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2. 약속을 거두시는 하나님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 18:5-10
설교일시 2012/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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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거두시는 하나님
렘18:1-10
(2012/3/18)

[이것은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는 어서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너에게 나의 말을 선포하겠다.” 그래서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더니, 토기장이가 마침 물레를 돌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그 흙으로 다른 그릇을 빚었다.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내가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민족이 내가 경고한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려고 생각한 재앙을 거둔다. 그러나 내가 심은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 백성이 나의 말을 순종하지 않고, 내가 보기에 악한 일을 하기만 하면, 나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약속한 복을 거둔다.”]

• 무감각한 세태
주님의 은총과 평안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엄벙덤벙 세월을 보내다 보니 벌써 춘분이 코앞입니다. 산수유, 생강나무에 핀 노란 꽃이 정말 반갑습니다. 긴 겨울이 끝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니 말입니다. 주중에 예언서의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어느 시대든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의 탄식이 귀에 쟁쟁합니다.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사6:9)

진실을 담아 하는 말이 타인의 가슴에 가 닿지 못할 때 우리는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예언자들의 운명을 생각하다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여인 카산드라가 떠올랐습니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마지막 왕인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카산드라의 빼어난 용모에 반한 바람둥이 신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예언의 능력을 부여해줍니다. 그리고는 카산드라에게 청혼을 하지만 공주는 차갑게 거절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폴론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아폴론은 그 입맞춤을 통해 카산드라에게서 말의 설득력을 빼앗습니다. 앞날을 환히 내다보는 카산드라가 예언의 말을 하면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웅얼거리는 말처럼 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미구에 벌어질 일을 훤히 꿰뚫어보기는 하지만, 아무도 설득해낼 수 없는 카산드라의 운명은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경우는 다르지만 예언자들의 운명도 그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악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예민한 감성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들은 또렷한 말로 백성들에게 경고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달콤한 말에 길들여진 귀에 예언자의 말은 폭력적으로 들리거나, 강박증에 사로잡힌 자의 헛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일 겁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죄가 “그들의 마음 판에 철필로 기록되어 있고 금강석 촉으로 새겨져 있다”(렘17:1)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람을 의지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비웃기까지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으로만 위협하시지, 별 것도 아니지 않으냐! 어디 위협한 대로 되게 해보시지!”(17:15)

• 토기장이의 집에서
예레미야는 자기 직무로부터 달아날 생각은 없었지만 좀 지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그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거기에서 당신의 말을 들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집에 가서 그가 그릇을 빚는 모양을 유심히 지켜봅니다. 토기장이는 좋은 흙을 떠다가 체로 거르고, 물을 뿌려 질흙으로 만들고, 그것을 물레 위에 올려놓고,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질흙에 형상을 부여합니다. 침묵 속에서 수행되는 그 섬세한 과정을 지켜보는 동안 예레미야의 숨은 가지런해졌을 겁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그릇 하나에 담긴 토기장이의 정성이 새삼 놀랍고도 고맙게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토기장이는 그릇을 빚다가 잘 되지 않으면 흙을 뭉개서 다른 그릇을 빚곤 했습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그린 형상과 질료인 질흙이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 그릇 하나가 완성되었습니다.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토기장이의 집에 가라 하신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을 겁니다. 바울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면서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다”(엡2:10)고 말합니다. 가끔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작품으로 살고 있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작가이신 하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나?’

하나님은 우리가 어긋난 길로 가서 좀처럼 돌이키지 않을 때면 우리를 새롭게 조형하기 위해 슬픔, 고통, 질병, 고독의 물을 뿌리기도 하십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겪는 그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자초한 일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한사코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그런 부정적인 경험이 우리를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놓곤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다”(고후12:10)고 말했습니다. 햇볕만 내려 쬐고 비가 오지 않는 땅이 사막으로 변하듯이, 실패와 아픔을 겪지 않고는 영혼이 자랄 수 없는 법입니다. 일어서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릇으로 빚어집니다.

자기 또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기 또한 남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여전히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해 가시처럼 다른 이들의 영혼을 찌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나의 ‘옳음’이 ‘따뜻함’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따뜻함이란 다른 이가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여백을 마련하는 마음입니다. 그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진심으로 아낄 때 대화의 계기가 마련됩니다. 세상은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만나 빚어내는 불화와 갈등으로 소란스럽습니다. 인간의 죄된 성품에서 비롯된 옳음은 그처럼 불화를 만들어내게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실 하나님 앞에 자꾸 엎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정화시켜 주실 때 우리는 비로소 따뜻함과 함께 가는 옳음을 붙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아픔, 고독과 실패를 자꾸 하나님께 봉헌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그것을 은총의 통로로 삼아 우리를 새롭게 빚어주십니다.

