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1. 참 멋지신 예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2:1-8
설교일시 2010/12/19
오디오파일 s20101219.mp3 [12642 KBytes]
목록

참 멋지신 예수
요2:1-8
(2010/12/19)

[사흘째 되는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지니,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말하기를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였다. 예수께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그것이 나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직도 내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가 일꾼들에게 이르기를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하였다. 그런데 유대 사람의 정결 예법을 따라, 거기에는 돌로 만든 물항아리 여섯이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물 두세 동이들이 항아리였다. 예수께서 일꾼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그래서 그들은 항아리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떠서, 잔치를 맡은 이에게 가져다 주어라” 하시니, 그들이 그대로 하였다.]

• 소명
대림절 네 번째 초에 불을 밝히고 우리는 주님 앞에 모였습니다. 빛으로 오시는 주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오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여러분의 가슴에는 어떤 사건이 벌어집니까? 그 이름이 호명되는 데도 우리 속에 아무런 울림도 없다면 우리는 예수와 무관한 이들입니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많은 이름 중에 특별히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 이름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맑아지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리 속에 흐뭇한 기운이 번져가는 이름이 있습니까? 요즘 저는 ‘예수’라는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죄송한 생각이 들어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류가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꽃이신 주님의 이름이 부정적으로 호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젊은 시절, 예수라는 분에게 매혹 당해 ‘그 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의 길을 나의 길로 삼고 살겠다는 장한 결심 때문에 저는 신학교에 갈 때 매우 비장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도 예물과 가구를 준비하려는 신부를 만류하며,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목회자의 살림살이는 단출해야 한다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그 길을 설명하는 사람이 된 것만 같습니다. 저는 예수가 좋아 예수에게 미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예수의 길에서 일쑤 벗어나곤 합니다. 약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자애롭고, 강자들 앞에서는 당당하셨던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아 답답합니다.

2년 전 어느 날 소설가 이승우 선생은 제게 신간 도서 <<소설을 살다>>라는 책 한 권을 우편으로 보내왔습니다. 책의 속표지에는 “소설로 인생에 복무하라고 충고해 준 김기석 목사님께, 고마움과 함께-!”라는 서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서명을 보는 순간 여러 해 전 워커힐 앞에 있던 그의 집필실에서 함께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저는 인생을 살아가는 세 가지 방법에 대해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좋아하는 일, 곧 가슴 뛰는 일을 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럴 형편이 안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안 된다면 그 일로 인생에 복무한다고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소설가이니 암담한 순간에도 소설로 복무한다고 생각으로 글을 쓰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셋 중 어느 쪽에 속합니까?

바람의 딸을 자처하는 한비야 씨는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애썼다’는 말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자신을 하나님의 몽당연필이라고 말하면서 우리 모두 잠시 동안 그분의 일을 하다가 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이 사모하는 말 한 마디는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칭찬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은 보내신 분의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일까요?

기다림의 절기인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통해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2장은 예수님의 삶을 요약하는 두 가지 상징적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 가셨다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전혀 연관이 없는 것 같은 사건이지만 이 두 사건은 내적으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유대인의 혼인
먼저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벌어진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뜬금없이 ‘사흘째 되는 날에’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어느 날부터 사흘째란 말인가요?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신지 사흘째라는 말일까요? 복음서 기자는 전후 사정을 다 생략하고는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에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도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고 말하더니 다짜고짜 그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한달음에 말해 버립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경쾌하지만 여기서 잠시 뜸을 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이들은 대개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변화의 사건에 주목합니다. 물론 남의 딱한 처지를 차마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따뜻함과 영문도 모르면서 항아리에 물을 채웠던 하인들의 순종에 주목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본문에서 생략된 부분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신 후 첫 번째로 찾으신 집이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집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전도자 코헬렛은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전7:2),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다”(전7:4)고 말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보자면 예수님은 지금 출발을 좀 잘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알고 나면 좀 생각이 달라집니다. 유대인이 결혼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칩니다. 저도 복음서 기자처럼 다 생략하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하기로 계약이 성립되면 남자는 포도주를 따라 여자에게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나의 아내로 맞고 싶습니다. 이 포도주를 당신에게 따라 줌으로써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당신도 이 잔을 받아 마심으로 나의 아내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감동적인 프로포즈입니다. 그런 후 신랑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지난 후, 신랑은 신부 집으로 아내를 데려 옵니다. 결혼하는 날, 두 사람은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함 받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는 뜻으로 금식을 합니다. 그래서 결혼식 날을 유대인들은 개인의 대속죄일(private Yom Kippur)이라고 부릅니다. 결혼식 절차를 다 마친 후, 신랑 신부는 ‘하나’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준비된 신방으로 들어갑니다. 의식이 끝나면 신랑은 문을 열고 나와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때부터 결혼식 잔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혼인 잔치는 보통 이레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 잔치를 위해 신랑의 가족들은 아주 오랫동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음식이 떨어져 흥이 깨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처럼 고기도 먹고 포도주도 마십니다. 포도를 생산하면서도 포도주를 마실 형편이 못되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 날이야말로 자기 생일입니다.

