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52. 쟁기를 잡은 사람(손성현 전도사)
설교자
본문 눅 9:57-62
설교일시 00-03-10 오후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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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기를 잡은 사람



하나, 지금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무는 천년의 마지막 주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자리에 오신 것을 먼저 축하드립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정말 오랜 세월을 살아오신 어르신들도 계시고 태어난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아기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똑같이 한 세기가 가고 새로운 세기가 오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변화의 시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감사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잘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이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워도 살아 있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크나큰 복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이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시 88:11).

지금 우리는 천년대의 끝자락에서 우리의 살아감을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이 세상 사람은 살아 있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면서 살아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살아 있음의 의미는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우리의 존재를 다해 찬양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지난 날을 뒤로하고 여러분이 걸어가는 삶이 하나님을 우러르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둘, 장례식도 안돼! 작별 인사도 안돼!

오늘의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께서 매우 엄격하고 차가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도전해 오신다는 것을 느끼게됩니다. 바로 어제 우리는 성탄절 예배를 드리면서 말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의 고요하고 온유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말씀을 통해 접하게 된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삶에 한치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으시는 그 모습이 아주 과격하고 무서워보이기까지 합니다. 젊은이들이 쓰는 표현으로 하면 "많이 터프해진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성탄절 아기 예수님이나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모습, 둘 다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고민거리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오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서기 전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고 오겠다던 이를 나무라시면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과 제가 믿고 따라야 할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돌아가신 부모님의 장례를 정성껏 치뤄드리는 것은 우리의 상식에 비추어 볼 때 그리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라는 갈릴리 사람과 함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모험을 시작하기에 앞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보고 서로를 축복하며 작별의 포옹이라도 하는 것이 큰 문제인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양보의 기색이 없으십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렇게 완고한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십니까?

중국을 비롯한 유교문화권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기독교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이 많았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가, "제자에게조차 배신당해 죽은 예수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크게 문제되었던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孝)를 최상의 가치 가운데 하나로 꼽는 유교문화권에서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야말로 반인륜적인 궤변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의 이 말씀을 둘러싼 논란은 중국에 복음이 전파되기 훨씬 전,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은 그 무슨 일보다 앞서는 최우선의 의무였습니다. 탈무드만 봐도, 부모의 장례를 목전에 둔 사람에게는 모든 율법의 의무를 면제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셋, 예수님을 "따라감"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심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음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위해서 무조건 부모의 장례도 내팽개치고, 가족들과의 화목한 관계마저도 무시하는 것, 그것이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일까?" "과연 예수님은 왜, 무슨 의도로 이 말씀을 하셨을까?" 하고 말입니다.

저는 우리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오늘의 본문 57, 58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예수 시대의 여느 선생 같았으면 자기를 따라오겠다는 그 사람을 기꺼이 받아주었으련만 예수님의 대답은 황당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참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결연한 의지 없이 섣부르게 당신을 따르겠다는 혈기 어린 한 젊은이를 물리치고 계십니다. "여우나 새보다도 못한 떠돌이 노숙자가 될 각오가 없다면" 따라와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씀 아닙니까? "열악한 환경과 외로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겠다"는 의지 없이는 나를 따라올 수 없다는 충고의 말씀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일으키신 하나님 나라 운동의 본질과 만나게 됩니다. 57절은 이 사람이 질문을 던진 때가 "길 가실 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가 주목하고 있는 예수 운동의 기본 틀입니다. 나를 받아주고 내가 인정받을 수 있는 한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떠나는 삶, 끝없이 길을 걸어가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실체였습니다. 거기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상의 외면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께서 걸으셨던 길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향해, 아니 지금 우리를 향해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명령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삶의 형태를 깨뜨리고 나오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나에게 익숙한 삶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입니다.


넷, 아! 끝없는 우리의 핑계, 또 핑계...

이제 예수께선 당신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익숙한 삶의 형태를 버리지 못한 자들을 위해 단호한 처방을 내리십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정말 주님을 위한 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가 되면 갖은 핑계를 대며 자기를 합리화하는 자들에게 참된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가만히 앉아서 예수의 말씀이나 듣고 편안하게 신앙 생활하려는 자들을 향해 주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하시며 길을 떠나셨습니다. 편안함에 길들여 있던 이들, 자신에게 익숙한 것들을 하나도 포기하기 싫은 이들에게 "떠남"의 삶을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습니다."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라도 나누고 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숨겨진 은밀한 욕망을 또한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일상과 자기의 삶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욕망이었습니다. 삶의 안정에 대한 욕망이었습니다. 입으로는 "부모의 장례"며 "가족과의 인사"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변명의 표현임을 예수는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진리가 있음을 느끼고, 거기에 매력을 느끼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익숙한 틀을 깨뜨리라고 요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기피하려는 욕망이 그 사람들의 변명에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과감하고도 단호한 입장을 취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일상사에 얽매여 사는 사람은 영적인 의미에서 "죽은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은 여기서 인간이 중시하는 일상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일상에 얽매어서 하나님 나라 일을 미루는 것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자"들이나 하는 버릇이라고 예수님은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단순히 나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거북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조금도 자기 삶의 틀을 바꾸려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런 모습은 정말 당혹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항상 우리를 이렇게 당황하게 합니다.

