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54.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86:8-17
설교일시 201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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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시86:8-17
(2010/12/31, 송구영신예배)

[주님, 신들 가운데 주님과 같은 신이 어디에 또 있습니까? 주님이 하신 일을 어느 신이 하겠습니까? 주님께서 지으신 뭇 나라가 모두 와서, 주님께 경배하며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은 위대하셔서 놀라운 일을 하시니, 주님만이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내가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습니다. 주 하나님,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렵니다. 나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이 크시니, 스올의 깊은 곳에서, 주님께서 내 목숨을 건져내셨습니다. 하나님, 오만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일어나며, 난폭한 무리가 나의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주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사랑과 진실이 그지없으신 분이십니다. 내게로 얼굴을 돌려주시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님께서 거느리신 여종의 아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십시오. 은총을 베풀어 주실 징표를 보여 주십시오. 나를 미워하는 자들이 보고,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 후회 대신 칭찬을
주님의 은총이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이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춥고 어두운 이 밤에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시간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빛이 바랜 한 해를 잘 갈무리하고, 새벽빛처럼 청신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지난 한 해 어떠셨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답게 사셨습니까? 이런 돌아봄의 시간이 되면 누구도 떳떳하게 나는 잘 살았노라고 장담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일이 많고,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했던 일 또한 많기 때문입니다. 후회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속에 긍정적인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은 알고 있는 셈이니 말입니다.

부끄러움으로 한 해를 반추하다가 저는 박어진 님의 컬럼 <나를 칭찬한다>를 읽고 마음이 유쾌해졌습니다. 그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자기가 살아온 모습을 긍정적으로 요약했습니다. 그가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은 뭐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그는 먼저 건강하게 지낸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아프지 않았기에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는 하루하루 재밌게 지낸 것을 칭찬했습니다. 저렴하게 행복해지는 능력을 터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흥분할 정도로 짜릿한 일은 없었지만 일상의 웬만한 일은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시디 카세트 플레이어를 생일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하는 어머니가 있어 즐겁고, 얼큰한 짬뽕 국물을 사이에 두고 친구랑 먹는 겨울점심이 즐겁고, 통영으로 2박3일 겨울여행을 가자고 꼬드기는 친구가 있어 즐겁습니다. 게다가 그는 남을 칭찬하는 능력을 가진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결점을 다 덮고도 남을 만큼의 훌륭한 점을 한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칭찬할 때 그도 변하고 나도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또 일 년 내내 남을 축복하며 살았던 것을 칭찬했습니다. 만나는 사람, 고양이, 참새, 벚나무, 개망초에게까지도 사랑과 축복을 보내며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정말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이 송년의 시간을 후회와 아쉬움만이 아니라 감사로 돌아보아야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 가운데를 지날 때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셨고, 우리가 불 가운데를 지날 때도 주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가 지쳐 넘어진 그 자리에서 주님은 새로운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 내가 주인 삼은
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면 우리가 삶을 즐겼다고 말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인생이 본래 그런 건가요? 산 넘어 산,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습니다. 간신히 숨을 돌렸다 싶은 순간 또 다른 문제가 우리를 괴롭힙니다. 징검다리 건너듯 문제에서 문제로 건너뛰느라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되어 살기보다는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삽니다. 발이 몇 센티미터 쯤 땅에서 떨어진 것 같아 허둥거립니다. 일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는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빈 시간의 공포를 견딜 수 없어 사람들은 뭔가로 그 시간을 채웁니다. 우리는 ‘있음’보다는 ‘함’을 통해 자신을 입증하려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하기보다는 그가 하고 있는 일과 그를 동일시할 때가 많습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법조인, 고위 공무원, 교수, 대기업 사원이라 하면 우리는 꽤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지위에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값조차 함부로 매기곤 합니다.

그것을 너무 잘 알기에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될 것인지에 더 큰 관심을 갖습니다. 그들은 삶을 투쟁으로 이해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스펙을 쌓고, 남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늘 이길 수 없다는 것이고, 설사 이긴다 해도 마음이 찹찹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뱀을 부리지도 못하고 뱀에게 물리는 사람(전10:11)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런 꼴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삶을 경쟁으로 인식하는 순간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옵니다. 외로움과 쓸쓸함입니다. 다른 이들과의 사귐과 소통이 단절될 때 사람들은 그 헛헛한 마음을 채워줄 대체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대체물에 집착합니다. 명품을 사 모으는 데 온 힘을 집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돈 되는 일 혹은 출세를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알코올이나 마약이나 성에 탐닉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대의나 명분에 목숨을 걸거나, 어떤 사람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체물로 여겼던 것들이 우리 삶의 주인 노릇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돈이나 출세 혹은 쾌락의 욕망이 삶을 지배하는 순간 우리는 점점 피곤하고 각박해집니다.

