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8. 늘 푸른 나무처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 92:1-15
설교일시 2011/05/01
오디오파일 s20110501.mp3 [1203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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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나무처럼
시92:1-15
(2011/5/1, 교회설립주일)

[가장 높으신 하나님,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침에 주님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주님의 성실하심을 알리는 일이 좋습니다. 열 줄 현악기와 거문고를 타며 수금 가락에 맞추어서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 기쁩니다. 손수 이루신 업적을 기억하면서, 환성을 올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 주님의 생각이 어찌 이다지도 깊습니까? 우둔한 자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미련한 자가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사악한 자들이 꽃처럼 피어나더라도,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히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저 원수들, 주님의 저 원수들은 기필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사악한 자들은 모두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들소처럼 강하게 만드시고 신선한 기름을 부어 새롭게 하셨습니다. 나를 엿보던 자들이 멸망하는 것을 내가 눈으로 똑똑히 보며, 나를 거슬러서 일어서는 자들이 넘어지는 소리를 이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주님의 집에 뿌리를 내렸으니, 우리 하나님의 뜰에서 크게 번성할 것이다.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올곧으심을 나타낼 것이다. 주님은 나의 반석이시오, 그에게는 불의가 없으시다.]

• 좋습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이 지난 후 첫 번째로 맞이하는 주일인 오늘, 우리는 교회 설립 103주년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절이 늦은 까닭에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두 기념일의 인접성은 마치 교회의 존재 이유가 부활을 살아내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듯합니다. 어제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불청객 황사가 찾아왔습니다. 다른 날은 몰라도 주일만큼은 보송보송한 마음으로 보내고 싶은데, 오늘은 그렇질 못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내면의 빛을 끌어올려 주변을 환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내면의 빛을 끌어올리려면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힘들다’, ‘싫다’, ‘짜증난다’, ‘귀찮다’ 하면 마음도 어두워집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마음도 환해집니다.

설교의 도입이 이상한가요? 사실 이번 주간은 정말 분주하게 지냈습니다. 연회가 종교교회에서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지척에 있는 서점에도 들리지 못할 정도로 시간에 쫓겼습니다. 자칫하면 마음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집에서는 일부러 허튼 소리도 하고, 껄껄거리며 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제 마음을 환하게 바꿔 준 것은 오늘의 본문인 시편 92편 1-3절이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형용사들이 참 싱싱합니다. ‘좋습니다’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고 ‘기쁩니다’와 ‘환성을 올립니다’는 단어가 연이어 등장합니다. 문득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사용하는 언어를 분석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곧 우리 인생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좋음’과 ‘기쁨’의 내용은 경우에 따라 또 사람마다 다릅니다. 일차원적인 욕구가 충족될 때 만족감을 느끼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욕구를 제어할 수 있을 때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존중의 욕구가 채워졌을 때 기뻐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부정에 이른 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의 ‘좋음’ 혹은 ‘기쁨’이 다른 사람의 ‘고통’과 ‘슬픔’과 잇닿아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인은 무엇 때문에 그리도 행복해하는 것일까요? 설명보다는 그의 음성을 그저 듣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주님께 감사를 드리며, 주님 이름을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다.”(1)
“아침에 주님의 사랑을 알리며, 밤마다 주님의 성실하심을 알리는 일이 좋습니다.”(2)
“열 줄 현악기와 거문고를 타며 수금 가락에 맞추어서 노래하는 것이 좋습니다.”(3)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 기쁩니다. 손수 이루신 업적을 기억하면서, 환성을 올립니다.”(4)

이 시인이 누리는 즐거움의 뿌리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 찬양을 드리는 것이 첫째이고, 날마다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을 증언하는 것이 그 둘째이고. 주님이 하시는 일을 기억하는 것이 그 셋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고 계십니까?

• 오묘하신 섭리
시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놀랍고, 주님의 생각이 깊다고 탄복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무뚝뚝하고, 동작이 굼뜨고, 귀가 어두우신 것 같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죽겠다고 부르짖어도 주님은 급할 것 하나 없다는 듯 딴청만 피우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기력하게 손 놓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에 간섭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일을 다 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함 없는 함’(無爲之爲)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구는 빠른 속도로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는 해도 스스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이 초록별 지구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그렇기에 눈을 뜬 사람들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9)
“사람의 마음에 많은 계획이 있어도, 성취되는 것은 오직 주님의 뜻뿐이다.”(잠19:21)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이방 사람들이 자비를 입게 되었고, 이방 사람들이 주님의 자비를 입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회개하여 자비하심을 얻게 하셨다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롬11:33)

예수님도 하나님의 구원의 신비를 집짓는 이들에 견주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집 짓는 자들이 버린 돌을 들어 새로운 역사의 모퉁이 돌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가장 큰 신비는 십자가입니다. 삶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가 영생의 문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둔한 자는 알지 못하고, 미련한 자는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섭리에 접속된 오늘의 시인은 확신을 가지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풀처럼 돋아나고, 사악한 자들이 꽃처럼 피어나더라도, 그들은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7)

