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4. 나를 아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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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2:23-25
설교일시 20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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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시는 주님
요2:23-25
(2001/1/28)


타타타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데 몇 해 전에 유행했던 김국환의 노래 [타타타]가 떠오르더군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김국환씨의 높고 맑은 음색에 담긴 허탈한 듯하면서도 다소 초연한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저는 그분의 목소리가 드러내는 다소 슬픈듯한 울림을 좋아했었습니다. 그는 인간관계가 유리처럼 투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다고 애달아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도 나를 다 알 수 없고, 나 또한 당신을 다 알 수 없다. 그러나 모른다고 해서 슬프지는 않다. 다 안다면 인생이 무슨 재미냐. 그저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현실을 소중히 보듬어안고 나가는 거지.' 생에 대한 이런 태도가 잘 담긴 것이 이 대목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은 바람으로, 비오면 비에 젖어사는 거지." 여기까지 노래한 다음에 가수는 자기의 고백을 다시 한번 음미하듯이 말합니다. "그런거지, 음 어허허." 그리고 그런 자기긍정의 탄력을 받아 마침내 이런 고백에까지 나갑니다. "산다는 건 좋은 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마지막에 이르러 인생의 손익계산서를 들이미는 것이 좀 못마땅하지만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린 행복하다고 하는 그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알지 못하는 '병'

어쩌다 유행가 가사를 해설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만 저는 이 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이상한 착오를 일으키곤 했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하는 대목을 저는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나'를 알겠느냐" 하고 제법 심각하게 불렀던 것입니다. 가장 잘 알 것 같으면서도 가장 모를 것이 '나' 아닙니까? 유명한 C.F 아시지요? 촌스런 복장의 젊은이가 창가에 있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나는 누구예요?" 아버지는 별로 심각한 내색도 없이 말합니다. "나도 물러." '나'를 모르는 것은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정신적 질환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세월이 가도 나를 더 잘 알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있답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안타까운 것은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가 일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가 고린도전서13장 12절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
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하나님 앞에 설 때만 우리 자신의 본딧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오늘 본문은 아주 짧막한 기사입니다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유월절 축제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도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고, 가난한 사람들, 살 맛 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던 것 같습니다. 왜 안 그러셨겠어요? 산 위의 동네가 드러날 수밖에 없고, 깊은 계곡을 가득 채우는 난초 향기를 숨길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든 일그러진 생명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게 그분의 본질이었으니까요.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들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다."(23b)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기분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들은 알아보긴 했거든요. 하지만 저들의 믿음의 뿌리가 너무 얕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들은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표적이 없었다면 믿지 않았겠지요? 그들은 휘황한 표적 너머, 예수의 핵심에는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실 뒤에 나오는 3장의 이야기를 예비하고 있습니다. 니고데모 이야기 아시지요? 그는 예수님께 와서 나는 당신을 잘 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 근거로 그가 제 시하는 것이 바로 표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정말 예수님을 제대로알아본 것일까요? 안타깝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거죽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가 '들어야 할 소리'였습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식으로 예수님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의 심령 깊은 곳을 찌르는 촌철살인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빙빙 둘러서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정곡을 찌르십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바로 믿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거듭남"입니다. 육체를 따라 살던 옛 사람이 죽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새 사람이 되기 전에는 예수를 참으로 안다 할 수 없습니다. 은혜스러운 간증을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이들도 있습니다. 기도원과 교회에서 나타나는 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본령인양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표적을 좇는 사람들은 그 표적에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 표적이 가리키는 분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표적은 그야말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인데, 사람들은 달(裏)을 보지 않고 손가락(表)만을 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이 행하신 기적을 사람들 앞에 떠벌리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소문 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통하여 나타난 기적을 떠벌리기를 좋아 합니다. 그래야 신령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많이 나타나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깊은 곳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아시는 주님

예수님은 표적을 보고 당신께 나온 사람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
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4-25)

예수님은 소위 당신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당신 삶의 성공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교인 수가 아무리 늘어나도 그 늘어남에 흐뭇해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을 다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뱃속까지 훤히 다 보고 계셨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나의 뱃속까지 훤히 보고 계시다고 생각하니 두렵습니다. 나의 음흉한 욕심, 내 속에 있는 두려움, 의심, 누군가에 대해 께림칙하게 여기는 마음, 미움, 질투…

주님은 우리의 뱃속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그래서 투박하기만 한 갈릴리의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베드로)를 보셨습니다. 냉소적이지만 진지한 나다나엘에게서 "거짓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을 보셨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함께 죽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의 큰 소리 속에서 그의 배신을 보셨습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삭개오에게서 새 삶에 대한 열망을 보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의 몸짓 속에서 당신을 향한 한없는 사랑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시지 않습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 듣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보시고, 가장 내밀한 영혼의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닿는 곳

주님은 나에 대해 알기 위해 누구의 증거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아무리 이런저런 사회적 장식들로 치장을 해도 주님은 우리의 본질을 알고 계십니다. 목사니 장로니 권사니 하는 직분도, 박사니 교수니 사장이니 하는 이름도 소용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강한 척 해도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깨끗한 척 해도 주님은 우리의 허물을 잘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곳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무정한 심판자의 눈으로 우리를 보시지 않습니다. 연민의 눈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을 도
우실 수 있습니다."(히2:18)
"그는 자기도 연약함에 휩싸여 있으므로, 무지해서 유혹에 빠진 사람들을 너
그러이 대하실 수 있습니다."(히5:2)

히브리서 기자의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가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의지하지는 않으시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의 필요에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직함입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않으려는 맑은 마음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실 수 없을만큼 큰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 주님은 인자한 눈으로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날마다 어두운 욕망을 비우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사십시오. 하나님의 눈길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몸과 마음을 돌이켜 주를 향하십시오. 그러면 아무리 어두운 곳에서라도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모두의 삶이 맑고 그윽한 향기로 차오르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