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38. 방황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5:11-20
설교일시 2010/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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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을 허용하시는 아버지
눅15:11-20
(2010/9/1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 재산 가운데서 내게 돌아올 몫을 내게 주십시오’ 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며칠 뒤에 작은 아들은 제 것을 다 챙겨서 먼 지방으로 가서, 거기서 방탕하게 살면서, 그 재산을 낭비하였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했을 때에, 그 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어서, 그는 아주 궁핍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의 주민 가운데 한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다. 그 사람은 그를 들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좀 먹고 배를 채우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제서야 그는 제정신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 하겠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 고향상실의 시대
주님의 은총이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가을의 초입인 것 같은 데 벌써 추석 명절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북두칠성이 서쪽 하늘을 가리키는 때라 그런가요, 대추 열매에 벌써 누런 물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껏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무들도 이제는 풀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돌아감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벌써 고향으로 떠났고, 또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귀성행렬을 바라볼 때마다, 묘한 안도감을 느낍니다.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뿌리 뽑힌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고향상실’이라는 표현하곤 합니다. 지리적 공간으로서의 고향은 ‘그곳’에 있지만, 가뭇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고향은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의 주인공인 조지 웨버는 자기를 길러준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5년 만에 산골 고향의 작은 읍으로 돌아갑니다. 기차 차창으로 계곡 밑의 작은 마을들을 바라보며 남다른 감회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방황의 먼 여로를 거쳐 왔지만, 그래도 눈을 감으면 고향의 길, 거리의 집들,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향은 옛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부동산 투기와 개발의 ‘광기’가 소읍 전체를 휩쓸고 있었습니다. 부동산업자들이 설치고 다니고, 불필요한 거리와 다리가 놓이고,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고향은 이미 옛 모습을 잃고 있었습니다. 살풋한 정을 나누던 이웃들도 하나같이 다 변해버렸습니다. 웨버는 고향과 자신을 이어주던 끈이 다 끊어졌음을 느끼며 쓸쓸해합니다. 이 쓸쓸함이 바로 고향상실의 느낌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서울 신정동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의 용의자가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용의자는 범행 동기를 묻자, “나는 이렇게 비참하게 사는데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니 내 모습과 너무 비교돼 순간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대답했습니다. 강도, 강간 등의 죄목으로 14년 6개월간 징역을 살고 출소했던 그는 전과자를 보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취직의 기회는 물론 없었습니다. 막걸리 한 병을 10분 만에 마시고 걸어가는 데 3층 옥탑방에서 터져나오는 행복한 웃음소리를 듣고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하며 혀를 찹니다. 그런데 그는 그게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난 이들, 그래서 세상에 대해 분노와 적대감과 두려움을 품고 사는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떠남을 허락하다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오늘의 본문은 그 따뜻한 결말을 알기에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하면, 외로운 인생길에 지친 우리들의 마음조차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느닷없는 요구에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달라는 요구는 무례하기 이를 데 없는 청이었습니다. 통상 유산의 상속은 아버지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아들의 요구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가끔 듣습니다. 유산은 절대로 미리 나눠주면 안 된다고들 하시더군요. 주변에서 쓰라린 경험을 하는 분들을 많이 보셨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일체의 배경설명 없이 ‘그래서 아버지는 살림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라고 심드렁하게 말해버립니다. ‘그래서’라는 접속부사가 이 경우에는 왠지 슬프게 느껴집니다.

