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48.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13:11-14
설교일시 2011/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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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
롬13:11-14
(2011/11/27, 대림절 첫 주)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압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처음 믿은 때보다 더 가까워졌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합시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십시오. 정욕을 채우려고 육신의 일을 꾀하지 마십시오.]

• 님이 오신다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 첫 주입니다. 밖으로 향하던 우리 마음을 거두어 오시는 주님께 바쳐야 할 시기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스산합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안이 통과되면서 정국은 또 다시 격랑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협정의 체결이 가져올 후과後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고,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든 공히 염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공공서비스가 위축될 것이라는 점, 서민 생계 안정을 위한 정책 자율성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점, 중소상인과 농어민들의 피해가 심각해질 것이라는 점 등입니다. 성서의 중심 가르침이 ‘약자들에 대한 우선적 배려’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신앙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메시야 오시기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들은 대개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을 겁니다. 저는 하나님이 극진히 마음 쓰셨던 사람들, 곧 ‘히브리’라고도 불리우고 ‘땅의 사람들’이라고도 지칭되는 최하층민들은 마치 겨울나기 식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망초, 고들빼기, 지칭개, 냉이는 지면에 납작하게 엎드려 겨울을 납니다. 땅에 엎드려 있으니 겨울의 찬바람을 피할 수 있고, 줄기가 없으니 밟혀도 꺾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겨울나기 식물의 모양이 마치 장미꽃 모양과 같다 하여 그것을 로우젯(로제트, rosette)이라고 부릅니다. 겨울나기 식물들이 봄을 기다리듯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메시야 오시기를 기다리는 역사의 장미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립니까? 아니면 영원히 오시지 않을 듯이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이즈음이면 함석헌 선생님의 시 <님이 오신다>를 자꾸 읽습니다. 시는 님을 기다린다면서 그만 늦잠이 들어버린 사람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뜬 그는 당황합니다. 온 방안은 허투루 늘어놓은 것들로 어지럽기 그지없습니다. 쓸자, 닦자, 고치자, 물을 뿌리자, 묵고묵고 앉고앉은 먼지를 다 닦자 하지만, 마음만 바쁠 뿐입니다. 그런데 님이 벌써 오셨습니다. 당황하는 그를 다독이시며 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애 이 애 걱정마라,/나도 같이 쓸어주마,/나 위해 쓸자는 그 방/내가 쓸어 너를 주고,/닦다가 닳아질 네 맘 내 닦아주마.” 주님이 오시자 밝히자면서 못 밝힌 방이 저절로 밝아지고, 맑히자면서 못 맑힌 맘이 맑아집니다. 저는 이보다 은총을 더 잘 설명하는 말을 알지 못합니다.

• 잠에서 깨어날 때
바울 사도가 말하듯이 지금은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 곧 은총의 때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잠’은 ‘눈을 감고 쉬는 의식 없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 아니라, 영적인 게으름, 나태 혹은 무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런 잠에 빠져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잠에 빠진 상태’를 이 세대의 가치관에 동화(conform)되어 살아가는 것으로 요약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행복의 조건을 마련하느라 동분서주합니다. 하지만 행복은 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저만치에 있을 뿐 손에 넣을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이, 더 편리하게, 남과 구별되게…”. 이것이 이 세대가 우리를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구호입니다. 그 구호에 맞춰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분주하다 보니, 이웃들에게 무관심해지고, 부드럽던 마음은 묵정밭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12:15)라고 권고하지만 우리는 남들의 기쁨을 내 일처럼 기뻐하지 못하고, 우는 이들의 암담한 처지를 보아도 아파하지 않습니다. 삶이 어려워서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에 비추어 자기를 반성하거나 돌이키려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현실이 암담한 것은 정치적 혼돈이나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잃어 성정이 거칠어지고, 공동체의 따뜻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요즘 많은 고등학교 학생들이 노스페이스라는 브랜드의 점퍼를 입고 다닌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상당히 비싼 옷인데도 학생들은 그 점퍼를 마치 교복처럼 입는다고 합니다. 학자들은 그 이유를 학생들의 좌절감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적 위주 사회에서 불안감과 좌절감을 느낀 학생들이 또래집단 다수가 소비하는 고가 제품을 동조 소비함으로써 나도 주류에 포함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것입니다(한겨레신문, 11월 21일 자). 가슴이 헛헛한 사람은 뭔가를 소유함으로 존재의 이유를 확인받고 싶어합니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의 분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는 삶에는 두 가지 존재 양식이 있다 했습니다. 하나는 가짐의 존재 양식(having mode of existence)이고, 다른 하나는 있음의 존재 양식(being mode of exsistence)입니다. 청소년들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소유에 대한 관심이 존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묻기보다는 소유를 통해 자기 가치를 입증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소비사회는 지칠 줄 모르고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일단 그 과정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제는 그 혼곤한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일단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말해 예수가 우리 속에 들어오면 지금까지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추구하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됩니다. 마음 씀이 달라집니다. 한마디로 변화된 (transform)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전에는 그저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지나가곤 했던 잠언의 말씀이 요즘은 금과옥조처럼 여겨집니다.
“고난받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불행한 날이지만, 마음이 즐거운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잔칫날이다. 재산이 적어도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이, 재산이 많아서 다투며 사는 것보다 낫다. 서로 사랑하며 채소를 먹고 사는 것이, 서로 미워하며 기름진 쇠고기를 먹고 사는 것보다 낫다.”(잠15:15-17)

