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3. 작은 불꽃 하나가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12:49-50
설교일시 201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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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꽃 하나가
눅12:49-50
(2010/10/24)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 부담이 되는 주의 말씀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흘러갑니다. 금년 초에 저는 여러분에게 올해는 성경을 최소한 한 번 이상 읽어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잘 진행이 되고 있는지요?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세속의 물결에 떠내려가기 쉬운 우리 마음을 주님의 뜻에 비끄러매는 일이기도 합니다. 수련목 과정을 하고 있는 이성운 전도사가 자격시험을 보러갔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심사위원 중의 한 분이 “성경은 몇 번이나 읽었나?” 하고 물었습니다. 이 전도사가 “마흔 번쯤 읽는 것 같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돌연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밝아졌습니다. 그러더니 다른 것은 묻지도 않고 열심히 하라며 격려해주더랍니다. 성경만 많이 읽으면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일까요?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성경을 읽다보면 당혹스런 말씀을 만날 때가 많습니다. 성서 인물들의 비윤리적인 행태나 비굴한 처신도 보게 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듯한 장면들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우리들을 당혹시키는 것은 전쟁에 나가 다른 부족들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신학자들은 그것을 ‘진멸사상’이라는 아리송한 말로 설명합니다만, 그래도 생명을 내신 하나님이 다른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것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부추기는 것처럼 보여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대목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단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아직 어렸을 때’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고대인들의 인식이 아직 깊지 않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적들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전쟁을 벌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벌 주시는 분, 폭력을 부추기는 분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도우시는 친숙한 하나님, 곧 ‘아빠 아버지’ 앞에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잔치를 베풀며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과 비를 고루 나눠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욕망에 따라 하나님의 얼굴에 색깔을 입힙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런 믿음을 나무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남을 배제하고 무시하는 근거로 활용된다면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올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릅니다. ‘우리’ 속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 뿐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 심지어는 적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읽으면 우리 마음에 드리운 욕망과 이기심과 편협함의 베일이 벗겨져 현실을 바로 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목에 걸린 가시처럼 우리를 괴롭혀 애써 외면하고 싶어지는 말씀도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과 그 이하에 나오는 대목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 심판의 불, 정화의 불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렇지 않다. 도리어,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그러면서 나로 인해 가족들 사이에 불화가 빚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많은 적대자들에게 기독교를 비난하거나 박해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가족적 가치를 중히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말씀은 부담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안온한 일상에 던져진 폭탄입니다. 주님은 ‘좋은 게 좋은’ 삶을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옳은 게 좋은’ 삶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옳음’을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끼리끼리’ 혹은 ‘우리가 남이가(?)’입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좀 더 끌리고 마음이 가는 것은 人之常情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의를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원칙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향해 세상은 융통성이 없다든지 차갑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칙이 무너져 세상은 예측 불가능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 불을 던지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에게 불은 언제나 심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왕국 또는 샬롬의 세상이 도래하려면 그 이전에 큰 심판이 반드시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옛 세계의 터 위에 세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도구는 ‘칼’ 혹은 ‘불’입니다. 이런 생각을 반영한 때문일까요? 누가는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하고, 마태는 ‘칼’을 주려고 왔다고 전합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과 갱신을 전하는 묵시문학에서는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이 땅에 닥쳐올 재난의 결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정의 분열을 들고 있습니다. 가정이 분열되고 파괴되는 것은 세상의 끝장이 이르렀다는 징표라는 것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미가는 미구에 닥쳐올 심판날의 재난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사람일 것이다.”(7:6)

마태나 누가도 미가와 동일한 묵시묵학의 전통 속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새 세계가 도래하기 전에 가정이 분열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옛 세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새 세계를 맞아들이는 사람 앞에 놓여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반대하시는 것은 가족 제도가 아니라, 가정이 옳은 결단의 장애가 되는 현실입니다.

주님은 옛 세계를 사르는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주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불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입고 있는 거짓과 위선과 비정의 누더기를 태워 우리로 하여금 참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정화의 불로 오셨습니다. 관용과 사랑이라는 말로 어둠의 세력을 편들던 우리의 비겁을 태우는 불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풍요의 환상을 좇아가는 이들의 욕심을 소멸시키는 불로 오셨습니다. 힘과 능력이 숭상되면서 사랑과 섬김의 가치를 소홀히 여기는 이 세상의 전도된 생각을 사르는 불로 오셨습니다.

• 수직으로 일어서는 불꽃
주님은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이었습니다. 홀로 어두운 방안에 앉아 촛불을 밝혀본 적이 있으십니까? 촛불이 있는 방은 아늑합니다. 때로는 매혹적이고 심지어는 성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바슐라르라는 프랑스의 철학자는 촛불에 매료당해서 <<촛불의 미학>>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촛불은 수직으로 상승하기 위해 혼자 탄다고 말합니다. 매우 미세한 바람이나 입김에도 불꽃이 흐트러지긴 하지만 촛불은 곧 바로 다시 일어납니다. 그는 촛불의 집요한 수직에의 본능은 차라리 거룩해 보인다고 말합니다. 촛불을 말할 때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발하는 대목이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렁이면서도 기어코 몸을 바로 세우는 촛불의 수직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우심은 하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의식을 곧추세운 데서 비롯됩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 주님이 행하신 일들은 모두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이었습니다.

