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3. 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소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애 5:19-22
설교일시 201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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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날을 새롭게 하소서
애가5:19-22
(2010/8/15)

[주 하나님, 영원히 다스려 주십시오. 주님의 보좌는 세세토록 있습니다.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며,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래 버려 두십니까? 주님,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셔서, 옛날과 같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우리에게서 진노를 풀지 않으시렵니까?]

• 조롱거리가 된 백성
무더위 속에서도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8.15 해방 6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올해는 특히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이 되는 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뜻을 거슬러 이뤄졌고, 그것이 가져온 많은 손해와 고통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함께 마음으로부터 사죄를 표명한다는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사과에 따른 후속조치가 미흡한 것을 볼 때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저는 식민지 시대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 속하기에 해방의 감격이 얼마나 큰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도 빼앗기겠네’라고 노래했던 이상화의 시를 통해 그 시절의 고통을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나라를 잃고, 반 만년 동안 사용해온 언어도 빼앗기고, 이름조차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바빌론에 의해 나라를 잃고 포로로 잡혀가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망향의 노래로 시름을 달랬습니다.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 곳곳에 앉아서, 시온을 생각하면서 울었다.”(시137:1) 이런 그들에게 식민주의자들이 자기들 흥을 돋우어 주기를 요구하며 시온의 노래 한 가락을 불러 보라고 했을 때 그들은 차라리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기를 소망했습니다. 나라를 되찾는다는 것은 영토나 주권의 회복만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금 8.15는 우리의 삶에 아무런 감동도 자아내지 않는 사어死語가 되고 말았습니다. 8.15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휴일 혹은 대통령 특별사면? 풀려난 이들은 감격하겠지만, 화합과 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중범을 저지른 사람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현실을 보면서 서민들은 허탈감을 넘어 ‘역시 출세는 하고 볼 일’이라는 자조적인 탄식만 하게 됩니다. 아직 우리의 해방은 여전히 미완료 상태입니다. 해방과 더불어 민족분단의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국과 함께 서해와 동해에서 군사훈련을 벌이자, 북한은 해안포 사격 훈련을 통해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참 딱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단의식이 무너지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식민지 백성일 따름입니다.

이러한 때 예레미야 애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빌론 군대에 의해 참혹하게 유린된 조국 산천을 바라보며 예레미야는 애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로 북적이던 도성은 적막하게 변했고, 시온으로 가는 길은 인적이 끊겨 쓸쓸합니다. 순례자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에는 핏기조차 없고, 삶은 힘겹기만 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황망한 현실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등진 백성들을 노여워 때리시고, 앞 길을 막으시고, 온갖 고생을 다 시키시고, 과녁으로 삼아 화살을 쏘아대십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행복은 지난 시절의 꿈일 뿐, 그들은 넋을 빼앗긴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내가 지은 죄를 묶고 얽어서 멍에를 만드시고, 그것을 내 목에 얹어서 힘을 쓸 수 없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내가 당할 수 없는 사람의 손에 넘기셨다.”(1:14)

바울 사도의 말과도 통합니다. 그는 하나님은 당신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이들을 타락한 마음자리에 내버려 두신다고 했습니다(롬1:28). 사람은 자기의 죄로 자기를 묶을 멍에를 만듭니다.

• 타락한 종교
대체 왜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 개인의 책임도 있지만 지도자들의 잘못도 큽니다. 많은 지도자들이 통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고, 불의를 방조하거나 조장합니다. 의인들은 핍박받고 입에 재갈이 물리워집니다. 이런 세상은 몰락을 앞둔 세상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큰 죄는 예언자들에게 있습니다. 예언자로 부름을 받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불행한 일입니다. 그들은 대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불의한 현실을 보면 사자처럼 일어나 그것을 꾸짖어야 하고, 역사가 나락으로 떨어져 누구도 희망을 말하지 않을 때는 자기 속의 절망을 베어내고 일어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이든 예언자들의 말은 경청되지 않았습니다. 참 소리 앞에서 귀를 닫는 것은 예나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참 소리가 끊어진 자리에서 역사는 묵정밭이 되고 맙니다.