이것을 개인 혹은 가정에 국한해서 생각하지 말고 우리 사회 전체와도 관련시켜 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재화의 배분이 공정하지 않다며 서로를 불신하고 적대시하며 산다면 GNP가 늘어나는 것이 뭐 그리 좋은 일이겠습니까? 경제성장의 열망은 따뜻한 세상의 꿈으로 조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룩한 삶이란 추수 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몫으로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 버릴 것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로 옷 입기 위해서는 먼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먼저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어리석은 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나발’은 호사한 연회에 취하고 술에 취해 복수를 위해 다윗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등장하는 부자는 즐겁고 호화로운 삶에 취해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도취하면 이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삶은 단출하고 소박해야 합니다. 호사한 연회와 술 취함은 성적인 일탈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바울이 바로 이어 음행과 방탕에 빠지지 말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고단한 현실을 잊기 위해 쾌락에 몸을 맡깁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존엄한 인격이 아닌 수단으로 대합니다. 그것은 자기는 물론 그 대상까지도 비인간화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처럼 큰 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상대방을 곱게 보거나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갈등과 폭력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세상의 모든 악덕의 뿌리는 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철수 화백의 판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비탈진 언덕에 있는 자그마한 집과 바람에 휘청이는 나무를 그린 후 거기에 이런 글을 적었습니다.

“세상은 갈수록 험해집니다. 그 안에 살면서 덜 망가지고 상처받지 않는 건 제 몫입니다. 상처받은 짐승이 되고 나면 남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지요. 매일 듣게 되는 유괴, 납치살해, 갈취, 강도…가정 폭력, 사기, 뇌물수수, 협박, 공갈…. 그런 일에서부터, 소비중독과 성매매와 폭음, 폭식에 이르기까지, 상처받은 사람이 저지르는 일은 다양하기도 합니다.”(이철수, <밥 한 그릇의 행복 물 한 그릇의 기쁨>, 45쪽)

‘상처받은 짐승이 되고 나면 남에게도 상처를 입히기 십상’이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해 들어 제가 자주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어떤 것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누구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함부로’라는 부사의 사전적 의미는 ‘생각함이 없이 마구’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데서 이 모든 일들이 생겨납니다.

• 인생에는 스승이 필요하다
가야 할 길이 참으로 멉니다. 젊은 시절부터 저를 사로잡은 한 마디가 있었습니다.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이다’(Mensch-sein ist Mensch-werden).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제시하는 인간론의 핵심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다 사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우리가 늘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사람됨이라는 과제를 부여받은 존재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고후2:15)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몸에 뿌린 향수 말고 우리에게서 발산되는 존재의 향기가 그리스도의 향기라면 우리를 통해 상처 입은 사람들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날마다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복음서를 가까이 하십시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음미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대하셨는지 묻고 또 물으십시오. 그 마음과 하나 되기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 마음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십시오. 그 마음으로 사랑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참 사람됨의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이십니다. 세상에는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으로 이끈 말씀이기도 하기에 그의 일화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수사학 교수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큰 꿈을 품고 로마에 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을 시작했고 몇몇 학생을 집으로 모아 수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동안 만나왔던 거칠고 왈패 같은 학생들은 없었지만 로마의 학생들은 아주 약아빠졌습니다. 월사금을 안 주려고 다른 선생을 찾아간다며 신의를 배신했습니다. 학생들은 신의보다는 돈과 향락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학생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덧없는 놀음을 즐기고, 만지면 손이 더러워지는 진토 같은 이익을 사랑함으로써 간음질을 하고, 하나님을 젖혀두었습니다.”

그런 현실에 실망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우연한 기회에 밀라노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평생의 스승인 암브로시우스를 만납니다. 아직 예수를 영접하기 전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철없는 천재 아우구스티누스를 아비답게 맞아주었고, 그의 존재를 주교답게 기뻐해주었습니다. 자기를 사랑으로 받아들여주는 큰 마음과 만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마음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그런 변화는 암브로시우스가 진리를 가르치는 큰 스승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예수를 가리키는 이정표였습니다.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승도 필요하지만 공동체의 지원도 필요합니다. 물론 혼자서도 진리 공부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에 이르는 진리는 지식과 관념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몸을 부딪치면서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권고합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기쁨에 공감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진리의 사람으로, 주께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줍니다.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다른 이들의 삶과 연루되는 것을 꺼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은 그런 얽힘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지금이야말로 자다가 깨야 할 때입니다. 옛 사람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할 때입니다.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 말고, 주님의 생명에 주체적으로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며 사십시오. 대림절 기간 내내, 오시는 주님을 정성껏 모심으로 새로운 삶에 눈을 뜨는 복을 한껏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1년 11월 27일 09시 30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