우리 속에도 촛불과도 같이 수직을 향한, 하늘을 향한 열망이 있다면 우리 삶은 한결 가벼워질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일렀습니다. 특별한 장소에 머물며 어떤 말을 하는 것이 기도라면 이것은 불가능한 요구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하건 말없이 하나님과 소통하는 가운데 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약자들이지만 사랑이신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에는 그 사랑에 휩싸인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일상의 모든 순간에 연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일상이 제아무리 분주해도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우리 삶속으로 모시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을 열어 시원한 공기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서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미국의 영성가이며 노동운동가인 도로시 데이는 분주한 가운데도 일상의 한 부분을 잘라내 하나님 앞에 서는 까닭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마른 샘이 되지 않으려면 나 역시 이처럼 달디단 샘물을 마셔야 한다”(<<고백, 461쪽).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해 타오르는 불꽃이 없다면 우리는 흙덩이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레위기6장에 나오는 말씀을 좋아합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번제를 드리는 규례는 다음과 같다. 번제물은 밤이 새도록 곧 아침이 될 때까지 제단의 석쇠 위에 있어야 하고, 제단 위의 불은 계속 타고 있어야 한다.”(6:8-9)

제단의 불이 계속 타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 혹은 우리 교회가 사는 길은 하나님을 향한 불꽃이 계속해서 타오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카베오 하권에는 이 불과 관련해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페르시아로 끌려갈 때, 당시의 경건한 사제들이 몰래 제단의 불을 가져다가 물 없는 저수 동굴 깊숙한 곳에 감추어 놓고, 아무도 그곳을 알아내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 몸이 되자 느헤미야가 그 불을 감추어 둔 사제들의 후손들에게 그 불을 가져오라고 일렀습니다. 사제들이 그곳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불이 있던 자리에 짙은 색 액체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느헤미야는 그 물을 떠오라 지시했습니다. 희생 제물을 바칠 준비가 되자, 느헤미야는 사제들에게 나무와 그 위에 놓인 것에 그 액체를 뿌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대로 한 다음에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구름에 가렸던 해가 나왔습니다. 그 순간 제단에는 큰 불이 일었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박해의 시기에도 그 불은 변형된 모습으로라도 간직되었던 것입니다.

• 너는 햇살
예수님의 가슴에 지펴진 하늘의 불꽃은 제자들의 가슴으로 옮겨붙었고, 그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불꽃은 또 다른 이들의 가슴에서도 타올랐습니다. 잠시 액체 상태로 변해 불꽃이 보이지 않는 시기도 있었지만 그 불길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바야흐로 그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 우리 가슴에서 그 불꽃이 사위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Kurt Kaiser의 복음성가 <전하세>가 떠오릅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곧 주위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주님의 사랑 이같이 한번 경험하면
그의 사랑 모두에게 전하고 싶으리
산 위에 올라가서 이 복음 외치며
내게 임한 그의 사랑 전하기 원하네

우리 속에 있는 불꽃이 여전히 싱싱하다면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의 온기를 전하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불꽃이 여전히 일렁이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이 어둡다고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빛이 더욱 영롱한 것처럼, 우리 속에서 주님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일깨우는 빛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저는 우리 교우로부터 잘 아는 동료 한 사람이 자살했다는 우울한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도무지 그럴 것 같지 않던 사람이기에 주변 사람들이 겪는 정서적 충격은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사는 일이 점점 힘겨워지는 세상입니다. 삶의 힘겨움을 견뎌내는 힘보다 죽음의 유혹이 더욱 커지는 세상입니다. 이때야말로 주님의 불꽃이 우리의 가슴에 재점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낙심되는 일이 있어도, 일상의 짐이 제아무리 무거워도, 우리 속에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우리는 견뎌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역사의 격동기인 70, 80년대를 살아가던 젊은이들은 이런 노래를 부르며 울울한 마음을 떨쳐냈습니다.

너는 햇살 햇살이었다/산다는 일 고달프고 답답해도
네가 있는 곳 찬란하게 빛나고/네가 가는 길 환하게 밝았다

너는 불꽃 불꽃이었다/갈수록 어두운 세월
스러지는 불길에 새불 부르고/언덕에 온고을에 불을 질렀다

신경림 시인의 시 <햇살>에 곡을 부친 이 노래는 그 시대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따뜻한 위안이었습니다. 이 노래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 자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암담한 세월이라 해도, 말세의 끝이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라 해도 우리가 있는 곳이 찬란하게 빛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갈수록 어두운 세월이지만 스러지는 희망의 불길에 새 불 지르는 예수님의 불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탄식 소리가 들려옵니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이 가을에 우리의 가슴에도 설악산의 단풍보다 더 밝은 그리스도의 불꽃이 타오르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10월 24일 12시 08분 4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