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0. 말씀의 맛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계 10:8-11
설교일시 201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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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맛
계10:8-11
(2010/12/12)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 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 수직의 중심
대림절 셋째 주일 아침,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기를 빕니다. 교회는 아주 오랫동안 대림절 셋째 주일에 핑크색 초에 불을 붙임으로 오시는 주님에 대한 감사와 설렘과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상당히 착잡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마치 데자뷰(dejavu)처럼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활극에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플라톤의 <<국가 정체>>에 나오는 인물)의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새해 예산안은 심의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통과되었고, 힘 있는 국회의원들은 그 와중에도 자기 지역구에 막대한 돈을 끌어가는 기민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우리는 맥이 빠집니다.

지난 주간에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성의 등불을 밝혔던 리영희 선생님입니다. 어려웠던 시기에 자신의 몸을 던져 세상을 밝혔던 이들이 한 분 두 분 우리 곁을 떠나고 계십니다. 왠지 외롭고 서럽습니다. 정신의 지친을 잃은 듯한 느낌 때문일 겁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대설을 지나 동지를 향하는 지금이야말로 어둠이 가장 지극할 때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빛나는 새벽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더욱 간절히 기다립니다. ‘마라나다’, ‘오십시오, 주 예수님’.

12월 둘째 주일인 오늘은 성서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연말이 되어 느슨해진 우리 마음을 가다듬어 삶의 근본을 되찾으라는 하늘의 부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교우 여러분들께 올해는 적어도 신구약 성경을 일독이라도 해보자고 여러 차례 부탁을 드렸습니다. 평생을 교회에 드나들면서도 성경이 우리에게 열어 보이는 그 광대한 세계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삼시 세 때 밥은 꼬박꼬박 챙겨먹으면서도 우리는 성경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없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마음일 겁니다. 성경을 뜻하는 영어 단어 ‘bible’은 원래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앞에 ‘holy’라는 단어를 붙여 성경을 다른 책과 구분하려 했습니다. 성경이 거룩한 책인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고요히 말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때 흐트러졌던 우리 마음은 가지런해지고, 욕망은 순화되고,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은 물러갑니다. ‘성경’이라 할 때의 ‘경經’자는 피륙이나 돗자리를 짤 때 바디에 걸린 ‘날실’을 뜻합니다. 가지런하게 걸린 날실을 중심으로 하여 씨실을 엮어 짤 때 피륙이나 돗자리가 완성됩니다. 삶도 그러합니다. 수직의 중심이 바로 서지 않는 한 우리 삶은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삶에 수직의 중심을 부여해줍니다. 성경을 길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웬만한 위기가 닥쳐와도 넘어지거나 세파에 떠밀려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닻과 같기 때문입니다.

• 말씀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
실의에 잠긴 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는 낯선 동행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음식을 함께 나눕니다. 나그네가 빵을 들어 축사하고 그것을 떼어 주자 그들은 나그네가 바로 예수님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 신비한 경험 끝에 그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눅24:32)

예수님은 말씀을 깨닫게 하는 영으로 그들 가운데 현존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동안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곤 했습니다. 이런 경험이 오늘에는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닫힌 문 앞에서는 주님도 별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강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주님의 뜻을 영접하려는 이들에게 말씀은 강렬한 힘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칼보다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히4:12)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청하는 사람들, 즉 혼신의 힘으로 그 뜻을 받들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듣고 계십니까? 혹시 T.V 쇼를 보는 것처럼 듣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선포되는 말씀이 여러분의 속을 꿰뚫고 갈라놓기는커녕, 여러분이 말씀을 난도질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기독교가 이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된 것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외심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니 말씀이 삶으로 번역되는 일도 없습니다.

랍비들은 성경을 미크라(miqra)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행동하라는 요구’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뭔가를 하도록 요구합니다. 작은 나로부터 벗어나 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따뜻한 세상, 더 정의로운 세상, 더 친절한 세상, 더 깊은 공감의 세상을 이루자며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 초대에 응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 말씀을 받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말씀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지금 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구름에 싸인 채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를 보았습니다. 그 머리에는 무지개가 둘려 있었고, 얼굴은 해와 같았고, 발은 불기둥과 같았습니다. 초현실적인 모습입니다. 천사의 오른발은 바다를, 그리고 왼발은 땅을 딛고 서 있었습니다. 그는 마치 사자가 울부짖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그의 소리에 일곱 천둥도 응답했습니다. 장대한 광경입니다.

