 이들에게 우정과 환대에 바탕을 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사람들로 하여금 인격의 통합성을 유지하며 살지 못하도록 하는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과 질병으로 짓눌린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자기들의 헌신을 통해 새로운 세상의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경험한 제자들은 다소 흥분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세상을 금방 바꿀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들뜬 모습과는 달리 주님은 아주 차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와서, 좀 쉬어라.”

마가복음 기자는 ‘거기에는 오고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일한 후의 휴식은 당연한 듯하지만, 제자들을 외딴 곳으로 초대하는 주님의 의도는 다소 복합적인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부푼 마음에 제동을 걸고 계십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충만한 자신감과 의욕은 때로 더 큰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고, 더 깊은 절망에 빠지는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새로운 세상은 훨씬 더 많은 실패와 좌절을 거치며 조금씩 성숙해 갑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하고 계십니다. 감정은 지성과 같이 가야 안전합니다. 물론 지성은 영성과 함께 가야 공허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처세를 가르치는 이들은 사람들에게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시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분별하는 지혜가 없다면 적극적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외딴 곳으로 이끄신 까닭은 냉정하고 고요하게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쉴 줄 모르는 사람은 타인에 대해 억압적이기 쉽습니다. 자기 열정을 과도하게 다른 이들에게 강요함으로써 관계를 파탄냅니다. 쉼 혹은 물러섬은 예수적 삶의 방식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주님은 사람들 속에 머무시면서 그들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진력하셨습니다. 하지만 늘 한적한 곳을 찾아가 홀로 머무셨습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복잡한 마음의 결을 하늘 뜻에 따라 조율하고, 지친 심신에 하나님의 평화를 채우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자기가 한 일을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자기의 한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미국의 가톨릭 사회운동가 도로시 데이는 분주한 일상을 뒤로 하고 시시때때로 고요한 곳을 찾아가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마른 샘이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이처럼 달디단 샘물을 마셔야 한다.”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 자아 내려놓기
그런데 참다운 쉼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를 짓누르는 무거운 것들을 내려놓는 것일 겁니다. 처리해야 할 일에 대한 근심도 내려놓고, 뒤엉킨 인간관계가 빚어낸 무거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은 뭐니 뭐니 해도 ‘自我’가 아닐까요? 잘 아시다시피 ‘나 我’ 자는 ‘손 手’와 ‘창 戈’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모양이지요. 손에 창을 들고 있다는 것은 뭔가 지켜야 할 게 있다는 말이고, 지키기 위해서는 늘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상대가 함부로 대할 수 없도록 나를 크고 근사하게 포장해야 합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다른 이들의 평가에 민감합니다. 그들은 삶에 있어 가장 본질적인 일보다는 비본질적인 일에 더 마음을 쓰며 삽니다. 학벌, 재산, 지위 따위를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세상에는 학식도 뛰어나고 지위도 높지만 도무지 인간의 향기가 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손에 창을 들고 있는 사람’ 하면 저는 즉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 사울이 떠오릅니다. 그는 권력에 맛들이면서 초심을 잃었습니다. 다윗에게로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자 불안을 느낍니다. 마음에 불안의 씨앗이 떨어지면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불안이 깊어지면 타자에 대한 공격성이 강화됩니다. 성서 기자는 사울의 이야기를 기술할 때 손에 창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는 것은 사람을 신뢰할 수 없게된 그의 불안과 광기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옛 사람은 남을 아는 사람을 일러 지혜롭다 하고(知人者智), 자기를 아는 사람을 일러 밝다 (自知者明)고 했습니다.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기의 한계를 알고, 허물을 알기에 자아를 지키는 일에 급급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게 됩니다. 그도 또한 어쩔 수 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외딴 곳에서 자기를 진지하게 돌아볼 때 우리는 지난날의 삶이 각박했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을 차갑게 대하고, 건성건성 대하고, 마치 밀쳐내듯 대했음을 알게 됩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게 있어서 휴가는 말의 금식을 의미합니다. 저는 한 주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즐거운 시간도 있지만 고통스런 시간도 있습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위로하고 공감하고, 다른 한편으로 충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 나 또한 연루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매주 설교를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가끔 해본 적도 없는 수도원 생활을 그리워하고, 수십 일을 걷는 도보 순례자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침묵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 가운데 누군가의 가슴에까지 당도하는 말은 얼마나 될까요? 이런 자괴감이 들 때마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말은 소음’이라는 막스 피카르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외딴 곳으로 부르신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큰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칼이나 붓으로 색을 칠한 후에 뒤로 물러나 그림을 살핍니다. 부분과 부분의 관계가 조화로운지를 살피는 것일 겁니다. 일상에서 물러섬은 후퇴가 아니라, 전체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노력입니다.