저는 가끔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아버지 됨의 어려움을 느낍니다. 아버지는 틀림없이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나는 작은 아들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었을 겁니다. 보지 않아도 삼천리지요. 재산이 주는 호기로움으로 한때는 잘 나가겠지만, 그 재산은 썰물 빠지듯 사라질 것이고, 그러면 공허감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될 것임을 아버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아들이 방황할 수 있는 여지를 허락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참 아릿하게 느껴집니다. 대가가 비록 크다 해도 아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그런 경험이 필요함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지 않은 이는 돌아올 수 없는 법입니다. 넘어지지 않은 사람은 일어설 수 없습니다. 외로움을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위로의 달콤함을 알지 못합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아들이 경험하게 될 나락 체험을 가로막지 않습니다. 아들이 겪어야 할 아픔과 상실감을 예감하며 가슴 아파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아버지와 많이 다릅니다. 아이들이 겪어내야 할 어려움이 안타까워 그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주거나, 어려움의 무풍지대 속으로 아이들을 숨기려 합니다. 그게 사랑인 줄 아는 것이지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게 아닙니다. 수요 집회에서 우리는 손성현 전도사를 통해 야누쉬 코르착(1878-1942)이라는 분에 대해 들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소아과 의사였던 그는 바르샤바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의 책임자로 일하다가, 나찌에 의해 아이들이 수용소로 끌려가자 자진하여 수용소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교육학자입니다. 그는 이런 기도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아이들에게 선한 의지를 주시고,
그들의 힘을 북돋워 주시고,
그들의 수고에 복을 내려 주십시오.
아이들을 편한 길로 인도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그렇지만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편한 길’이 아니라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달라는 그의 기도가 참 깊게 다가옵니다. 그는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1928)라는 책에서 ‘어린이의 권리’ 3가지를 언급합니다. 첫째는 어린이에게는 오늘 하루를 살 권리가 있습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유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겁니다. 둘째는 원래 자기 모습대로 있을 권리입니다. 다른 이들과의 비교 속에서 주눅 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일 겁니다. 셋째는 자기 죽음에 대한 권리입니다. 좀 당황스러운 말이지만, 이 말은 아이 스스로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도록 강요된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반어법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싶어 아이를 놀이터에도 안 내보낸다든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어 아이들을 과보호하는 것은 아이 속에 있는 자발성과 책임성을 죽이는 일입니다. 비유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방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 조화로운 사랑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하버드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의 책이 최근에 또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라는 책인데, ‘유전학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에 대한 반란’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는 유전공학의 힘을 빌어서 완벽해지려는 시도 자체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질병을 치유하거나, 유전적 이상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생명 공학 기술이, 이제는 더 완벽한 몸이나 지능을 얻게 하는 데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그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키가 비정상적으로 작은 아이들을 위해 처방되는 약이, 이미 충분한 데도 더 큰 키를 원하는 아이들을 위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운동선수들이 약물의 도움을 받아서 기록 향상을 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되겠습니다. 자식들을 유능하게 키우고 싶은 부모들이 유혹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책에서 마이클 샌델은 부모의 사랑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사랑’과 ‘변화시키는 사랑’이 그것입니다. 받아들이는 사랑은 자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아름답지만 자칫하면 아이가 자기에게 주어진 생의 가능성을 충분히 누리며 살지 못하도록 방치하기 쉽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변화시키는 사랑은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주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는 반면, 아이로 하여금 오늘을 행복하게 누리지 못하도록 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사랑은 아이에게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이를 미워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둘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하루하루 사는 일에 급급한 부모들은 받아들이는 사랑을 넘어 아이들을 방치하는 경우가 많고, 부유한 부모들은 아이들을 변화시키려는 과도한 열정 때문에 아이들을 불행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것을 샌델은 ‘과잉 양육’이라고 표현합니다. 야심에 찬 부모들은 아이들이 삶을 선물로서 누리도록 하기보다는 끊임없는 경쟁의 장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기독교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이 두 가지 사랑이 잘 조화를 이루도록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을 은총이요 선물로 인식하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한껏 살아내도록 돕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마음에 조율되어야 합니다.

• 측은히 여기시는 하나님
타지에서 방황하던 아들은 제 것이라 여겼던 모든 것이 아침 안개처럼 스러지고 나자, 비로소 자신이 허깨비에 들린 채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보기 전에는 정말 중요한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이게 인간의 우매함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 주린 채를 채우던 그는, 실존의 바닥에 당도하고야 제정신을 차립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내쫓기는 한이 있더라도, 매질을 당하더라도 아버지에게 가야 했습니다. 그는 어떤 인력에 끌리듯 아버지의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갑니다. 그 돌아섬을 우리는 메타노이아 곧 회개라 합니다. 받아주시든 내치시든 아버지께 돌아가 해야 할 말이 있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말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아직 먼 거리에 있는데 아버지는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여기서 ‘측은히 여기다’(splanchnizomai)라는 단어는 아주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의 뿌리에는 ‘창자’라는 단어가 있는데, 고대인들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이 창자에 머문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순간 아버지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 것입니다. 그 아픔은 이미 도덕적 판단을 초월합니다. 아픔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아픔은 즉각적입니다. 아버지는 달려 나가 아들을 부둥켜안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부둥켜안음을 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아들의 아픔은 아버지에게 전달되었고,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닥에는 고마움이 있었습니다. 살아 있어 고맙고, 받아들여줘 고맙고….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육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자기 생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과, 실패든 성공이든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 안아주는 넉넉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변화시키는 사랑’의 밑바탕에는 ‘받아들이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 때 아름답습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제각각이고 성격과 재능이 제각각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라는 명령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제멋대로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폭력이요 하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성숙한 영혼의 길에 접어들었다 할 수 있습니다.

방황할 여지를 허락하시는 아버지는 또한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자식을 사랑으로 부둥켜안는 분이기도 했습니다. 일본 작가인 엔도 슈사꾸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뜨거운 어떤 덩어리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탕자처럼 먼 길을 방황하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요, 영혼의 닻입니다. 그 고향에 당도한 사람이라야 누군가의 고향이 될 수 있습니다. 돌아감의 계절인 지금 여러분 모두 아버지의 집을 향해 길을 떠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09월 19일 11시 58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