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19. 아름다운 계승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48:15-16
설교일시 2011/05/08
오디오파일 s20110508.mp3 [1240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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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계승
창48:15-16
(2011/5/8, 어버이주일)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였다.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온갖 어려움에서 나를 건져 주신 천사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나의 이름과 할아버지의 이름 아브라함과 아버지의 이름 이삭이 이 아이들에게서 살아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들의 자손이 이 땅에서 크게 불어나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 파란만장한 인생
어버이주일 아침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날만 되면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논어에 나오는 말, “나뭇가지가 잠잠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님이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는 말이 하나도 그른 것이 없습니다. 곁에 계실 때는 귀한 줄 모르지만 떠나시고 나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부모님입니다. 세상살이가 힘겨워 허덕일 때면 문득 찾아가고 싶은 곳이 부모님의 묘소입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쓰고 사는 가면을 다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이십니다. 언제든 돌아가 안길 수 있는 품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미국에서 큰 방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소설은 시골에서 올라온 엄마가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실종되어 가족들이 사라진 엄마의 흔적을 추적하며 기억을 복원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늘 곁에서 무한한 사랑을 줄 것 같은 존재였던 엄마는 실종됨으로써 오히려 가족들에게 더 소중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내용입니다. 서양 사람들이 이 책에 크게 공감한다는 것은 그만큼 외롭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이들도 있어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부모님은 대개 우리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습니다. 가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을 때 누군가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부모가 아니면 누가 그런 역할을 해주겠습니까? 조선시대의 문인인 백광훈(1537-1582)은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해남에 살고 있는 아들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듣자니 너희가 자못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고, 또 남의 허물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더구나. 사람이 배우는 것은 다만 이러한 병통을 없애려 함인데, 이제 너희가 만약 정말로 이와 같다면 비록 만 권의 글을 배워 곧장 과거에 급제한다 해도 그 사람을 어디에다 쓰겠느냐? 놀라고 절통하여 죽고만 싶구나. 이후로도 너희들이 이 같은 버릇을 딱 끊지 못하고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게 되면 맹세컨대 다시는 너희들을 보지 않겠다.”(정민, <<책 읽는 소리>>, 마음산책, 86쪽)

부모는 우리의 몸만 낳아주는 분들이 아니라 정신까지 낳아주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야곱이 죽음을 예감하면서 그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임종을 앞둔 자리여서 그런지 그의 말이 더욱 곡진하게 느껴집니다. 요셉을 향한 야곱의 마음은 참 애틋합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에게서 태어난 자식인 데다가, 죽은 줄만 알았다가 되찾은 자식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오래 전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아들을 생각하며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가족들이 다 나서서 위로했지만 그는 위로받기를 마다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그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그 아들이 애굽에서 대신의 지위에까지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성경은 야곱과 요셉의 극적인 상봉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창46:29b-30)

목을 껴안고 울다가 이게 꿈이냐 생시냐 싶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껴안기를 반복하는 광경이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보는 듯합니다. 야곱은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배려로 숙곳에 머물다가 마침내 임종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 동행이 되어주신 하나님
그는 신산하기 이를 데 없었던 삶을 돌아봅니다. 참 굴곡이 많았습니다. 장자권을 둘러싼 형 에서와의 갈등, 도주,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머슴처럼 지내야 했던 나날, 치열했던 얍복강 나루의 기도, 에서와의 화해, 라헬의 죽음, 아들을 잃었던 순간의 고통, 그때부터 삶에 짙게 드리워진 그늘,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요셉과의 재회……. 그런데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은총이었습니다. 형의 칼날을 피하여 하란으로 도망칠 때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비전 가운데 만난 하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하셨던 주님의 약속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요셉을 축복하면서 하나님을 이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내가 태어난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의 목자가 되어주신 하나님.” 여기서 야곱은 하나님을 ‘긍휼’, ‘인자’, ‘노하기를 더디하심’ 등의 어떤 속성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살펴 주신 하나님, 선한 목자처럼 그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저는 이 표현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보이지 않는 손길로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곤고한 삶을 어루만지시고 보살펴 주시고 위로하신 하나님이 지금 내 곁에 계시다는 사실처럼 큰 위안이 없습니다. 만약 아버지 어머니의 삶의 내력을 모른다면 이런 고백이 그렇게 절실하게 다가올 리가 없을 겁니다.

