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53. 평화가 깃들기를! (송구영신 예배)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시128:1-6
설교일시 2011/12/31
오디오파일 s20111231.mp3 [12016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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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가 깃들기를!
시128:1-6
(2011/12/31, 송구영신예배)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명에 따라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복을 받는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네 상에 둘러앉은 네 아이들은 올리브 나무의 묘목과도 같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복을 받는다. 주님께서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기를 빈다. 평생토록 너는, 예루살렘이 받은 은총을 보면서 살게 될 것이다. 아들딸 손자손녀 보면서 오래오래 살 것이다. 이스라엘에 평화가 깃들기를!]

• 돌이켜 감사
주님의 은총이 이 자리에 동참한 모든 이들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서서히 2011년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묵은해와 작별하기 전에 가만히 우리가 걸어온 시간의 흔적을 가늠해 봅니다. 어떠셨습니까? 순례자로서의 삶이 행복했습니까? 얼마나 깊어지셨습니까? 얼마나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얼마나 맑아지셨습니까? 얼마나 따뜻해지셨습니까? 삶이 너무 힘겨워 자기 존재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살지는 않았습니까?

어떤 이들은 지난 1년을 ‘수무분전手無分錢’, 즉 손에 돈 한 푼 남지 않았다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참 안쓰러운 현실입니다. 국민의 거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의 소득이 줄어든 반면 1억 이상의 고소득자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합니다.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소득뿐 아닙니다. 사회적 갈등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전보다 더 위험한 곳이 된 것 같습니다.

참 어려운 시절입니다. 우리는 금년 벽두부터 일본의 동북부 지역을 덮친 쓰나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간 현실을 목도했습니다. 압도적인 힘으로 밀려와 인간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 그 검은 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재앙은 우리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이어진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핵에 의존하는 에너지 정책에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여름철의 긴 장마와 우면산 산사태 그리고 사상 초유의 정전 사태를 겪으며 우리는 인간의 문명이라는 게 얼마나 허약한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절감했습니다. 아랍에서 일어난 민주화의 불길과 1%에 속한 이들의 탐욕을 폭로한 월가 점령 시위, 한미 FTA 비준 동의안 통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 그리고 민주화 운동의 대부인 김근태 님의 죽음까지 마치 지뢰밭을 걸어온 느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 산 자의 땅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보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동행이 되어 주셨습니다. 에벤에셀, “우리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와 주셨다”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이번 주 중에 시편을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놀랍고 든든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시138:7)
“주님께서 나의 앞뒤를 두루 감싸 주시고, 내게 주님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시139:5)

우리 발이 수렁에 빠져 들어갈 때 주님은 우리를 건져 반석 위에 세우셨습니다. 메마른 땅을 걸어갈 때도 주님은 친히 그늘이 되어 주셨습니다. 위험한 일을 만날 때는 방패가 되어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삶에 지쳐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 때면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어 일어서도록 해주셨습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감사의 기도를 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 주님을 경외하는 자의 복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우리 앞에 있습니다. 주어진 시간을 복되게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생명을 주신 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시편 128편을 통해 아름다운 삶, 복 받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시인이 말하는 복 받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주님의 명령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너무 자주 들어서 식상한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 다른 비결이 없습니다. 경외敬畏라는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뜻이지만, 그 심층적 의미는 우리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 분의 뜻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을 친근히 대하시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을 늘 일러주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님께서는,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의논하시며, 그들에게서 주님의 언약이 진실함을 확인해 주신다”(25:14)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기 삶을 소명으로 이해하기에 매 순간 하나님이 자기를 통해 하시려는 일을 여쭙고, 그 뜻을 수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복의 매개 혹은 통로가 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생명이 우리를 통해 세상과 우리 이웃들의 삶에 흘러간다면 그보다 멋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짐짓 외면하며 삽니다. 우리 관심의 화살표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보라, 섬기라, 주라는 주님의 부탁은 거절되기 일쑤입니다. 내 코가 석 자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런 부탁을 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 신앙의 역설이 있습니다.