예수 시대에도 그랬고, 지난 이천 년 동안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 거기에는 물론 저와 여러분도 포함됩니다 - 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며 "하나님 나라 일으키는 일"을 미루고 또 미루고 있습니까. 그 옛날 어느 누군가가 부모의 장례, 가족과의 인사를 이유로 대며 하나님 나라와는 합리적인 거리를 두려고 했듯이,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성공, 경제적인 안정, 나의 공부, 나의 직장, 나의 가족, 나의 자녀들, 세상의 인간관계를 이유로 들며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극구 미루고 있지 않습니까? 모두 다 그럴 듯한 이유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지극히 정상적인 핑계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 그 안타까움으로 속이 새까맣게 타버렸을 지도 모르는 예수님의 가슴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는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면서 주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미루고 있습니까? 나 자신에게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내가 이뤄놓은 삶의 틀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으려는 우리의 못된 버릇에는 관대하면서, 그 못된 습성을 도려내는 수술을 감행하시는 주님께 "너무하다고", "비인간적이라고" 불평만 해대는 우리 때문에, 예수님은 정말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넷, 쟁기를 잡았으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은 쟁기를 우리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밭을 기름진 곳으로 만들기 위해 힘차게 자기 몫의 고랑을 파라고 쟁기를 주셨습니다. 농부가 밭에서 쟁기를 들고 고랑을 만드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참 목가적으로 보입니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본 사람은 그것이 힘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 그것은 멀리서 보면 "푸른 풀밭에서 목자를 따라다니면서 한가하게 풀이나 뜯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주 목가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까이 다가와서 제대로 보면 그것은 쟁기 하나 들고 밭을 일궈야 하는 힘든 일이며,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는 "쟁기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여기 서있는 저는 예수 따른 사람들을 멀리서 보고 "야, 참 좋겠다!"하고 따라왔다가 "어라? 이거 왜 이렇게 힘들지?"하면서 쩔쩔매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따라서 하나님 나라 일구며 사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이 예견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만이 우리를 참된 존재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줍니다. 열심히 고랑은 파지 않고, 자꾸 딴청을 피운 사람이 그 밭에서 거둔 열매를 먹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과 꼭 같은 이치입니다. 힘들지만 저 앞에서 우리보다 먼저 가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우리에겐 미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방해하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오늘 본문이 말해준 것입니다. "부모를 장사하고 오겠다." 그것은 나의 일상적인 관심들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욕망을 뜻합니다. "가족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 그것은 지금까지 나를 인정해주던 인간관계를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의 욕망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반응에는 "나"라는 자아를 조금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경작할 "쟁기"를 쥐어주셨건만, 우리는 자꾸만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사업, 학업, 가정, 다양한 여가활동에 시간과 정열을 소비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나중으로 미룹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꾸 뒤를 돌아보는 사이 우리에게 맡겨진 고랑은 점점 척박해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나에게 익숙한 삶의 형태를 포기하고 주님이 오라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편안함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미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말입니다. 온갖 변명거리와 자기 합리화 걷어치우고 냉큼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섯,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이제 며칠 후면 우리는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새 천년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나를 따라와라" 하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경쓰며 살고 있는 그 모든 것들 다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정체된 삶을 살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 해를 마감하면서 "우리가 예수님 따라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이었나? 우리는 지금까지 어떤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 나라 세우는 일을 미뤄왔는가?" 곰곰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에는 예수 따라 사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하나씩 지워버리며 힘차게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참 좋으신 하나님,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 우리의 지나온 날을 돌아보니 연약하고 교만한 저희를 오늘까지 인도하신 것은 바로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과, 일상사에 대한 집착 때문에 안타까워 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너무나도 무관심했던 저희를,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나에게 익숙한 것들을 버릴 줄 몰랐던 우리의 무지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아직까지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미련과 집착, 세상적인 욕심을 청산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주님, 주님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 그 길만이 우리를 참된 존재로 이끌어 가기에 그 길을 걸어가길 원합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오니, 거룩하신 성령으로 연약한 저희들을 도와주시옵소서. 혼탁한 세상사에 휩쓸려 가는 존재가 아니라, 영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00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