살다보면 자식들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자랑스럽고 떳떳한 기억도 있지만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성공할 때도 있지만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현실의 도전에 맞서 용기 있게 처신한 때도 있지만, 두려움 때문에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 때도 있습니다. 그런 모든 이야기를 자식들과 다 나누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어느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내 아버지 어머니도 연약한 분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애틋하게 그분들의 삶을 부둥켜안을 수 있습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그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설 힘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공급됨을 알아차립니다. 애통하고 절통한 상황에서도 삶을 계속할 힘을 공급하시는 분,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심연에 빠진 사람이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희망이 주입되기 때문입니다. 무기력증에 빠져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정의를 위한 투쟁에 나서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를 사로잡기 때문입니다.

• 야곱의 축복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삶에 개입하셨던 하나님, 또한 자신의 목자가 되어주셨던 하나님께 후손들의 미래를 위탁합니다. 복을 가로채는 자였던 야곱은 얍복강 나루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후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를 만났을 때도 복을 빌어주었고, 열 두 아들에게도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저 모든 일이 잘 되게 해달라는 기원이 아니었습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위태로운 생존의 조건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서 생을 한껏 살아가게 해달라는 축복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축복하며 사는 사람입니까? 복을 가로채는 사람입니까? 이스라엘의 지혜자는 “정직한 사람이 축복하면 마을이 흥하고, 악한 사람이 입을 열면 마을이 망한다”(잠11:11)고 가르칩니다. 바울 사도는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축복을 하고, 저주를 하지 마십시오”(롬12:1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축복을 사명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어떻게 축복했습니까? 그는 조상들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셨던 것처럼 요셉과 그 후손들도 지켜달라고, 그리고 친히 목자가 되어 후손들을 인도해달라고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야곱은 “나의 이름과 할아버지의 이름 아브라함과 아버지의 이름 이삭이 이 아이들에게서 살아 있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16a)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후손들이 대대로 번창하기를 바라는 기원이지만, 야곱은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이름이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름이 후손들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단순히 족보를 간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야곱은 어떤 정신의 계승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삶의 핵심 말입니다. 야곱에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일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식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으십니까? 재산이나 지위입니까? 어떤 목사들은 자식에게 교회를 물려주기도 합니다만 그건 결코 자식 사랑일 수 없습니다. 신경림 선생의 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가 떠오릅니다. 시인은 우리 현대사의 변화를 불을 밝히는 도구의 변화 속에 담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램프불 밑에서 그가 본 것은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였습니다. 그에게 세상은 그게 전부였습니다. 조금 자라서는 지익지익 소리를 내며 새파란 불꽃을 일으키던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는데, 그의 기억에 돋움새겨진 것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점꾼(금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 아내들의 억척스런 모습이었습니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는데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며 세상이 참 넓다고 느꼈습니다. 이후에는 대처로 나가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이 대목은 시인의 음성을 그대로 듣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시인의 이런 고백은 정신적 퇴행의 징후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시인은 굴곡진 삶의 여정을 통해 결국 할머니와 어머니에게로 돌아왔습니다. 시인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아끼고 돌보고 품어 안는 것임을 넌지시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대를 이어가며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으뜸 되는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 후손들을 위하여
야곱은 자손들이 땅에서 크게 불어나게 해달라고 빕니다. 애굽에서의 고역살이와 바빌론에서의 포로생활을 경험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살아남는 것이었습니다. 성경 도처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칫하면 자기들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나찌가 자행했던 유대인 박해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한 가정 당 1.15명으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맨 꼴찌라 합니다.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도 출산을 꺼리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 합니다. ‘2011년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23개 OECD 국가 중 꼴찌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풍요 속에 자라는 아이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우 무겁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모들의 과도한 교육열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자손들이 땅에서 크게 불어나게 해달라는 기원은 야곱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번성이 수적인 증대이든 아니든 우리는 후손들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삶은 그런 소망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쓸 지구를 망가뜨리고 그들이 받아야 할 유산을 미리 탕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난 주 교회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을 땅에 묻을 때 제 내면에 쟁쟁하게 떠오른 질문이 있었습니다. ‘50년 후에도 여전히 새들은 하늘을 날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까?’ ‘50년 후에도 봄이면 꽃들이 피어나고 벌들이 잉잉대며 생명의 노래를 부를까?’ ‘50년 후에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동물과 식물들이 여전히 살아 있을까?’ 기우처럼 들리지만 과학자들은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거덜날 날이 멀지 않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말 돌이켜야 할 때입니다. 조금만 더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됩니다. 그것이 후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법이 되어야 합니다. 말로 빌어주는 축복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으로 하는 축복입니다. 우리 삶이 후손들의 삶을 통해 계속되기를 바란다면 바로 지금 우리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자로 사십시오. 생명을 살리는 생을 택하십시오. 감사함으로 기억되는 이름이 되십시오. 주님의 은총으로 각 가정의 삶의 핵심이 자자손손 아름답게 계승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05월 08일 12시 05분 5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