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6.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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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43:16-21
설교일시 20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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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드시는 하나님
사43:16-21
(2001/2/11)


좋은 체질을 자랑하지 말라

얼마 전 주우탁 집사님을 따라 체질 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휘트니스 클럽의 트레이너는 컴퓨터 분석결과를 놓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체지방이 거의 없는 편이어서 지방을 더 먹는 게 좋겠다고도 했고, 오른쪽과 왼쪽 근육의 균형이 맞지 않으니 왼쪽 운동을 더하라고도 했습니다. 체내에 수분이 부족하니까 물을 많이 먹으라고도 했습니다. 전체적인 평점은 90점이었습니다. 그 점수는 자기 회원 700명 가운데 4명 밖에 없다면서 대단히 강인한 체질이라며 놀라워했습니다. 무슨 운동을 지속적으로 했냐고도 물었습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내심 흐뭇했습니다. 내 몸 상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받은 셈이니까요. 그런데 다음에 한 체력 검사가 문제였습니다. 트레이너는 체력 검사 결과표를 보더니 또 한 번 놀라더군요. 체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체력이 평균 이하여서 말입니다.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좋은 체질을 가지고도 체력이 바닥이 되도록 방치했다니 이게 될 말인가 싶더군요. 몸에 관한 한 나는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게으른 종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체질만 좋으면 뭐해요? 체력이 따라주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 순간 또 직업병이 도지더군요. 저는 스스로를 자책했습니다. '이건 꼭 알기는 아는 데 실천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구나. 모르고 행하지 않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인데. 길이 있어도 걷지 않으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벽 같은 현실 앞에서

요즘 앞길이 막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분들, 갑자기 설 자리를 잃은 이들이 그렇습니다. 또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인생살이에서 이루어 놓은 게 없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래 전 권투 해설자인 오영일씨는 승부가 한 쪽으로 기울면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길은 멀고, 주막은 보이지 않는 격입니다." 저는 권투를 보다가도 이 말을 듣고나면 괜한 외로움에 가슴이 저려옴을 느끼곤 했습니다.

길은 정말 없는 것일까요? 저는 누구에게나 길은 있다고 단언하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기업가인 김태연씨 이야기를 설 연휴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삶이 곤고할 때마다 자기 스스로에게 말했답니다. "He can do. She can do. Why not me." 이 사람도 할 수 있고, 저 사람도 할 수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냐, 뭐 대충 이런 뜻일 겁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자기 삶에 도전했고, 그래서 삶에 휘둘리기 보다는 삶을 조정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의 증거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누구에게나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적극적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길'에 비유하셨습니다. 주님의 삶은 어딘가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님도 답답한 지경을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뚫고 나가셨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 속에 길이 있다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던 사람들이 벳새다 광야까지 당신을 따라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느덧 저녁이 다가오자 제자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군중들은 굶주렸고, 잘 곳조차 마땅치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 밖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문제에 깊이 감응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지시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지만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문제를 타개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 속에는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이 풍랑 속에 시달리는 것을 보시고 성난 물결이 설레는 바다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바다에는 길이 없지만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파도 위에 길을 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사슬에 매어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그러나 죽음을 통한 길이었습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은 죽음의 골짜기에 생명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삶의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살아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제국의 압제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새로운 백성으로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아름다운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바다 가운데 길을 내고, 거센 물결 위에 통로를 냈다."(16)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19b)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곳에는 길이 열립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있으면 길은 있게 마련입니다. 배고픈 자식을 먹이기 위해 부끄러움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처럼, 우리 속에 사랑이 식지 않는 한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목마른 백성들을 살리시려고 광야에 물을 대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길 찾는 법

길을 찾으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길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십니까? 그러면 이제 길 찾기를 배우십시오. 길을 찾으려면 이정표나 지도를 잘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삶의 길은 조금 다르지요? 삶의 지도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삶의 지도는 있습니다. 우리 생명을 내신 분이야말로 우리 삶의 지도가 아니겠습니까? 길이 보이지 않거든, 거친 숨을 조금 가라앉히고, 조용히 하나님께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기 위한 시간을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자기 생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상의하십시오. 당장 응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저는 하늘을 찌를 듯이 장하게 서있는 나무도 좋아하지만, 척박한 곳에서 사느라 안간힘을 다한 나무들을 더 좋아합니다. 바위에 길이 막히면 온몸을 비틀어서라도 햇빛을 향해 서는 나무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봉산 우이암 중간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가지 전체가 동남쪽을 향해 뻗어있습니다. 마치 한 팔이 없는 사람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지만 저는 햇빛과 햇볕을 향한 그 나무의 안간힘을 보면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뿌리를 제일 깊이 내린 식물은 사막에서 자라는 풀이랍니다. 사막에 우연히 싹을 틔운 그 식물의 뿌리가 한 방울의 물을 찾아 어두운 땅속을 더듬어가는 광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은 그처럼 강인한 것입니다. 오직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는 사람만이 어려운 환경을 탓하고, 심지어는 생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길 없는 곳에서도 길을 발견하며 살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한결같은 믿음이고,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지속에의 열정입니다.


한 걸음씩 걸으라

길이 보이거든 서두르지 마십시오. 서두르면 모든 일을 망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길을 눈 앞에 두고도 쉽게 좌절합니다.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먼길을 왜 걱정하십니까? 그 길은 우리가 공들여 걸어야 할 삶의 과정인데요. 유신 말기의 그 엄혹했던 시절에 신학교를 다니던 저는 도무지 삶의 전망이 보이지 않아 방황했습니다. 어느 날 그런 저를 보고 한 교수님이 충고를 해주셨습니다.

"미스터 김, 한꺼번에 인생을 다 살아버리려고 하지 말게. 안개가 자욱해 앞길이 보이지 않아도 한 치 앞은 보이지 않던가? 오직 한 걸음만 생각하게. 내가 내디뎌야 할 한 걸음을 정성껏 내딛다보면 어느새 목표 지점 가까이에 이르렀음을 알게 될 걸세."

교수님의 말씀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와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할 수 있는 한가지씩 해나가면 되니까요.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에는 청소부인 베포 할아버지가 나옵니다.

거리를 쓸 때면, 그는 천천히, 하지만 쉬지 않고 쓸었다. 한 걸음 떼어 놓을 때마다 숨 한 번 쉬고, 숨 한 번 쉴 때마다 비질을 한 번 했다. 한 걸음, 한 번 숨 쉬고, 한 번 비질. 한 걸음, 한 번 숨 쉬고, 한 번 비질. 그러다가 가끔 잠시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겨 앞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 걸음, 한 번 숨 쉬고, 한 번 비질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뒤쪽에 깨끗한 거리를 두고, 앞에는 지저분한 거리를 두고 그렇게 청소를 하다 보면 종종 위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베포는 모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아.…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해 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미하엘 엔데, {모모}, 비룡소, 50-51쪽)

중요한 것은 한 걸음을 잘 내딛는 것입니다. 혹시 길이 너무 아득해 낙심하고 계십니까? 주님의 손 붙잡고 한 걸음만 내디디십시오. 혹시 사망의 길에 서계시지는 않습니까? 생명길로 돌이키십시오. 주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려 애쓰면서, 쉽게 낙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길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이 백성은 나를 위하라고 내가 지은 백성이다. 그들이 나를 찬양할 것이다."(21) 하신 말씀이 응할 것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