• 세우기도 하고, 헐기도 하고
하나님은 개인의 삶도 인도하시지만 역사도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 추세를 대략은 짐작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 변전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마치 호박이 맺히는 자리가 있는 것처럼 역사 속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순간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때를 일러 ‘카이로스’라고 하는 데 그 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라도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라는 말이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결정은 주님께서 하신다”(잠16:1)는 말은 다 이런 인간의 경험을 나타내는 경구들입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은 강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아, 내가 이 토기장이와 같이 너희를 다룰 수가 없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6)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자부심에 안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시는 까닭은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선택은 철저히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시는 까닭은 그에게 맡기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땅에 사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불러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불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이 음란하고 악한 세대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그루터기가 되어야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와 만났습니다. 그는 계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을에 사서 징역살이하던 방에 걸어두었던 마늘을 이듬해 봄에 껍질을 벗기다가 느낀 것을 적었습니다.

“마늘 한 통 여섯 쪽의 겨울을 넘긴 모습이 가지가지입니다. 썩어 문드러져 냄새나는 놈, 저 하나만 썩는 게 아니라 옆의 쪽까지 썩게 하는 놈이 있으며, 새들새들 시들었지만 썩기만은 완강히 거부하고 그나마 매운 맛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놈도 있으며, 폭싹 없어져버린 놈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마늘 본연의 생김새와 매운 맛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놈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흐뭇하게 하는 것은 그 속에 싹을 키우고 있는 놈입니다. 교도소의 천장 구석에 매달려 그 긴 겨울을 겪으면서도 새싹을 키운 그 생명의 강인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록빛 새싹을 입에 물고 있는 작은 마늘 한 쪽, 거기에 담긴 봄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돌베개, 1998, 365쪽)

그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디고 기어이 싹을 틔우고 마는 마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여겨집니다. 작은 마늘 쪽에 담긴 봄처럼, 이 엄혹한 세상에 성도들은 봄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 해도 썩어 문드러지면, 그래서 주변까지도 썩게 하면 하나님은 그를 버리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지금의 한국 교회에 대한 경고로 받습니다.

•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변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초월적이고 무시간적인 존재이기에 세상에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 분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적 사고일 뿐, 성서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낮은 자들의 신음소리를 못 견뎌하시고, 억압자들을 높은 자리에서 내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에게 등을 돌리는 백성으로 인해 상심하시기도 하고,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로 인해 기뻐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물론 초월적인 분이고 시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사를 초연하게 바라보시지 않습니다. 땅은 그분의 발등상이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품성을 표현하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단어 혹은 구절은 다섯 개입니다. ‘자비로움’, ‘은혜로움’, ‘노하기를 더디 하심’,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함’(출34:6)이 그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초기에 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큰 저항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신다고. 쪼잔하게.’ 질투란 우월한 사람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감정입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그 말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라는 것을. 성서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사49:15b)라는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초지일관이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길을 잘못 들었는데 기왕 접어들었으니 내처 가자고 하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돌이켜 원점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한때 어떤 민족이나 나라의 뿌리를 뽑아내거나, 그들을 부수거나 멸망시키겠다고 하셨더라도 그들이 죄악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재앙을 거두십니다. 반대로 어떤 민족이나 나라를 세우고 심겠다고 말을 하였더라도, 그들이 순종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면 약속했던 복을 거두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속한 민족이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느냐, 그 뜻을 거역하느냐’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입니다. 심판과 구원 사이의 시간, 즉 돌이킬 기회가 부여된 시간, 회개의 시간입니다.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고후6:2b).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해서 다시 빚고 계십니다. 그 은혜의 손길 아래 우리 몸과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고 여린 것들이 폭력으로 유린되는 세상에 분노하십니다. 크고, 빠르고, 효율적인 것이 숭상되는 세상이지만 실상 평화는 작고, 느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것들 속에 깃들게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언제나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지금 주님의 발걸음이 어디에 머물고 있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있어야 할 곳입니다. 주님이 복을 거두시기 전, 우리 발걸음을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03월 18일 12시 10분 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