천사는 이제 마지막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마지막 때'는 역사의 파국으로서의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과 증오와 파괴가 지배하는 옛 세계의 종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8)

하나님의 말씀은 저절로 우리에게 오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진 분 앞에 가야 합니다. 말씀은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발로 듣고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과 만나려면 두렵고 떨림으로 다가가는 의지적 행위가 필요합니다. 큰 스승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가는 학인처럼, 말씀은 사모하는 이에게만 들려집니다. 요한은 초현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 천사에게 다가가 그 두루마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천사는 말씀과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우쳐줍니다.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9)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귀로만 듣는 것은 마치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만 보고 나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씀을 맛보고, 향기를 음미하고, 잘 소화시킬 때 말씀은 우리의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말씀과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 사람일 수 없습니다. 말씀은 변혁시키는 힘입니다. 말씀을 받아먹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입니다.

• 말씀을 먹다
그런데 말씀의 맛은 어떠합니까?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씁니다. 입에 달다는 말은 성현의 말씀이 그러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지를 가리켜 보인다는 말일 겁니다. 말씀과 처음 만날 때 우리는 맞장구를 칩니다. 옳습니다. 지당합니다. 가끔 납득하기 어려운 말씀도 있지만 대개는 달콤합니다. 왠지 그 말씀을 만난 덕분에 우리의 품격이 다소 높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소화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고 살았던 지난날의 삶과 작별해야 합니다. 더 이상 ‘나 좋을대로만’ 살 수 없습니다. ‘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너’를 살리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쓴 맛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양약입니다.

몇 해 전 저희 교회에 와서 당신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한완상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1980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눈엣가시같은 사람들을 붙잡아 중앙정보부에 가뒀습니다. 한완상 선생님도 그곳에 잡혀갔습니다. 중정의 지하실은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라는 신분 때문인지 그들은 한완상 선생을 고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옆방에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목사님 한 분이 붙잡혀왔습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고문으로 그분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어렵사리 구한 신약성경을 붙들고 그 암담한 시간을 버티던 한완상 선생은 문득 성경을 그 목사님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복음서 부분과 나머지 부분을 분리해서 서신 부분은 자신이 간직하고, 복음서는 간수를 통해 목사님께 전했습니다. 그런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음 날부터 옆방에서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그 얼굴빛이 점점 환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완상 선생님은 그 이야기 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예수가 들어가니까 살아난 겁니다.” 성경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조금도 바꿔주지 못했지만, 그들의 마음과 자세를 바꿔 놓았던 것입니다.

카프카는 책을 읽는 행위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책을 읽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나지 않는다면, 그 책을 왜 읽는단 말인가?…책이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쪼개는 도끼가 되어야 하네.” 좋은 책이 그러할진대 하나님의 말씀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 엄혹했던 시기, 창살 안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얼어붙은 바다를 쪼개는 도끼였습니다.

• 말씀을 선포하다
달콤쌉싸름한 말씀과 만난 사람은 그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닥쳐올 재난이 뻔히 보이는 데도 경고의 나팔을 울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바른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환영받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전하다가 지쳤습니다. 말끝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자 사람들은 그를 대놓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이제 다시는 주님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결심해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렘20:9)

이것이 말씀을 받은 자의 운명입니다. 천사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대해서 예언을 해야 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꾸짖고 닥쳐올 파멸을 예고해야 합니다.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눈 속에 갇혀 얼어 죽어가는 사람은 포근한 꿈을 꾼다고 합니다. 포근한 잠에 빠진 그를 깨우면 그는 고통스런 현실과 대면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은 인간의 벌거벗은 욕망이 충돌하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배려와 사랑을 이 세상에 끌어들여야 합니다. 현실은 암담합니다. 최근에 벌어지는 일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성경을 뒤적이던 내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보내주셨습니다.

“노여움을 버려라. 격분을 가라앉혀라. 안달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자신에게 해로울 뿐이다. 악한 자들은 언젠가는 뿌리째 뽑히고야 말겠지만,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반드시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시37:8-9)

교우 여러분,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영롱하게 빛납니다. 현실에 낙심하지 말고, 스스로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밝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헌신하십시오. 주님은 지금 우리들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주님이 오실 통로가 되기를 마음 깊이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우리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12월 12일 12시 07분 1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