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46. 불굴의 신앙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5:1-5
설교일시 2010/11/14
오디오파일 s20101114.mp3 [11789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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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신앙
롬5:1-5
(2010/11/14)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 안에 핀 꽃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일산 동녘교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가끔 흩어지는 예배 주간에 우리 교회를 방문한 이들은 있었지만, 교인 전체가 예배에 동참한 것은 처음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는 개 교회를 넘어 공교회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0월 마지막 주는 종교개혁기념주일이었고, 지난 주는 우리 교회의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말테 리노 목사님을 통해 루터 신학의 핵심인 믿음에 대해 배울 수 있었고, 주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내용인 기쁨과 감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오늘 저는 로마서 5장을 중심으로 해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를 가리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옛 삶의 관성에서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인식한 것은 물론 우리의 죄책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리 마음에 생긴 후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 인식은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우리의 죄와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듯 주님도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평화입니다. 바울은 이런 놀라운 변화를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롬5:20b)는 말로 요약합니다.

성도는 은혜의 자리에 들어온 이들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문 밖 어두운 데서 떠돌지 않아도 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는 쭈뼛거리며 서성이는 둘째 아들을 향해 달려 나갔고 그를 향해 모든 문이 열려졌습니다. 그는 집을 떠났지만 아버지는 한 번도 그를 외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돌아온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성대한 잔치를 베풉니다. 이처럼 값없이 받아들여짐을 경험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새 봄의 온기가 솟구치기 시작합니다. 그들 속에 있는 잠들어 있던 아름답고 소중한 성품의 씨앗이 싹트고,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마침내 열매도 맺게 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 프란체스코>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겨울에 아몬드나무에 꽃이 만발하자 주변의 모든 나무들이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허영이람’ 하고 흉을 봤습니다. ‘저렇게 교만할 수가! 생각해 봐, 저 나무는 저렇게 해서 자기가 봄이 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지!’ 아몬드나무 꽃들은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말했습니다. ‘용서하세요, 자매님들, 맹세코 나는 꽃을 피우고 싶지 않았지만 갑자기 내 가슴속에 따뜻한 봄바람을 느꼈어요.'”(<성자 프란체스코1>, 265쪽)

어느 분은 믿음을 일러 ‘안에 핀 꽃’이라 하더군요.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 다른 세상을 보다
은혜의 자리에 들어간 이들은 이제 세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선이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고, 뒤쳐지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해야 했습니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이들을 보면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참 한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은혜 안에 들어가고 보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이 사실은 아주 작고 부질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신작로를 걷다보면 저만치에 반짝이는 것이 있어 누가 먼저 주울세라 달려가 보면 사금파리에 지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것도 잠시 동안의 행복은 줍니다. 하지만 사금파리를 빛나게 했던 것은 태양이었습니다. 은혜의 세계는 이와 같습니다.

히브리말로 시간과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올람 olam’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파생된 ‘네엘람 ne'elam’이라는 단어는 ‘숨겨진, 감춰진’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흔적이 숨겨져 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러면 대지에서 피어나는 풀꽃 하나, 졸졸 흐르는 시냇물, 하늘을 나는 새, 어느 것 하나 무심히 바라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들꽃 속에 깃든 하나님의 생명의 신비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데,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니 삶은 빈곤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것을 인상깊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세계테마기행> 카메라에 잡힌 이집트의 한 가난한 어부는 지금 자기 생활이 아주 만족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수입이라고는 홍해에서 건져 올리는 물고기 몇 마리를 팔아 얻는 게 전부입니다. 자기가 공부를 아주 많이 했어도 지금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을 거라는 그에게 한국에서 간 리포터는 몇 번씩이나 물었습니다. “정말 더 바라는 것 없으세요?” 그의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없어요”. 물론 이런 대답은 삶의 속도가 느리고, 누군가와 경쟁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곳에 사는 사람이기에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우리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한번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뭔가에 홀려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믿음의 눈이 열리고,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의 사람들이 품게 되는 꿈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영원한 삶을 이르는 말일 겁니다. 하지만 영원한 삶은 죽음 이후에 누리게 될 삶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지금 여기에 살면서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영생의 문지방을 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상 앞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는 문제가 고린도교회 분열의 단초가 되었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들에게 준엄하게 이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전10:31) 여기서 질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이미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추구하십시오”(고전10:24). 누군가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사람인지는 그가 남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인지를 보면 됩니다.