한 번 주어진 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주인을 잘 모셔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86편의 시인은 자신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1)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오만한 자들이 나를 치려고 일어나며, 난폭한 무리가 나의 목숨을 노린다”(14)며, 하나님께 생명을 지켜달라고 애원합니다. 생의 어려움 앞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시를 읽다보면 그가 외로움에 찌들거나 고통에 짓눌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산다는 게 으레 그런 것 아니겠느냐는 투로 자기 생을 싹싹하고 명랑하게 살아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다른 것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신뢰를 뜻하는 ‘trust’라는 단어에는 ‘맡김’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하되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과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인생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 주님의 길을 가르치소서
새해 우리가 시인에게서 배워야 할 인생의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여쭈며 사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11)라고 기도합니다. 평범한 기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주님께 길을 묻기보다는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거나,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주님의 뜻에 조회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고 찬송하지만, 주님의 뜻이 정말 이루어질까봐 걱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길을 가르쳐 달라는 시인의 요구는 빈 말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주라고 하시면 주고, 섬기라 하시면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용서하라 하시면 용서하고, 저항하라 하시면 저항하겠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아 주님의 이름을 경외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은 이런 실천을 통해서만 입증됩니다.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남을 배려하는 삶, 다른 사람을 위하여 좋은 몫을 남겨둘 줄 아는 마음,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압제의 사슬을 풀어주는 일, 모든 사람이 저마다에게 품부된 삶을 한껏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는 일입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아라는 알을 깨고 나와 더 큰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웃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할 때 우리는 자기로부터 해방된 기쁨을 맛보게 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주님께 가르침을 청하고, 또 그 가르침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이런 생의 비의를 실감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조급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뜻한 바가 잘 이루어진다 하여 너무 기뻐할 것도 없고, 뜻한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안달하지 않아도 됩니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때가 있습니다. 때를 앞당기려는 것은 사람의 욕심입니다. 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서전>>과 <<그리스도인 조르바>>에서 들려주는 한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산길을 걷다가 올리브나무에 매달린 유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유충을 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투명한 꺼풀 속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깨어나는 비밀의 과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아직 고치 속에 갇혀 있는 미래의 나비가 햇빛으로 뚫고 나올 성스러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기 원했지만 그 깨어남의 시간은 너무 더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유충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유충의 등이 찢어지더니 연둣빛 나비가 나왔습니다. 나비는 힘겹게 날개를 펴려고 애썼지만 날개는 겨우 반쯤 펴지다가 멈췄습니다. 조바심이 났지만 나비는 영영 날개를 펴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법칙을 어기고 서둘렀기에 나비를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아주 오래도록 카잔차키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작품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지만, 신의 작품은 결점이 없고 확실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영원한 법칙을 다시는 어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나무처럼 나는 바람에 시달리고, 태양과 비를 맞으며 마음 놓고 기다릴지니. 오랫동안 기다리던 꽃과 열매의 시간이 오리라.”(<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저는 이 말을 태산처럼 무겁게 받아들입니다. 앞으로 나가야 할 때도 있지만 물러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워야 할 때가 있지만 허물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주님의 속도에 맞추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감사와 영광
하나님의 시간과 리듬에 맞추어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감사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들을 만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난폭한 자들의 손에서, 스올 깊은 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에 우리는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웃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유머를 '초월의 신호'라 했습니다. 웃음은 비극을 극복하고 절망을 물리치는 인간 영혼의 위대한 표지입니다. 새해에는 우리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위로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감사하며 살겠다는 각오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자기의 각오를 이렇게 드러냅니다.

“주 하나님, 내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감사드리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렵니다.”(12)

맑고 화창한 날에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져야만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공들여 기획했던 일이 실패로 돌아가면 누군들 마음이 유쾌하겠습니까? 한동안은 후유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실패를 고통으로만 기억한다면, 우리는 인생의 한 때를 허비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린다면 실패는 그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서 더 귀한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저는 신앙은 일종의 연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금술이란 보잘 것 없는 금속이나 화학물질을 이용하여 금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정말로 금을 만들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의 세계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이 연약함에 휩싸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야 연약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이라야 실패한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생의 현실은 우리 생을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하는 안내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연금술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멋진 연금술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연금술사의 비법은 ‘감사’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입니다. 사용하는 말이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우리가 내일 살게 될 세상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주님께 바치는 기도 속에서 태어납니다. 세상은 여전히 위험하고 전망 또한 불확실하지만 주님 안에 있기에 우리는 생을 경축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박어진 씨는 우리가 반성과 후회에 몰두하다 보면 남을 사랑하고 축복할 시간과 에너지가 줄어든다고 말합니다. 새해에는 후회보다는 감사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원망보다는 축복을 즐기며 살기를 원합니다. 미워하기보다는 사랑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런 희망과 다짐으로 일 년 삼백 육십 오일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01월 01일 00시 07분 3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