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 하나님이 주신 선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전 5:18-20
설교일시 201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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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선물
전5:18-20
(2011/1/30)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정해진 몫을 받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 시간의 갱신
설날을 앞둔 주일입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사들고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겨운 느낌이 듭니다. 문득 ‘설’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유래되었나 알고 싶어 찾아보니 몇 가지 說이 있었습니다. 옛 문헌은 설날을 신일(愼日)이라고 했습니다. 삼가고 조심해야 하는 날이라는 뜻일 텐데, 설은 삼가고 조심한다는 뜻의 우리말 ‘사리다’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 날은 또 낯선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낯설다’에서 ‘낯’이 떨어져 ‘설’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해가 바뀌어 나이가 드는 것이 ‘섧다’ 하여 설이라 한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왠지 눈물겹지요? 설을 외래어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새로 솟는다’ 혹은 ‘구분이나 경계’를 뜻하는 ‘설’이 우리말로 정착했다는 것이지요. 설이 많다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시간을 새롭게 경험하고 싶은 염원과 삶을 조심스럽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은 지 한 달이 지나 우리는 또 다른 새해 앞에 서있습니다. 다행입니다. 새로움처럼 낡아지기 쉬운 것이 없기에 새해가 자주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은 주기적으로 시간을 갱신합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지난날의 잘못과 과오를 하나님께 아뢰어 용서를 청하고, 하나님의 미쁘심을 찬양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순례자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있어 예배는 가장 귀한 시간인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는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는 것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요즘 일간 신문 주간지 월간지 할 것 없이 개신교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일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예수 정신이 실종된 교회는 ‘신의 무덤’일 뿐입니다. 돈과 권력이 늘어나는 순간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컴퓨터로 글을 쓰다가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친다는 게 그만 잘못하여 ‘실신하신 하나님’이라고 쳤다고 하더군요. 뭔가 예시적인 실수가 아닌가요?

교회가 돈이 많아지니 다툼도 많아집니다. 마땅히 나누어야 할 은사는 돈으로 환산되고, 돈이 끼어드는 순간 아름다운 관계는 깨지기 일쑤입니다. 교회 성장이 곧 교회 타락이 되기 쉬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돈의 위험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전5:10)고 말합니다. 재산이 많아지면 돈 쓰는 사람도 많아지고, 배부른 사람은 잠을 편히 못 잔다고도 말합니다. 그는 세상에서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면서 ‘아끼던 재산이, 그 임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합니다.

• 삶이 덧없을지라도
지금 우리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울증과 스트레스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도 어둡습니다. 물질생활이 풍성해질수록 사람들의 가슴에는 공허함과 우울이라는 악마가 터를 잡습니다. 삶의 조건이 나아져도 사람들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 불만족이야말로 현대인들이 걸린 만성질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더 많은 지식, 더 좋은 직장, 더 멋진 자동차, 더 많은 월급, 더 근사한 집, 더 멋진 연인을 원하기 때문에 현재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존감은 절로 줄어듭니다. 우리의 불만족은 ‘더 많이’ 원하는 욕구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탐욕이 나오고 야망이 나옵니다. 그런 삶의 열매는 분주함과 좌절입니다. 윌리엄 제임스라는 학자는 ‘자존감self-esteem’을 공식으로 나타냈습니다. 자존감=성공/허세. 제임스는 분자(성공)가 늘어나는 것보다는 분모(허세)가 줄어드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허세가 줄어들면 자존감은 저절로 높아집니다.

사람들이 허세에 매달리는 것은 의미를 구성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만들지 못한다는 말은 자기 삶의 주체로 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억지로, 마지못해, 체면 때문에 한다면 그 일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그 일을 주체적인 동기에서 행하게 될 때 보람과 기쁨이 찾아옵니다. 밥을 하든, 설거지를 하든, 거리 청소를 하든, 시장에서 장사를 하든, 그 일에 하나님을 모셔 들일 때 그 일은 거룩한 일이 됩니다.

스페인 화가인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8-1682)의 그림 중에 <샌디에고의 기적>이 있습니다. 화면의 좌측에는 부엌문을 열고 들어오는 귀족들 몇 명의 모습이 보이고, 가운데에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바치고 있는 사람과 물 항아리를 나르는 두 천사의 모습이 나옵니다. 화면의 우측에는 채소를 다듬는 사람, 양념을 절구에 찧고 있는 사람, 식탁을 정리하는 사람 등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일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의 어깨 위로 날개가 돋아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리요는 이 그림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일상의 모든 일들이 거룩한 일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도서는 흔히 생각하듯이 허무주의의 교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코헬렛은 진정한 지혜를 가르칩니다. 그는 사람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경험일 겁니다. 이사야도 인생의 덧없음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사40:6b-7)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름답고 찬란한 젊음의 날도 지나가고, 한때 우리 가슴을 부풀게 했던 인기와 명예도 안개처럼 흩어지고 맙니다. 그 지나감과 흩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사야는 인생이 그처럼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인생이 그렇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잘 산다’는 말에 대해 우리는 좀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고, 주어진 현실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잘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사람이 받은 몫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엔 세상이 너무 거칠고 험하다고들 말합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온 세상을 떠돌았던 사람처럼 우리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거라 생각하며 덧거친 세상을 방황합니다. 죽어라 애를 쓰다가 마침내 잡았다 싶은 순간 행복은 마치 미꾸라지인 듯 우리 손에서 슬쩍 빠져나가곤 합니다. 마치 잘 차려진 밥상을 앞에 두고 막 수저를 들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허망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인생이 이래도 되는 건가요? 전도자는 매우 중요한 생의 비의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신다(5:20)는 것입니다. 날마다 낯살을 찌푸리고, 화를 내고, 헐레벌떡 달려가면서 ‘죽겠다’를 연발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을 속상하게 하는 일입니다. 전도자는 말합니다.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5:18b)