우리도 시인의 노래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자꾸 이런 고백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착한 사람은 언제나 이용만 당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인들은 늘 약삭빠른 것 같고, 하나님의 공의는 시행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악인들은 영원히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지만 마음이 시원하지는 않습니다.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의 날은 언제나 너무나 멀게만 느껴집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될 일을 하도록 놓아 두셨습니다.”(롬1:28)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사람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멋대로 하도록 ‘버려둔다는 것’보다 더 큰 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9년에 지옥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상태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동료 인간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러시아의 사상가인 니콜라스 베르쟈예프(Nicolas Berdyaev, 1874-1948)는 지옥은 ‘절대적인 자기중심주의, 즉 사랑에 무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에는 스스로 지옥을 만들고 그 속에 유폐된 채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 상록수
현상 세계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척박한 땅에서도 깊이 뿌리를 내려 물을 찾아내는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입니다. 의인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옵니다.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많고, 때로는 박해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논어의 한 대목이 있습니다.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힘겹고 시린 세월을 지내보아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사람도 가끔은 비틀거립니다.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너무 힘겨워 적당히 세상에 적응하며 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다시금 몸과 마음을 추슬러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걸어갑니다.

80년대 초에 제가 섬기던 교회 교인 가운데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이들이 많았습니다. 추운 겨울이면 불기 없는 차가운 감방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을 남편 혹은 아들 생각에 차마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어 냉골에서 잠을 청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어느 교우의 생일날 교우들 몇이 위로차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얼마 가슴이 시릴까 생각하니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아주 담담하게 찾아간 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식사 후 다과를 나누다가 어머니는 아들을 생각하며 노래 한 곡(상록수)을 부르셨습니다. 나직한 음성으로 부르시던 그 노랫소리를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1.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2. 서럽고 쓰리던 지난 날들도/다시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땀 흘리리라 깨우치리라/거치른 들판에 솔잎 되리라
3. 우리 가진 것 비록 적어도/손에 손 맞잡고 눈물 흘리니/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뭔가 뜨거운 것이 솟아올라 우리를 하나로 묶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거치른 들판에 솔잎이 되려는 사람들, 가야 할 길 멀고 험해도 손을 맞잡고 걷는 사람들이 바로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노래는 금방 합창이 되었고, 적당히 지쳐있던 우리 마음에 새로운 불을 지펴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담담하게 그 어려운 시절을 견딜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떳떳함이, 그 든든함이 연로하신 어머니를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 교회의 미래
우리는 지금 아름답고 탐스러운 나무 한 그루를 봅니다. 땅에 심겨진지 오래되어 둥치가 큽니다. 견뎌온 풍상의 세월을 보여주듯 부러진 가지도 보이고 옹이도 굵직합니다. 하지만 봄이면 어김없이 연둣빛 새 잎을 밀어올리고,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줍니다. 가물어도 진액이 넘치고, 가을이면 꽃이 진 자리마다 탐스런 열매를 맺습니다. 참 멋진 나무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의인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연륜이 쌓여도 신선한 맛이 있습니다. 며칠 전 신학교 시절 은사님 내외분을 뵈었습니다. 사모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참 웃었습니다. 몇 번 가본 길도 찾지 못하는 남편의 어두운 길눈을 탓했더니 그러시더랍니다. “당신이 내게 늘 새롭듯, 모든 길이 새로워.” 나이 70이 넘어서도 아내를 늘 새롭게 만나시니 선생님은 신혼이었습니다.

“저는 늙어서도 여전히 열매를 맺으며, 진액이 넘치고, 항상 푸르를 것이다”라는 시인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긴 역사는 자칫하면 침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 교회에는 새로운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끼리 만족하고 행복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들을 성심으로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허깨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그래서 활기를 불어넣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긍정의 말을 하고, 늘 밝은 표정으로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사람, 인생이 고달파도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 받을 사랑만 헤아리지 않고 먼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남의 허물을 지적하기보다는 그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주려는 사람이 많을 때 교회라는 나무는 진액이 넘칩니다.

교회 안에 머물기보다는 우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신 주님을 뵙기 위해 아픔의 현장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사람을 귀히 여기지 않는 문화에 저항하는 사람들, 예수정신에 사로잡혀 좁은 길을 걸으면서도 스스로 황폐해지지 않는 사람들, 세상의 어둠과 부딪쳐 파란 불꽃을 일으키는 사람들, 생기 충만하여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설 자리가 되어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들,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삼는 사람이 많아질 때 우리는 항상 푸르른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부활을 살아낼 때 교회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신 주님이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이것이 우리가 부를 새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부르며 세상에 생기와 희망을 불어넣는 평화의 일꾼들이 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05월 01일 12시 06분 2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