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5. 이제 다시 시작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20:1-20
설교일시 2012/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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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시작이다
요20:1-18
(2012/4/8, 부활절)

• 마음이 무너진 마리아
할렐루야!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고난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간절히 부활의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금욕과 절제와 참회의 절기인 사순절이 지난 후에 맞이하는 부활절이 되면 사람들은 부활절 유머를 나누며 즐거워했습니다. 사람 웃길 줄 모르는 저도 유머를 하나 해 볼 생각으로 여기저기 뒤적거리다가 이야기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웃어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막달라 마리아가 한국 사람이랍니다.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그 이름이 그렇습니다. ‘막 달란 마리아’. 맞지요? 또 한 가지는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부른 호칭입니다. ‘라부니’. 마리아는 주님을 향해 ‘오라버니’라고 했는데 사람들이 감탄사인 ‘오’를 뺐다고 하더군요.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우리에게 기쁨을 안겨 줍니다. 주님의 부활이 왜 기쁜 소식인지를 알기 위해서 성경의 증언을 조금 면밀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막달라 사람 마리아는 지난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일어났던 일이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약자에 대해 한없는 연민을 보이시던 주님, 그러나 거짓과 위선과 폭력에 대해서 그렇게도 날카롭게 비판하시던 주님이 그런 최후를 맞이하실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쓰라린 눈물의 시간이 지난 후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정중하게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 정성껏 마련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걱정이 많았겠지요. 그 무거운 돌문을 어떻게 굴린단 말입니까? 그래도 무슨 방법이 있겠지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을 겁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무덤 문이 이미 굴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내려앉았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마리아는 어찌 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허둥지둥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집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그 이상한 현실을 전합니다.

• 두 제자
놀라기는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가 먼저 무덤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이미 턱에 찼지만 마리아도 그들 뒤를 따라 동산에 다시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슬픔과 자책감으로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마음이 근심에 싸여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서 깨어 있어라”(막14:34) 부탁하셨던 주님의 음성이 그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스승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채 쿨쿨 잠에 빠졌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가야바의 법정도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외로웠던 그 시간, 그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 처형당하시는 예수님을 멀찍이에서 바라보면서도 그는 무기력하기만 했습니다.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으로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비교적 젊은 제자는 이미 무덤 앞에 이르러 베드로가 다가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베드로는 깊은 회오의 감정에 사로잡힌 채 무덤 안으로 들어섭니다. 과연 예수의 시신은 그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가지런히 개켜진 채 놓여있던 삼베와 머리를 싸맸던 수건이 그 무덤이 예수의 무덤임을 알려주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직관이 뛰어난 젊은 제자조차 예수의 부재는 알아차렸지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당황한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대책을 숙의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들에게 빈 무덤은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 아니라, 마치 늪처럼 그들을 끌어들이는 어둠이었습니다.

• 다정한 그 음성
제자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마리아는 돌아서지 않습니다. 차마 돌아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리아는 다만 울 뿐입니다. 저는 그 날 그 무덤가에 서있던 마리아에게서 아가서에 나오는 신부의 마음을 읽습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일어나서 온 성읍을 돌아다니며 거리마다 광장마다 샅샅이 뒤져서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겠다’고 마음먹고, 그를 찾아 나섰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성 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서 ‘사랑하는 나의 임을 못 보셨어요?’ 하고 물었다.”(아3:1-3)

어찌 해 볼 생각조차 없이 몸을 굽혀 무덤 속을 들여다보다가 마리아는 흰 옷을 입은 사람 둘이 예수가 누워 있던 머리맡과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천사였습니다. “여자여, 왜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다가 어떤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서 계셨건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주님은 천사들과 똑같이 물으십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를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님의 시신의 행방을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낯익은 음성이요 어조였습니다. 세상에 그분 말고 자기 이름을 그렇게 불러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신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해 성전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비통한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사람, 천지간에 홀로 된 것처럼 외로움에 떨고 있는 한 사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집단’ 혹은 ‘다중’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마치 우리를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양 대하십니다. 저는 이게 부활절 메시지의 놀라운 점이라 생각합니다.

•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놀람과 기쁨 속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손을 대려 했나 봅니다. 그러자 주님은 “내게 손을 대지 말아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이르십니다. 이 말을 두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님과 만나야 함을 일깨우고 계십니다. 과거의 기억에만 사로잡히면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마리아를 더 큰 일치로 부르고 계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로 당신의 삶을 요약했습니다. ‘내게 손을 대지 말라’는 말 속에서 저는 예수에 대한 기억에만 집착하지 말고 이제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명령을 듣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를 제자들에게 보냅니다. 당신이 곧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을 여전히 ‘내 형제들’이라 부르십니다. 등 돌림을 당했으면서도 주님은 여전히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 무제약적인 신뢰와 사랑이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음을 우리는 압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일어선 사람이 됩니다. 먼저 한 사람이 일어서고, 그를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이 일어섭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대한 생명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그 흐름은 절망의 사슬을 끊어내고, 억압의 장벽을 무너뜨리며 우렁우렁 흘러갑니다.

십자가에서 잠시 끊긴 듯 보였던 생명과 사랑 이야기는 부활을 통해 다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극복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났던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우리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에서 전직 약사인 70대 노인이 복지연금을 받지 못하게 되자 자살하고, 국내에서도 거리로 내쫓긴 이들의 탄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공부 압박에 몰리는 청소년들의 심성이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꿈조차 박탈당한 젊은이들의 표정에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찢기고 파괴된 산하가 울고 있습니다. 평화의 섬 제주도는 지금 큰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외면한 채 부활의 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 가장 비통하게 울고 있는 사람들, 가장 깊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을 만나면 넘어지고 짓밟혀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말발굽에 채여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민들레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2012년 부활절을 맞으며 제 입에는 며칠 전서부터 시드니 카터 Sydney Carter(1915-2004)가 1963년에 만들었던 노래 <춤의 왕>이 뱅뱅 감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 가슴을 치는 가사는 이것입니다. “나는 생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네가 내 안에서 살면 나도 네 안에서 영원히 살련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면 주님도 우리 안에서 사십니다. 이제 무덤가를 서성이지 말고, 우리를 기다리는 아픔의 땅을 향해 나가십시오. 주님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04월 08일 11시 51분 4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