누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말을 하면서 굳이 ‘깨달았다’고까지 말할 게 뭐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 깨닫지 못해 인생이 무겁습니다. 이 말은 케세라 세라 하며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날마다 파티를 벌이며 흥청망청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남이 누릴 몫까지 가져다가 제 배만 불리는 사람들의 화려한 식탁을 추인해주는 말이 아닙니다.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이 많든 적든 즐겁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이고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을 통해 니카라과의 작은 마을에 사는 한 어부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포터는 아주 작은 그의 배에 동승하여 호수로 나갔습니다. 어부가 여러 차례 그물을 던졌지만 기대했던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오던 어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이지요. 오늘 나는 겨우 한 번 진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이런 생활에 만족합니다.” 저는 그의 말을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자세를 가다듬었습니다. 그가 마치 숨어 있는 현자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여 안달하지도 않았고,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억지가 없기 때문일까요? 그의 미소는 참 선선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없는 것 없이 누리며 살면서도 늘 뭔가 결핍감을 느끼며 사는 우리들이 비정상임을 절감했습니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속아 사는 것은 아닐까요?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만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불만족을 만들어내야만 유지되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행복의 새로운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정도는 누려야 행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광고를 접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이 불행한 사람으로 규정됩니다. 머리 앞에 매달아놓은 고기를 먹기 위해 전력 질주하는 경기장의 개들처럼 우리도 허덕이며 삽니다. 행복의 비결은 ‘이만하면 족하다’고 말하는 데 있습니다.

• ‘너’ 없는 행복은 신기루이다
‘족하다’고 말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먼저 주변의 나무나 풀꽃이 눈에 들어오고, 이웃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옵니다. 작고 사소한 것들 속에 깃든 아름다움에 눈을 뜰 때 우리는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게 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볼 때 가슴이 짠해집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에스겔은 포로기 이후에 새 나라에서 살게 될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겔36:26b)을 주실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그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아픔에 예민하게 반응하셨습니다. 저는 최영철 시인의 <우짜노>라는 시를 참 좋아합니다.

“어, 비 오네/자꾸 비 오면/꽃들은 우째 숨쉬노/젖은 눈 말리지 못해/퉁퉁 부어오른 잎/자꾸 천둥 번개 치면/새들은 우째 날겠노/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흥건히 고인 흙탕물/몸 간지러운 햇빛/우째 기지개 펴겠노/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우째 먼길 가겠노”

시인 반칠환이 이 시에 대한 감상을 적었습니다. 그는 세상만사 걱정도 가지가지이지만 저 ‘우짜노’를 들으니 세상이 환해지는 건 우짠 일인지 모르겠다면서, 꽃잎, 새, 노점 할머니, 아이들, 바람마저 걱정해주는 저 오지랖에 눈이 맑아지더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바람을 덧붙입니다.

“나는 세상사람 모두가 저런 ‘우짜노’를 연발했으면 좋겠다. 창문 밖 장맛비를 내다보며 정치인이, 군인이, 장사꾼이, 도둑놈이, 시인이 모두 손을 놓고 꽃잎 걱정, 풀잎에 매달려 빗방울 뭇매를 맞을 왕아치, 풀무치, 때까사리, 소금쟁이 걱정을 하다가 제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도둑놈인지 시인인지 몰라 잠시 멍청해지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전쟁광이 좀 손해보고, 무기상이 셈하다 갸우뚱하고, 도둑놈 장물 수입이 줄고, 히히- 시인은 시 한 편 더 건지는 그런 시간이 많이많이 늘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읽다가 저도 모르게 ‘아멘’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작고 여린 것들을 바라보며 ‘우짜노’를 연발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병든 이들도 불쌍하고, 귀신 들린 이들도 불쌍하고, 죄인의 멍에를 쓰고 고개 숙인 채 살아가는 이들도 불쌍하고, 살아갈 희망조차 박탈당한 사람들도 불쌍합니다. 주님은 그들의 벗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행복에만 마음을 쓰며 사는 사람은 남과 ‘더불어’ 누리는 진짜 행복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연약한 이들 속에 숨겨놓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다가서 함께 울고 함께 웃을 때,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생의 무게를 나눠질 때 우리 속에는 하늘이 주는 기쁨과 평화가 유입됩니다. 아까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며 사는 까닭은 삶의 의미를 구성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삶의 의미는 이웃과 정다운 관계를 맺을 때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그리고 우리와 더불어 망가진 세상을 고치고 싶어하십니다. 이 부름과 초대에 응함으로 삶을 축제로 바꾸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01월 30일 12시 05분 5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