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 하나님의 대리자
설교자
본문 레19:9-18
설교일시 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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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대리자
레 19:9-18
(2001/1/7, 새해)


물과 불 가운데서

눈밝은 분은 이미 보셨겠습니다만, 새해 첫 주일부터 주보 표지 그림이 바뀌었습니다. 조항범 집사가 그린 것인데요, 그 그림을 보면서 무슨 뜻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화면 좌측 하단에는 큰 물결이 일고 있고, 좌측 상단에는 불길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벌거숭이 어린아이 하나를 소중히 품에 안고 계십니다. 저는 그 그림을 보다가 이사야 43장 2-3절을 떠올렸습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
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올 한 해가 제 아무리 힘겹다 해도 물과 불 가운데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용기있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연초부터 정가는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시끄럽습니다. 한쪽에서는 싸움닭이 벼슬을 세우듯 잔뜩 곤두서있고, 다른 한쪽에선 구렁이 담장 넘듯 의뭉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다들 눈앞의 이익을 챙기느라 근본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늘을 떠받칠 만큼 크고 반듯한 영혼의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원리를 붙잡아야 삽니다. 이제 달력상으로는 21세기입니다만, 아직도 20세기의 가치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는 21세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저는 그것을 '공존'이라는 말 한 마디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함께 살 줄 안다는 것

함께 살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인간의 징표가 아니겠습니까? 너를 위해 나의 욕망을 절제하고, 만물이 다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자각하면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붙잡아야 할 가치관입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신 분들은 아시겠습니다만 성경의 윤리는 "서로 함께"의 윤리라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인간을 가리켜 "Mit-einander-Sein)이라 했는데, 그 말은 인간이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도 '더불어'는 '더한다' 할 때의 '더'와 '속해 있다'는 뜻의 '붇'(불→屬, 附)이 결합된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해 있다는 말이지요. 남을 행복하게 해야 내가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인생의 비밀입니다.


우리의 소명: 거룩함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하다고 하면 흔히 우리의 일상과는 그다지 깊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떠난 거룩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거룩은 내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교인들에게 아주 신령하다고 존경받는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런데 그분은 집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아내를 학대하고, 아이들에게는 아주 폭군이었대요. 어느 날 참다못한 사모님이 이불 보따리를 챙겨서 이사를 했어요. 강대상으로요. 당황한 목사님이 '당신 왜 그러냐'고 따져 묻자 사모님은 단호하게 대답했어요. "나는 여기에 서있는 당신하고 살고 싶어요."

기가 막힌 이야기이지요. 문제는 안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누가 거룩하지 않겠어요? 중요한 것은 삶이 아니겠어요? 행실에서 心中이 드러난다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마7:21)고 하셨던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주어진 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 만물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가 거룩한 사람입니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떨고 있을 멍멍이 생각에 잠을 못 이루다가 엄마 몰래 자기 이불을 들고 나가 덮어주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 아니겠어요? 남의 아픈 사정을 헤아려주고,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 기쁨을 심어주려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본문은 거룩한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추수를 하면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밭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것, 도적질·속임수·거짓말을 멀리하는 것, 힘있다고 해서 이웃을 해치거나 이웃의 몫을 가로채지 않는 것, 듣지 못한다고 해서 귀먹은 사람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 앞 못보는 이 앞에 장애물을 놓지 않는 것,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것, 다른 이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지 않는 것, 힘없는 이웃을 막다른 골목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것,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보았을 때는 애정을 가지고 책망하는 것…남을 존중하고 아끼고 돌보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하나님

간디의 제자 가운데 비노바 바베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인도에서는 간디 이상의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데 그의 정신 세계의 바탕을 만들어준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거지가 문간에 찾아오면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법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체격이 건장한 거지 한 사람이 찾아왔고 어머니는 평소대로 그에게 적선을 베풀었습니다. 비노바는 못마땅하여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저 사람은 아주 건강해 보여요. 그런 사람에게 적선을 하는 건 게으름만 키워주는 것라구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은 그들에게도 좋지 않은 거예요. [기타]에도 나오잖아요. 순수한 선물은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구요."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듣고는 아주 차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냐, 우리가 무엇인데 누가 받을 만한 사람이고 누가 그렇지 못한 사람인지 판단한단 말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문간에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다 하나님처럼 존중해 주고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베푸는 거란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

비노바의 아버지는 종종 생활이 어려운 학생을 집에 데려다가 묵게 했어요. 어머니는 먹다 남은 음식이 있으면 꼭 당신이 드셨고, 그게 좀 많으면 아들에게도 먹게 했지만, 그 학생 손님들에게는 꼭 갓 지어낸 신선하고 따뜻한 음식을 차려주셨습니다. 비노바는 그게 좀 못마땅했나봐요. 그래서 어머니께 항의 섞인 투정을 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늘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아직도 어머니 스스로 차별을 하세요. 어머니는 식은 음식은 늘 나에게만 주시고 그 학생에게는 한 번도 주시지 않잖아요. 어머니는 우리를 동등하게 대해 주시는 게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셨습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나는 너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대하고 있다. 나는 너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고, 또 편애하고 있어. 왠지 아니? 나는 아직도 너를 아들로 생각하고 있고, 그 학생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야. 내가 너마저 그렇게 볼 수 있는 때가 되면 이런 차별은 없어질 거다."({비노바 바베}, 칼린디 지음/김문호 옮김, 실천문학사, 65-67쪽)


거룩의 욕망을 회복하라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를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그를 자기 이익의 도구로, 쾌락의 도구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것은 하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두 가지의 모순된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영적인 목적을 추구하려는 욕망입니다. 이 두 가지 욕망은 우리 속에서 서로 갈등하면서 공존합니다. 그런데 현대는 이기적인 욕망을 부풀리는 시대입니다.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이기적인 욕망을 부풀리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믿으면 복 받는다고 가르치는 데, 그 복이라는 게 매우 이기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보다 잘 되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점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더 높은 열망, 곧 거룩을 지향하는 욕구를 잃어버린 채 삽니다. 이제 거룩의 열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닙니다. 행동입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길입니다. 얼마 전에 저는 청년들에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 운동'에 능동적으로 동참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한 청년으로부터 작지만 어느 환경 단체의 회원이 되어서 후원금을 내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참 고맙고 대견했습니다.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할 때 즉시 결단하고 실천해야 우리 영혼이 자랍니다. 그 청년은 박봉을 쪼개 후원금을 낼 것입니다. 그의 주머니에서 돈은 줄어들겠지만 기쁨의 샘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올해 우리 교우들이 그런 선한 일, 아름다운 일에 많이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일, 선한 일은 혼자는 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군가의 동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동료가 된다는 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이들과 이해관계를 넘어 동료가 될 때 세상은 한결 아름답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리자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신 것처럼, 이웃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누구보다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어떤 특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나는 너를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대리자다' 생각하면서 사십시오. 누구를 대하든 하나님을 대하듯 하며 사십시오. 비록 자주 넘어지겠지만 실망하지 마십시오. 다시 일어나 그 길을 걸으십시오. 올 한 해가 우리 모두의 삶이 거룩해지는 원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