• 어울림의 기쁨
외딴 곳이 절대적인 고독의 장소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곳은 ‘자아’를 내려놓은 이들의 친밀한 사귐이 가능한 곳이기도 합니다. 제자단, 예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분명한 지향을 가지고 사는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할 것입니다. 벼슬을 빳빳이 세우고 고개를 치켜들어 자기를 크게 보이려는 닭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있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작음과 허물조차 사랑으로 부둥켜안는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평화의 충전소가 아니겠습니까? 살아온 내력이 저마다 다르고, 삶의 형편도 다 다르지만, 그래도 함께 만들어가는 삶의 이야기가 있어 행복한 곳, 바로 그곳이 외딴 곳입니다.

목요일부터 시작되는 전 교인 수양회는 바로 그런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행복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번 수양회의 주제는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야기’라는 말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삶은 이야기를 구성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들의 이야기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함께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우리는 ‘한 몸’이 되어가고,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다양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어울림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는 풍성해집니다.

함께 어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우려는 마음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어울리지 못하고 버성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내향적이어서 숫기가 부족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다소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영성이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게만 편안한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형제자매들을 향해 마음을 열 때 우리 영혼은 건강을 회복하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는 의욕이 앞서서 늘 성급해 보이는 이들도 있고, 늘 조심스러워 답답해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조금씩 자기 자리를 벗어나 상대를 향해 나아가게 될 때 공동체는 발전합니다. 예수 공동체는 그런 삶을 익히는 학교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언제라도 떠날 사람처럼 처신하지 말고, 수굿하게 그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차이를 받아들이고, 인내심을 발휘할 때 우리 영혼은 성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서 주인이 되면, 바로 서 있는 그 자리가 참된 곳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병든 사람을 만날 때나, 외로운 사람을 만날 때나, 배고픈 사람을 만날 때나,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을 때나 예수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상황이 변해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 더 큰 안식으로의 초대
그런데 마가는 외딴 곳에서도 제자들이 쉴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재촉하여 그곳으로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모처럼의 휴식을 방해받은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짜증이 났겠지요? 무리들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빛이 따뜻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보고 깊은 연민을 느끼셨습니다. 그들의 삶의 상황은 열악했습니다. 로마 체제에 의해 수탈당하고 박해받는 처지였기에 먹고 살기도 어려웠고, 병이 들어도 치료받을 길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미래에 대한 전망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형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희망의 빛이 점화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애가 탔습니다. 빨리 그 귀찮은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라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 터무니없는 지시에 황당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 일어난 놀라운 기적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 현장에 동참했던 이들은 새로운 세상이 어떻게 열릴 수 있는지를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그 무리는 더 이상 그들의 쉼을 방해하는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목격자요 하나님 나라의 꿈을 공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자들이 느낀 큰 기쁨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남을 위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충만함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큰 안식이 아닐까요? 쉼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 있는 이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 때로는 진정한 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무더운 여름, 교우 여러분이 찾아가는 곳이 주님과 만나고, 어울림의 기쁨을 맛보는 외딴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함을 통해 더 큰 쉼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8월 01일 12시 07분 0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