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 열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6:43-45
설교일시 2011/01/09
오디오파일 s20110109.mp3 [1072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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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눅6:43-45
(2011/1/9)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 울고 싶어라
며칠 전 교회 앞길을 걷고 있는데, 발 앞으로 은행알 두어 개가 투둑 떨어졌습니다. 여물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 은행이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손을 놓아버렸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올려다보니 나무 가득 여물지 못한 은행알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참 쓸쓸한 풍경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잎 진 나무에 매달려 저렇게 모진 겨울바람을 맞고 있나 싶었습니다. 그런 풍경이 쓸쓸한 것은 우리의 내면을 되비춰주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도 여물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 꿈들이 참 많습니다. 우리는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로 분열되어 살아갑니다. 이 둘은 늘 불화를 겪습니다. 남을 배려하며 착하게 살고 싶지만 이익 앞에서는 이내 영악해지고, 사람들과 더불어 따뜻한 정을 나누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삶을 ‘본래적 실존’이라 했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비본래적 실존’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이 곧 ‘죄’의 상태라 했습니다. 낯선 말이지만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곧 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 혹은 쭉정이가 된 삶이 비본래적 실존입니다. 새해 벽두부터 이렇게 우울하고 침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교계의 현실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를 대표한다는 몇몇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왠지 예사롭게 여겨지질 않습니다. 자기를 목회활동에서 배제했다고 하여 부담임목사가 담임목사를 폭행하고,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것 같은 피해의식 때문인지 남의 교회에 찾아가 그 교회와 목사를 비난하는 유인물을 돌리다가 충돌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감독회장 선거를 둘러싼 감리교회의 분쟁은 2년이 넘도록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대립하고, 비방하고, 사람을 동원하고, 고소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명분이야 어떻든 그 속내는 다 똑같습니다. 내가 손해 볼 수는 없다, 내가 높아져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부풀려진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어머니 교회는 중병에 걸렸고, 예수님은 또다시 피를 흘리고 계십니다.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는 “진흙과 물이 예수의 숨결과 만나면 날개를 펼치고 새가 되어 날아간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계의 현실은 이런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모이지만 그 속에 예수의 숨결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흙탕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보며 탄식하셨습니다. 하지만 ‘열매 없음’보다 더 참담한 것은 ‘나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교회가 다 병들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땅 구석구석에서 예수의 숨결과 만나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싸잡아서 한국교회에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교만함입니다. 규모가 작고, 언론에 노출될 기회가 적어서 그렇지 정말 감탄을 자아낼만한 목회자와 교회가 많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서있는 삶의 자리를 하나님이 줄로 재어주신 구역으로 생각하면서 그 땅의 평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통 받는 이들과 외로운 이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을 섬기고 돌보고 희망을 불어넣는 이들을 보면 제 속에도 뜨거운 것이 일어납니다. 이제는 나만 홀로 남았다며 낙심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입을 맞추지도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놓았다(왕상19:18)고 하셨습니다. 저는 날이 갈수록 이 말씀에 감동합니다. 사람들은 큰 것과 화려한 것에 눈길을 주지만, 하나님께는 큰 것과 작은 것이 따로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소명에 충실한가입니다.

• 영적 분별력
예수님은 좋은 사람, 혹은 좋은 공동체를 설명하기 위해 나무의 이미지를 활용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지 않고, 또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나무는 각각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한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성찰해야 하는데, 성찰은 늘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실상과 대면하는 것을 꺼리기에 우리는 자신을 아프게 돌아보기보다는 남을 비난하고 비평하는 쪽을 택합니다. 마치 그를 비난하는 순간 자기의 도덕적 우위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런 태도를 자주 보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이 진실과 대면할 마음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은 마태복음에도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누가복음의 본문과 맥락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는 거짓 예언자들을 잘 살펴서 그들에게 속지 말라는 맥락에 이 말씀을 배치해 놓고 있습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배치된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마태는 말은 뻔지르르 하지만 삶의 내실은 없는 거짓 예언자들이 신자들의 마음을 현혹하는 현실을 경계하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들어야 할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욕망과 생각에 부합하는 말만 취사선택함으로써 자아를 강화할 뿐입니다.

얼마 전 은퇴하신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의 은퇴사가 사람들 사이에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다섯 가지 참회’와 ‘다섯 가지 감사’, 그리고 ‘두 가지 기대’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은퇴사 가운데 참회 부분에 나오는 두 가지가 특히 제 눈에 띄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민족 역사의 한 복판에서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고 방관자로 살아온 일, 그리고 지도하던 젊은이들을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역사의 마당에 서도록 인도하지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올곧게 살아가지 못하는 성도들, 특히 교회 내 부유한 기득권층들에게 그들이 상처 받을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를 제대로 못한 것을 참회합니다.”