예레미야는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에서 숨져 가고, 먹을 것 마실 것을 달라고 보채다가 쓰러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는 동족들을 보며 마음이 쓰립니다. 그래서 더욱 분노합니다. 예언자들이 거짓되고 헛된 환상을 보고, 백성들의 죄를 분명히 밝혀주지 않았기 때문(애2:14)에 이 지경이 되었다는 자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성전조차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제단도 버리시고 성소도 역겨워하십니다(2:1, 7). 종교의 타락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문화의 고갱이는 종교이고, 문화 현상은 그 시대의 종교가 외적으로 발현된 것이라는 말일 겁니다. 소비주의, 물질주의, 피상적인 관계맺음, 몰인정한 세태, 생명에 대한 경시, 폭력과 불화의 증대 등은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교회에 드나드는 이들은 많지만, 복음을 삶으로 살아내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이들을 성전 뜰만 밟는 자들이라고 준엄하게 꾸짖었습니다(사1:12). 많은 이들이 자기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당연합니다.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자기 한계에 직면하고, 그 때문에 어쩔 줄 모를 때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은총, 화해, 정의, 평화에 대한 말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적습니다. ‘소리’와 ‘정체’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의 참됨은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통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입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말하면서도 우리는 삶으로 그것을 부정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은 모험이요 결단이요 책임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모세는 홍해를 향해 팔을 내밀었고,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향해 함성을 질렀고, 베드로는 풍랑이 이는 바다로 뛰어들었고,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오른팔, 왼팔이 되어 드려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신앙은 사적이고 내적인 차원을 포함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신앙은 공동체 지향적이어야 하고, 역사 변혁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의 단초로 삼으시기 위해 12명의 제자를 세우셨고,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새로운 세상의 전령이 아니라, 새 세상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통렬한 반성과 회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 희망은 있다
예레미야 애가는 탄식으로만 그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낮아진 자리에서 예언자는 문득 희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경험과 의지에 바탕을 둔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희망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애3:22)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결같은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 곧 헤세드hesed입니다. 사람은 신실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십니다. 그 사랑에 대한 기억이 새로운 희망의 뿌리입니다. 하나님은 떨기나무를 불태우시지만, 그 나무를 소멸시키지는 않으십니다. 믿는 사람도 실패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넘어질 수는 있지만 부서지지는 않습니다. 도가니에 단련되는 은처럼 정제되기는 할망정 찌끼처럼 버림받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일컬어지는 도로시 데이는 젊은 날 불의한 사회 현실에 침묵하는 교회에 분노해 신앙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어떤 이끌림조차 뿌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극작가인 유진 오닐이 낭송하는 프랜시스 톰슨의 시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를 듣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이 시에서 사냥개는 하나님의 은유입니다. 사냥개가 사냥감을 포기하는 법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러하십니다. 밤낮 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쳐도 하나님은 서두르지도 않고 흐트러짐도 없는 발걸음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 삶에 고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고통과 악이 가득 찬 세상이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에는 하나님의 숨결이라는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로버트 브라우닝 해밀턴의 시를 들어 보십시오.

나는 쾌락과 함께 1마일을 동행했지.
쾌락은 함께 걷는 내내 조잘거렸지만
나는 하나도 지혜로워지지 않았다네.
그녀는 그저 지껄이기만 했지.
나는 슬픔과 함께 1마일을 동행했지.
슬픔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네.
그러나 오, 슬픔이 나와 함께 걸었을 때
내가 그녀에게 배운 것들이란!

브라우닝은 슬픔을 통해 배운 것을 나열하지 않습니다. ‘배운 것들이란!’이라는 종결형 서술격 조사를 통해 오히려 모두를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입니다. 고통과 슬픔과 실패는 삶의 과정 중에 우리가 늘 만나는 손님들입니다. 반갑지 않은 그 손님들을 잘 맞이하면, 그들이 가져오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너무 늦기 전에
폐허가 된 조국산천을 바라보며 낙심하고, 동족들의 곤고하고 비참한 삶을 보며 눈물짓던 예언자는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 영원히 다스려 주십시오. 주님의 보좌는 세세토록 있습니다.”(19)
“주님,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셔서, 옛날과 같게 하여 주십시오.”(21)

예레미야는 나라의 장래를 뛰어난 지도자의 출현이나 그의 지혜에서 찾지 않습니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주님의 다스림이었습니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은 예레미야의 기도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새 날, 새 역사는 새 마음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우리가 삶의 주변부로 밀려난 이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려는 열망을 품을 때 새로운 역사는 시작됩니다. 직장에서 밀려난 사람들, 청년 실업자들, 대학 입시에 실패한 이들, 노인과 장애인, 이주 노동자들,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따뜻하게 배려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런 이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는 눈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가장 절실한 목소리를 낼 수 있기에, 하나님은 그들 곁에 머무십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모두가 귀히 여김을 받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만 송이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꽃의 크기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빛깔이 달라도 그 가치만은 우열이 없는 나라입니다.”(이오덕/권정생,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한길사, 206쪽)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고, 계층과 계층 사이의 위화감이 커지고, 신뢰의 터전이 속절없이 흔들리는 이때야말로 우리 역사의 꿈을 새롭게 해야 하는 때입니다. 자의식만 부풀게 하는 허황한 종교 생활에서 벗어나 참 사람의 길을 찾으십시오. 참 사람의 길은 이웃들을 거쳐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외로운 이들 곁에 머물고, 낙심한 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으십시오. 배고픈 사람은 먹이고, 비틀거리는 이들을 부축하여 일으키 십시오. 말이 아닌 삶으로 여러분의 믿음을 입증하십시오. 계몽주의자들은 자신의 앎을 사용할 ‘용기를 갖자Sapere Aude!’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시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용기입니다. 내가 변하면 주변도 변합니다. 역사의 변혁은 언제나 안에서 밖으로 일어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세상의 싹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에서 시작됩니다. 이 부르심에 응답하십시오. 주님의 손발이 되는 기쁨을 누리며 사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8월 15일 12시 14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