결혼 의례에 꼭 포함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헌신입니다. 그것은 신랑이 신부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하는 말 속에 담겨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칩니다. 둘째는 결단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옛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뜻으로 금식을 합니다. 셋째는 하나됨의 의식입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신 주님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넷째는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잔치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이 공생애의 시작을 혼인 잔칫집에서 하신 것은 참 적절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네 가지 과정 전체가 예수님의 사역과도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 만남과 맛남
예수님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치러야 할 의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례 중 하나인 혼인 잔치에 손님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보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신방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환호성이 터졌을 것이고, 사람들은 흔감한 마음으로 음식과 포도주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자리에 노래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흥이 나서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노래에 춤이 빠질 수 없겠지요. 어깨동무를 한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그 흥겨운 자리에서 예수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을까요? 그들의 행태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계셨을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려 흉허물 없이 먹고 마시고, 한껏 유쾌해지셔서 노래를 함께 부르고, 옆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저는 바로 이런 예수님像을 잃어버린 것이 교회의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입니다. 주님이 유난히 술과 음식을 밝히셨다고 유추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별명은 오히려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들의 눈에는 ‘아랫것들’(?)과 무람없이 어울리는 예수가 곱게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곁에 친밀하게 다가서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잔치의 한 부분이 되어 유쾌한 기분을 즐기고 계시던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주님은 잠시 동안 망설이지만 곧 일꾼들에게 항아리마다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시고는, 이어 그것을 떠다가 잔치 맡은 이에게 주라고 말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줄 알고 난감해하던 잔치 맡은 이는 갑자기 등장한 포도주에 놀랐고 또 그 맛에 놀랐습니다.

이야기의 도입이 느닷없었던 것처럼 이야기의 마무리도 느닷없습니다. 그 후의 소식이 궁금한 독자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요한은 “예수께서 이 첫 번 표징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니, 그의 제자들이 그를 믿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너무 잔치 분위기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이 사건이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표징(archen ton semeion)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징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주는 상징입니다. 첫 번째라고 번역된 단어 ‘아르케’는 ‘시작’이라는 뜻도 있지만 ‘기원’ 혹은 ‘근본’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가나의 이적은 첫 번째 이적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분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보여주는 ‘기원’으로서의 사건이라는 뜻으로도 새길 수 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이야기의 의미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삶은 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은 우리를 죄의식에 사로잡히도록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목록 앞에서 전전긍긍하도록 만드는 신앙이 아닙니다. 처벌의 두려움이나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 오늘을 누리지 못하도록 하는 울적한 종교는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은 삶의 맛을 되찾게 됩니다.

• 빅 브라더 혹은 아빠 아버지
이제 잠시 요한복음 2장이 전하고 있는 다른 한 사건을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유월절 무렵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떤 격분에 사로잡히셨던지 예수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사람들을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돈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상도 둘러 엎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격정에 놀랍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이 이런 난폭해 보이는 행동을 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대체 예수님을 격분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상인들과 결탁해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종교 권력이었을 것입니다.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종교 권력자들은 죄에는 언제나 형벌이 따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가르치는 하나님은 우리 잘못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야 했고, 그 일을 대행하는 것은 제사장 계급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죄책이 커지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그들의 입지는 더욱 든든해집니다. 어떤 분은 ‘죄’와 ‘형벌’이라는 도식을 통해 사람들을 옭죄고,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제 배를 불리는 종교인들의 행태를 가리켜 ‘Sin management’, 즉 ‘죄 경영’이라 했습니다. 그런 성전 체제를 향해 주님은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은 빅 브라더(Big Brother) 하나님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 요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과 허물까지도 받아 안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 중요한 것은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서 벌어지는 내적인 변화였습니다. 예배에 출석하고, 헌금 생활 열심히 하고, 봉사하는 모임에 동참하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고 안심하면 안 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과 용서의 경험을 통해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지고, 주님의 마음과 우리 마음이 공명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에 공명된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됩니다.

며칠 전 만난 어느 목사님은 자기 교회 여선교회 회원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며 혀를 찼습니다.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싸운다면야 좋은 일이겠지만, 남을 인정하지 못하는 편협함 때문에 싸우니 문제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려는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니, 동역자들이 이래서야 되겠어요. 목사님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교회도 그래요’ 하고 말해야지요.” 그러자 다 같이 한바탕 웃었습니다. 웃음 끝에 한 목사님이 혼잣소리처럼 말했습니다. “아휴, 싸울 교인들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여러분,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 했습니다. 내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주변을 살피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얼굴에서 행복한 웃음이 피어나고, 삶이 활기차지고, 그들 속에 숨어 있던 따뜻한 마음이 솟아오른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삶을 한껏 누리며 기뻐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 삶을 축제로 바꾸어주기 위해 오고 계십니다. 복지 예산이 줄고, 우리가 복지를 즐길 때냐며 언구럭 부리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쓸쓸해진 이 세계, 포도주가 떨어진 것 같은 세계를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시인 바이런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바 있습니다. “물이 주인을 만나매/그 얼굴이 붉어졌다.” 여러분, 참 멋지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만나는 순간 우리는 포도주처럼 향기로운 사람들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이 꿈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나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0년 12월 19일 12시 06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