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29. 삶의 기본 세우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 17:19-22
설교일시 2011/07/17
오디오파일 s20110717.mp3 [12713 KBytes]
목록

삶의 기본 세우기
렘17:19-22
(2011/7/17)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유다의 왕들이 출입하는 ‘백성의 문’과 예루살렘의 모든 성문에 서서, 그들에게 전하여라. ‘이 모든 성문으로 들어오는 유다의 왕들과 유다의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아, 너희는 나 주의 말을 들어라. 나 주가 말한다. 너희가 생명을 잃지 않으려거든, 안식일에는 어떠한 짐도 옮기지 말고, 짐을 가지고 예루살렘의 성문 안으로 들어오지도 말아라. 안식일에는 너희의 집에서 짐도 내가지 말아라.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 태풍을 예감하며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계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는 지금 길고 긴 장마의 끝자락에 서있습니다만 제6호 태풍 망온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그저 좀 불편한 정도이지만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가혹한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해안 바닷가에 사는 한 후배 목사로부터 그곳에 사는 것이 행복하지만 태풍이 다가올 때마다 느끼는 그 스산한 긴장감만은 싫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몸으로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느낌일 겁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떤 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은 왜 그리 꼭 들어맞는지 모르겠다고 탄식합니다. 대규모 자연 재해가 다가올 때는 동물들이 먼저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은 자연 세계에서 감지되는 작은 변화를 통해 미구에 닥쳐올 일들을 가늠하기도 합니다. 똑같은 현실도 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천양지차로 인식됩니다. 위기가 닥쳐오고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둔감하다고 해야 할지 우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위기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약한 사람이거나 숙명론자일 겁니다. 똑같이 위기를 인식해도 달리 반응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위기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보다는 그 위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뒤집어씌우는 사람들입니다. 일종의 마녀 사냥 혹은 희생양 만들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본질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입니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환기시설이 잘 안 되었던 광산은 늘 가스 중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광부들이 갱도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를 가지고 들어간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산화탄소에 민감한 카나리아가 노래를 그치거나 죽으면 광부들은 즉시 갱도를 벗어나야 했습니다. 잠수함 수부들은 잠수함에 남은 산소를 측정하기 위해 토끼를 가지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토끼 행동에 이상이 생기면 수부들은 산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는 즉시 물 위로 떠오르곤 했다 합니다. 카나리아나 토끼는 위험을 예고하는 나팔수들인 셈입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팔수들이었습니다. 위험을 남보다 먼저 감지하고 사람들에게 경고하여 위험에 대처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의 말이 경청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습니다. 예언자는 카나리아나 토끼의 운명을 살던 이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언자로 부름 받은 예레미야가 맨 먼저 본 것은 두 가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는 살구나무 가지였고, 다른 하나는 물이 끓는 솥이 북쪽에서부터 넘쳐흐르는 광경이었습니다. 살구나무 가지를 뜻하는 히브리어 ‘사케드’는 ‘지켜보다’는 뜻과 연관되니까 그것은 예레미야의 소명을 나타내는 환상인 것 같습니다. 예언자는 ‘보는 사람’(seer)입니다. 물이 끓는 솥은 자기 확장의 욕망에 사로잡힌 바벨론 제국의 상징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미구에 닥쳐올 위기를 내다보면서 백성들에게 경고의 나팔을 울렸습니다. 그릇된 삶의 방식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 터전이 흔들릴 때
그는 이스라엘의 죄상을 아주 냉정하게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양한 죄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아주 간명하게 요약했습니다.

“나는 이 백성에게 나의 율법을 주면서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버리고,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고집대로 살고, 조상이 섬기라고 가르쳐 준 바알 신들을 따라다녔다.”(9:13-14)

죄의 뿌리는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한 백성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사실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로 표현되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무시하고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살 권리를 인정하고 또 보살피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입니다.

집 없는 이들의 쉼터를 제공해주는 엠마우스 운동을 전개했던 피에르 신부가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엠마우스의 한 소년이 그에게 묻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지요?” 피에르는 그에게 친절하게 대답했습니다. “몇 주 전, 네가 춥고 배고프고 땀에 젖은 채 지쳐서 돌아오던 날을 생각해보렴. 너는 종일 일하느라고 배가 고팠지만 한 할머니의 살림을 돌봐주었지. 저녁에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너는 내게 ‘신부님, 오늘 하루 일은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라고 말했지. 그래서 나는 네게 말했어. ‘그런 즐거움을 절대로 잊지 말거라. 너의 가슴속을 즐거운 노래로 가득 채우는 이 순간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단다. 너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감미로운지를 맛본 거야. 내가 언젠가 말했지? 세상의 모든 도서관을 뒤져 신학을 통째로 안다 해도 하나님을 알지는 못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오늘 너는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맛볼 수 있었다면 너는 벌써 하나님을 만난 거야.’”(아베 피에르,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다출판사, 128쪽을 풀어 옮김)

