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6. 애써 주님을 알자
설교자 김기석
본문 호 6:1-3
설교일시 2010/09/05
오디오파일 s20100905.mp3 [1295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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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주님을 알자
호세아6:1-3
(2010/9/5)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 죽음의 그늘 골짜기
지난 한 주간도 주님의 은총 가운데 평안하셨습니까? 태풍 곤파스(compass)가 남겨놓은 상처가 아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많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뿌리 뽑힌 나무, 허리가 부러진 나무, 가지가 찢긴 나무를 보며 착잡했습니다. 채 익지도 못한 채 떨어져 행인들에게 밟혀 으깨진 은행 알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절망을 안으로 삭히며 넘어진 벼 포기를 일으켜 세워야 할 농부들, 낙과 피해를 입고 한숨짓는 농부들의 퀭한 눈망울이 떠올랐습니다. 고통과 시련은 왜 죄를 덜 짓고 사는 사람들에게 자주 찾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수해를 만났으나 스스로 일어설 힘조차 없는 파키스탄 사람들, 북한 동포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곤경 속에 처해 있는 이들을 보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새 한 마리가 수렁에 빠졌는데 다리를 빼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마침내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나에게는 긴 부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부리를 수렁에 넣고 그것을 의지하여 다리를 빼냈습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리는 수렁에서 빠져 나왔지만 이번에는 부리가 박히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다리를 수렁에 넣고 부리를 뽑아냈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리가 수렁에 박혀 꼼짝을 않는데. 인간의 상황이 이와 똑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우리는 무심한 하늘을 탓합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인과관계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 이들의 탄식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편은 아마도 23편일 겁니다. 시인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시를 듣는 순간 어떤 목가적인 풍경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시는 현실을 낭만화하지 않습니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 이것이 현실입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통과해가야 하는 게 인생입니다. 실패와 시련,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 질병은 우리가 피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죽임의 문화가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입니다.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신화가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뒤처진 다수의 사람들은 열패감을 안고 살아갑니다. 우리 삶의 자리는 어느새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변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입었던 마음의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부끄러운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자꾸만 어둠 속으로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다시 본래의 물음으로 돌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까요?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과 상실감을 겪지 않도록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과 상실감이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는 우리 스스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 하나님께로 돌아가라
주전 8세기에 활동했던 호세아 선지자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피 끓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삶의 쓰라림을 모르지 않지만, 그는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길이라고 외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1)

호세아가 활동하던 당시는 한 마디로 혼란기였습니다. 권력에 눈이 어두운 군인들에 의해 쿠데타가 연이어 일어나는 정치적 혼란기였습니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인심도 각박해졌습니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그들은 뭔가에 탐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 도덕이 문란해졌습니다. 종교도 타락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바치는 한편, 다른 신들 앞에 엎드리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삶을 요구하는 토라의 가르침을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든 자기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고 약속하는 우상들에게 끌리기도 했습니다. 한번 중심이 무너지면 다른 것은 다 무너지게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의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 자기의 소유물 전체를 처분하는 상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알게 된 후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갈짓자 행보를 계속하는 까닭은 아직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중심 없이 흔들리는 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십니다. 그들이 걸어가는 길을 막기도 하십니다. 바알 신을 따라 가는 백성들을 보며 “가시나무로 그의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그 길을 찾지 못하게”(2:6) 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서 그들이 고통을 받고 공허감에 몸부림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분노보다 강렬합니다. 호세아가 경험한 하나님은 부드러움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어머니의 부드러운 사랑으로, 아내와 남편 사이의 애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파괴와 심판이 아니라 화해와 치유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당신을 찾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욕심과 죄의 유혹에 이끌려 빛 한 점 없는 깊은 어둠 속을 방황했던 우리가 몸을 돌이켜 당신께 나아오기를 주님은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 예수라는 길
그 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14:6). 얼마나 분명한 말씀입니까. 우리는 이 말을 교리적으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이 가르침이 이렇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주님은 통탄하실 겁니다. 가장 인간다운 삶,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 초대하는 말씀이 교리가 되어 다른 이들을 배제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이 가신 길은 걷지 않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과연 구원받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과연 길과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이것은 일점일획도 어김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이 삶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게 대체 무슨 소용입니까? 길은 걷기 위해 존재합니다. 주님이 앞서 가며 열어놓으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별명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동행이 됩니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의 삶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대하든지 마음을 다해 정성스럽게 만나셨습니다.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더 마음을 쓰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늘의 숨결을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설 땅이 되어주신 분’, ‘살맛을 되찾아주시는 분’.

동화작가인 권정생 선생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할 수 없이 완행열차를 탔더랍니다. 그런데 기차 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얼마 안 가 내린다며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권 선생을 자리에 앉혔습니다. 권 선생은 자리에 앉아서 무심코 아주머니께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해하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의성에 있는 시골교회의 집사님인데 한 십년 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 한 사람이 구걸을 하러 왔습니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귀찮은 생각에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를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돌아서서 나가는 뒷모습을 흘끗 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 나가 보았지만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하고 말했습니다.(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 116-7쪽) 예수를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바로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정생 선생님은 이 이야기 끝에 여태껏 들은 설교 중에도 진짜 설교를 들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은 이야기 말고, 예수를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 애써 주님을 알자
은혜는 이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거절당하고 돌아서는 거지의 모습이 왜 하필이면 예수님의 모습처럼 보였을까요?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보인 겁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마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은 그분을 알아차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심코 지나칠 것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은 먼 데 계신 분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호세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익숙한 모습으로도 다가오시지만, 때로는 아주 낯선 모습으로도 다가오십니다. 호세아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3)

우리가 주님을 향해 길을 떠나기도 전에 주님은 벌써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우리가 낙심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주로 의지합니다. 하나님보다는 돈이 힘이 셉니다. 주님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기에 “나를 사랑하는 너희의 마음은 아침 안개와 같고,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구나”(6:4) 하며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사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헤세드hesed’입니다. 이 단어는 계약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헤세드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충성스런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는 그런 사랑이 없다고 꾸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라’와 ‘하지 말라’는 율법조문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사나 찬양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6:6)

흥미로운 것은 주전 8세기에 활동한 네 명의 예언자들 모두 참된 예배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모스는 일상생활에서 정의와 의를 세우지 않는 종교는 거짓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도 거룩한 집회를 열면서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하나님이 역겨워하신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고,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라고 권합니다(사1:17).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미가도 역시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을 참된 경건이라 가르칩니다. 참된 신앙은 신조를 읊조리는 것이나 의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번역된 고백입니다. 8세기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 시대에 크게 들리는 것은 우리 시대의 종교가 타락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애써 주님을 아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강도 만난 이들 곁에 다가서야 하고, 그들의 몸을 만져야 하고, 그들을 위해 불편함과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고요한 곳에 앉아서 묵상과 기도만으로 주님을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걷기 쉬운 길이 아닙니다. 자기를 내려놓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길은 좁은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 길은 인기 없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가을의 길목에서 교우 여러분 모두가 ‘그 길’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9월 05일 12시 2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