저는 이 솔직한 자기 고백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현직에 계실 때 이렇게 말하고, 사셨더라면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겁니다. 인생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좋은 길 안내자를 만나야 합니다. 아라비아 말로 스승은 오아시스에서 다음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막에 난 그 길은 모래 바람이 한번 불고 나면 곧 사라지곤 하기에 사막을 가로지르려는 이들은 눈 밝은 안내자와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길을 잘 아는 이들을 만나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면 모든 게 잘 된다면서 번영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들 속에 두려움을 주입하여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신기루로 우리를 안내하기 십상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의 곁에 모여든다고 해서 그가 곧 좋은 나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우리를 예수가 아닌 다른 목표로 안내하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영적 분별력이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인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인지는 그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보면 보입니다.

• 얼굴
똑같은 나무와 열매 이야기이지만 누가가 전하는 이야기는 마태와 조금 맥락이 다릅니다. 누가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남에게 후히 주라, 남의 눈에서 티를 빼주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빼내라는 교훈 끝에 본문을 배치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좋은 열매란 물론 앞에서 언급한 그런 것들입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남 좋을 대로’ 사는 것입니다.

과일이 익으려면 햇빛과 비와 바람과 곤충을 만나야 하듯이, 이런 인생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따뜻한 눈길을 가지고 이웃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또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의 아픔에 대한 공감도 필요합니다. 그의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결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꾸만 주는 연습을 하는 것이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입니다.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모른다면 우리는 살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친절한 말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했습니다. 말은 어렵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우리 삶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이웃과 동료를 향한 나의 말이 바뀌면 그와의 관계도 바뀝니다. 천국의 말을 사용할 때 세상은 적대적인 표정을 풀고 우리에게 다정하게 다가옵니다. 친절한 말은 남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때는 남을 배려할 줄 알 때이고, 남을 위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때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보살피는 작은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하고 양보할 때 우리 몫은 줄어듭니다. 하지만 내면의 공간은 그에 반비례하여 넓어지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어둠은 빛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너’를 위해 배려하는 삶을 살기 시작할 때 우리 얼굴에서 독살이 빠져나갑니다. 어여쁜 얼굴이 됩니다. 본바탕은 민주주의적으로 생겨 흠모할만한 것이 없는 사람이라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납니다. 얼굴은 ‘얼의 골짜기’입니다. 예쁘고 안 예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얼굴에 빛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두 아릅답습니다.

• 우리가 갈무리하고 있는 것들
오늘의 우리 모습은 어제가 누적된 결과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은 그동안 우리가 내면에 쌓아온 것들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간명하게 설명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선 더미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 속에 갈무리해 놓은 악 더미에서 악한 것을 낸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45)

동양의 현자들은 마음에 선을 갈무리해 놓은 사람들을 일러 군자君子라 했습니다. 공자는 군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君子는 成人之美하고 不成人之惡하나니 小人은 反是니라”(論語, 顔淵, 16章).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 남의 악을 이루어주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마음에 무엇을 갈무리하며 살고 계십니까? 그 마음으로 다른 이들의 가슴에 무엇을 이루어주며 살고 있습니까?

한 젊은이가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무엇이 참 종교입니까?” 스승은 대답 대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옛날, 마법의 반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지닌 사람에게 자비와 친절과 관용이라는 세 가지 선물을 주었네. 그런데 반지 임자가 죽게 되자 그의 세 아들이 저마다 자기에게 반지를 달라고 했지. 노인은 세 아들에게 각각 그러마고 약속을 했네. 그런 다음, 솜씨 좋은 장인을 불러다가 본디 반지와 똑같은 반지를 두 개 만들어달라고 한 뒤 노인은 세 아들에게 각각 하나씩 주며, 자기가 유일한 반지의 주인인 줄 알도록 했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세 아들은 저마다 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결국 판사에게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가려달라고 했지. 판사가 말하기를, ‘육안으로는 진짜를 가려낼 수가 없군. 하지만 반지의 선물인 자비와 친절과 관용이 누구한테서 나타나는지를 보면, 진짜 반지의 주인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세 아들은 각자 자기가 진짜 반지를 가졌음을 증명하려고, 그날부터 자비롭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처신했다는 이야기야. 알겠나? 참 종교는 이 이야기의 세 아들과 같다네. 어느 종교의 교인들이 더 이상 자비와 친절과 관용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그 종교는 하나님이 주신 종교가 아닌 걸세.”(이현주, <<보는 것마다 당신>>, 샨티, 63-4쪽)

성도란 주님의 가르침이 진짜임을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입증하는 사람들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더니 오늘의 한국교회의 형편이 그러합니다.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남을 가리킬 것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주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올해 우리 인생의 나무에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01월 09일 12시 08분 3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