죄의 두 번째 뿌리는 자기 고집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삶의 이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보다도 더 악한 일을 하였다. 너희는 각자 자신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고집대로 살아가며, 내 명령을 따라 순종하지 않았다.”(렘16:12) 이기심과 과도한 욕망으로 얼룩진 ‘자아’의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고집’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조율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능이나 욕구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될 때는 악이 됩니다. 자아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면 참 피곤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늘 무엇을 요구하기만 할 뿐 나누고 양보할 줄은 모릅니다. 오히려 피해의식이 많습니다. 우리가 인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에서 자꾸만 계산기를 두드리지 말고 흔쾌하게 양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배려심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어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자기로부터 해방되는 길임은 분명합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도 무너지고, 이웃에 대한 배려도 무너진 시대였습니다. 기둥은 기울고 지붕은 새고 구들장은 주저앉은 형국입니다. 서로를 사랑하지도 아끼지도 신뢰하지도 않으니 함께 힘을 합해 집을 고칠 생각도 없습니다. 파멸은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는 무너지는 그 집을 어떻게든 지탱해보려 안간힘을 다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여쭙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대답을 듣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입니다.

• 뜬금없는 명령
정말 뜬금없는 명령입니다. 지금 위기가 목전인데 한가하게 안식일을 지키라니요?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과 만날 때가 많습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요단강을 건너 이제 막 여리고 성 앞에 이르렀을 때, 그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할례를 베풀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술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막강한 적을 앞에 두고 할례를 베풀라니요? 하지만 그 의례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전쟁의 승리로 이어졌음을 우리는 압니다.

‘이 백성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안식일을 지켜라.’ 여전히 쉽게 풀이가 안 되는 명령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저는 이것을 생의 중심을 꼭 붙잡으라는 명령으로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시작되어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의 시간입니다. 그날은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기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까닭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도 이렛날 쉬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신명기는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 해도 일을 쉬는 것과 구원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안식일 계명은 유대인들이 인류에게 전해 준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아니라 해도 온 세계 사람들은 일주일 중에 하루를 쉽니다. 안식일이 보편화된 것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일주일 중 하루를 쉬는 것이 유대인들의 발명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바벨론 사람들도 일주일 중 하루를 시간과 죽음의 신인 Saturn을 기리기 위해 노동을 중단했습니다. 그날은 슬픔과 자책의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성격이 좀 다릅니다. 그날은 먹고 마시고 사랑하면서 생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출애굽기 31장 17절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이유를 흥미롭게 제시합니다. “나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숨을 돌리다’(yinafash)라는 동사입니다. 이 말을 의역하자면 ‘그는 그의 영혼을 되찾았다’입니다. 하나님도 쉼을 통해 영혼을 되찾았다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당혹스럽지만, 그것을 은유적으로 받아들이면 상당히 강력한 메시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면 인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쉴 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영혼을 상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혼을 상실했다는 말은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망각하고 산다는 말일 겁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소유와 누림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 말고 어떤 존재로 살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 안식일의 확장
안식일은 사람됨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안식일 계명이 안식년과 희년으로 확장되었음을 잘 압니다. 안식년에 땅을 경작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땅의 지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 땅에서 나는 것을 가난한 이들과 짐승들의 몫으로 인정하라는 요구입니다(출23:10-11). 희년이 되면 빚에 몰려 땅과 집을 남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그것을 돌려받게 됩니다. 종으로 살던 사람들도 자유인으로 회복됩니다. 안식일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안식년과 희년은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실을 갱신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신 엄중한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따르지 않을 때 인간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정글이 되고 맙니다.

정치권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여러 사안들, 즉 복지 증대, 무상 급식, 반값 등록금 문제를 정파 간의 이해관계를 넘어 신앙의 눈으로 보면 답은 분명합니다. 누구를 지지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이 요구하고 있는 바는 성경이 지시하고 있는 바의 세속적 번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 많지만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위기에 처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도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문제에 마술적인 해결책은 없습니다. 저는 만병통치약을 믿지 않습니다. 겪어야 할 일은 겪어야 합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의 속뜻은 이것일 겁니다. 지금 인생의 곤경에 빠진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일시에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직접 세상에 개입해서 문제를 푸실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우리 속에 힘을 불어넣으시어 스스로 일어서도록 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법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전지 작업과 같습니다. 뿌리를 튼튼히 하기 위해 거름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왕들이 출입하는 ‘백성의 문’과 예루살렘의 모든 성문에 서서, 생명을 잃지 않으려거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명령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요구가 제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터전 위에 인생의 집을 지으라는 요구로 들립니다. 어렵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휘황한 소유의 낙원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기실 알고 보면 그것은 낙원이 아니라 쉼이 없는 지옥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삶의 근본을 바로 세우라는 요구입니다. 생명이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장마가 그치고 무더위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쉴 곳을 찾아 떠나기 시작합니다. 참 쉼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주어지는 선물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무더운 여름날, 여러분 모두의 가슴에 하나님을 모시는 성소가 마련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07월 17일 12시 07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