시인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복이란 것이 참 맹랑합니다. “네 손으로 일한 만큼 네가 먹으니, 이것이 복이요 은혜이다.”(2) 조금 실망스러우신가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들이 이 구절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이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 욕망의 그릇이 큽니다. 그러니까 늘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당연히 감사할 줄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인은 우리가 일한 만큼 먹는 것이 복과 은혜라고 말합니다. 참 조촐하고 담백하고 깨끗한 복이요 은혜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행복은 여전히 저만치에 있습니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이 갖고, 없는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월가 점령 시위는 바로 그런 세상을 바로잡자는 것이었습니다. 가난도 문제이지만 과잉 혹은 잉여도 문제입니다. 풍요로움은 사람들을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인간관계를 어긋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새해에는 이런 담백하고 깨끗한 복과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의 또 다른 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네 상에 둘러앉은 네 아이들은 올리브 나무의 묘목과도 같다.”(3)

아내와 아이들을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에 빗대는 이런 식물적 상상력이 참 좋습니다. 포도나무는 평화와 풍요로움의 상징입니다. 아내의 존재 자체가 가족 구성원들에게 평화로움과 넉넉함을 전해준다면 그 가정은 분명 행복할 것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지금도 지중해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귀히 여기는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올리브’(olive)를 ‘올-리브(all live)’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모두를 살린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올리브 묘목처럼 자라는 것을 본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해에는 교우 여러분의 모든 가정이 이런 복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시온에 내리시는 복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복은 개인적인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떠하든 나만 홀로 누리는 행복이란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서로 함께 누리는 행복을 추구해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이 문밖에 있는데 홀로 잔치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불의에 희생된 사람의 피울음 소리가 들려오는데 홀로 콧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식구, 친구, 동료, 교우 등은 우리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소중한 타자들입니다. 그들 중 누가 아프면 우리 마음도 저려옵니다. 그들 중 누가 곤경에 처하면 우리 또한 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마치 자신의 골육지친인양 대하셨습니다. 주님이 온 세상의 구원자인 것은 바로 그 마음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은 주님께서 시온에서 복을 내리시기를 빈다면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평생토록 예루살렘이 받은 은총을 보면서 살게 될 것”(5)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평화의 비전은 저절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답게 살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따뜻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강자 독식 사회가 아니라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회, 이익이 중심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따뜻한 공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좌파니 우파니 하며 서로를 도외시하거나 세대 간의 단절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 순간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비끌어매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은 그런 평화의 비전을 <인다라의 구슬>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구 마을 저편에서 그대가 울면 내가 웁니다
누군가 등불 켜면 내 앞길도 환해집니다
내가 많이 갖고 쓰면 저리 굶주려 쓰러지고
나 하나 바로 살면 시든 희망이 살아납니다”

어두운 세월 이웃이 켜든 등불에 의지해 걷듯, 우리 또한 이웃들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나 하나 바로 살면 희망이 살아납니다. 새해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잘 보살피며 사십시오.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과 슬픔과 짐을 나누기 위해 시간과 물질을 써본 사람들은 그들과의 접촉을 통해 오히려 우리 속에 있던 내밀한 상처가 치유됨을 알 수 있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앞서 말한 시에서 새벽 찬물로 얼굴 씻고 서툰 붓글씨로 자기 마음에 “오늘부터 내가 먼저!”라고 쓰고는 이렇게 다짐합니다.

“내가 먼저 인사하기
내가 먼저 달라지기
내가 먼저 정직하기
내가 먼저 실행하기
내가 먼저 벽 허물기
내가 먼저 돕고 살기
내가 먼저 손 내밀기
내가 먼저 연대하기
무조건 내가 먼저
속아도 내가 먼저
말없이 내가 먼저
끝까지 내가 먼저”

이 마음이면 됩니다. 이 마음이 평화를 만드는 마음이고 천국을 빚는 마음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시인의 이런 다짐을 내면화하고 살기 바랍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한 해 내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01월 01일 00시 31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