• 불굴의 사람
바울 사도는 예수와 만나 누리게 된 그 기쁨과 자유를 모든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중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에서 그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는 돌에 맞을 위기를 넘겼습니다.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을 고쳐주었던 루스드라에서는 군중들이 던진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감옥에 갇혔고, 아테네에서는 조롱을 당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재판정에 끌려가고 테러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늘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thlipsis)을 자랑합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10-11)고 하셨습니다.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익과 관계되지 않는 일에 몸을 바쳐본 사람은 고난이 주는 유익을 압니다. 어려움과 곤란은 피하려는 이에게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떳떳하게 살기 위해 고난을 받아들이기로 작정하면 우리 삶을 붙들고 있던 두려움의 그림자는 사라지고, 영혼은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환난은 우리 내면에 인내력(hypomone)을 낳아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굳게 서서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검질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인내심의 뿌리는 사랑에 맞닿아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13:7). 불꽃처럼 타오를 때 사랑은 찬란하지만, 오래 참을 때 사랑은 성스럽습니다. 연인의 사랑보다 어머니의 사랑에 더욱 감동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dokimos)을 낳습니다. 이 말은 사랑 가운데서 오래 참는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확증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같은 신앙의 경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시다.”(벧전1:7)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살아가는 보다 아름다운 소망이 또 있을까요? 사람들의 평가나 여론에 전전긍긍하지 않고, 외적인 강요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영혼의 든든함, 이보다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요? 이런 자유로움, 이런 든든함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든든히 매일 때 비로소 누릴 수 있습니다. 장자 양생주 편에 보면 ‘제지현해帝之縣解’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느 분이 그것을 ‘하나님께 매인 해방’이라고 풀었더군요.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바칠 때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큰 바람이 불어 일렁이는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신 사건을 잘 압니다. 그 이야기에서 바람을 뜻하는 단어 ‘anemos’는 ‘풍조’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풍조는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그것이 물질주의 풍조이든 쾌락주의의 풍조이든, 권력의 미친 바람이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오시면 그 바람을 잠재워주실 수 있습니다. 이 희망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
이 희망은 노력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원천에 잇대어 있을 때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비밀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며칠 전 호스피스 활동을 하는 수녀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분들을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종교가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스님의 부탁으로 불교신자 한 분을 찾아갔더랍니다. 자기가 찾아가도 마음을 열지 않으니 좀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그 환자는 자기는 불교신자이니 찾아오지 말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신자가 아니라도 당신이 많이 아프니 도와주고 싶다고 하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다시 찾아갔더니 그는 말없이 돌아누웠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기도만 하고 돌아오기를 몇 차례 반복했습니다. 어느 날 그 환자는 느닷없이 “대체 나는 하나님도 믿지 않는데 왜 자꾸 오는 거요?” 하고 역정을 냈습니다. 수녀님은 그래도 그게 대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조성민(가명) 님은 잘 모르시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형제님을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사랑을 전해 드리고 싶어 찾아옵니다.”

그 말에 뜻밖에도 그의 표정이 변했습니다. 그러고는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까요?”하고 물었습니다. “당연하죠. 하나님은 형제님의 고통을 보고 마음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랑의 마음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대화 후에 두 사람은 많이 친해졌습니다. 그가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있을 때도 방문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마음에서 원망과 미움이 사라졌고, 가족 간의 갈등도 사라졌습니다. 수녀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그 말 한마디가 그를 그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그 말을 전한 나 자신도 믿기 어려운 변화였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마리아의작은자매회 지음, <<죽이는 수녀들 이야기>>, 휴, 2010, 92-95쪽)

그 수녀님을 통해 잃어버렸던 사랑의 물 근원과 연결되자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사랑이 삶을 활기차게 만듭니다. 그 근원적인 사랑을 맛보았기에 예수님은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는 제도와 싸울 수 있었고, 환난도 견디어 낼 수 있었습니다. 샘은 자꾸 퍼낼 때 새로운 물이 고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자꾸만 그 사랑을 누군가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가 되었건, 불의한 세상에 의해 살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이건, 세상에는 사랑에 목말라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설 때 우리 사랑의 능력은 커질 것이고, 세상은 따뜻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초겨울에 우리 가슴에 지펴진 사랑의 불씨를 세상에 전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11월 14일 12시 01분 5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