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0. 울타리로 선 사람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 2:13-15
설교일시 2012/05/13
오디오파일 s20120513.mp3 [11758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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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로 선 사람
마2:13-15
(2012/5/13, 어버이주일)

[박사들이 돌아간 뒤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그리고 내가 너에게 말해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요셉이 일어나서, 밤 사이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헤롯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말씀하신 바, “내가 이집트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 기억 속의 그대
어버이 주일 아침,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지금 외로운 모든 사람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랜 세월을 청파 공동체와 함께 하다 보니 교우들의 얼굴에 세월이 새겨지는 모습을 애잔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해외에 머물다 돌아온 교우는 옛 교우들의 모습이 1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놀랐다면서, 가만히 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저만 변했지요?” 하고 물었더니 웃으며 그렇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슬프지는 않습니다.

연세 드신 분들을 뵐 때마다 가슴이 짠합니다. 그분들이 겪어왔던 세월의 무게가 어렴풋이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어디 마른 땅만 딛고 사셨겠습니까? 진데도 밟고, 시린 손 호호 불 때도 있었겠지요. 늘 행복하기만 했겠습니까? 마음을 졸이며 종종걸음 칠 때도 있었고 가슴을 북처럼 두드릴 때도 있었겠지요. 어느 시인은 노년에 이른 어머니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산나물 캐고 버섯 따러다니던 산지기 아내
허리 굽고, 눈물 괴는 노안이 흐려오자
마루에 걸터앉아 먼산 바라보신다
칠십 년 산그늘이 이마를 적신다
버섯은 습생 음지 식물
어머니, 온몸을 빌어 검버섯 재배하신다
뿌리지 않아도 날아오는 홀씨
주름진 핏줄마다 뿌리내린다
아무도 따거나 훔칠 수 없는 검버섯
어머니, 비로소 혼자만의 밭을 일구신다
-반칠환, <어머니 5> 전문

혼자만의 밭에 검버섯을 키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시인에게는 고마움으로 그리고 안쓰러움으로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십계명의 제5계명은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출20:12)이라고 말합니다. 로라 슐레징어는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을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부모가 우리에게 베푼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2) 부모가 스스로를 보살피지 못할 때 돌봐드리는 것
3) 부모가 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부모에게 계속 분을 품지 않는 것
4) 부모를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
(로라 슐레징어 ․ 스튜어트 보젤, <십계명에서 배우는 인생>, 183-185쪽)

너무 도식적이고 상식적인 것 같지만 이런 마음조차 없어 세상이 살풍경한 곳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친밀함이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기초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진짜 불효
나는 이 세상에서 자식의 가장 큰 불효는 부모님보다 정신의 크기가 작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생명의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1성서(구약)의 역사서를 읽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에 대한 한 줄 짜리 전형적인 평가문이 그것입니다. 역사가는 긍정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000가 한 모든 일을 본받아, 주님께서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하였다.” 부정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조상이 한 것처럼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000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다.” 부정적인 평가는 대개 북왕국 이스라엘 왕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남왕국 유다 출신의 역사가의 편견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이런 구절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삶의 본이 되는 부모도 문제이고, 그런 부모 세대의 잘못을 반복하는 자식도 문제입니다. 부정적인 삶의 고리를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우리 삶은 누군가의 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이 다른 이에게 하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될지 욕망의 중력에 이끌려 추락하도록 이끄는 이정표가 될지 돌아보십시오. 성경은 실패한 가정 이야기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운 지혜자입니다. 하지만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실로의 제사장이었던 그들에 대해 성경은 ‘행실이 나쁘고 주님을 무시했다’는 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께 바치려고 준비해 온 제물을 멋대로 탈취하고, 회막 어귀에서 일하는 여인들과 동침하고, 아버지의 꾸짖음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계승은 사무엘 집안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인 요엘과 아비야는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돈벌이에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 치우치게 재판함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몰려와 자기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출애굽 정신을 간직한 채 평등 공동체를 유지해왔던 이스라엘이 왕정체제로 이행하게 된 것은 부정직한 지도자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엘리와 사무엘이 감당했던 역할은 소중했지만 그들은 개인적으로는 비극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식들을 바로 키우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애니 딜러드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죽는 순간 드리는 기도가 ‘제발’이 아니라 ‘감사합니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떠날 때 문간에서 손님이 주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듯이 말이다.” 우리 삶을 이어갈 후손들로 인해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 성 가족
아름다운 가정 공동체를 가꾸는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기초입니다. 어버이 주일에 저는 엉뚱하게도 예수님의 애굽 피신 이야기를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요셉은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의 지시에 따라 출산한지 며칠 되지 않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납니다.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는 여인 앞에,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그림 언어로 보여주고 있습니다(계12:2-3).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키려고 노리고 있는 용은 신화 속의 동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 질서를 뿌리로부터 뒤흔들어놓을 수 있는 존재를 없애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인간의 음습한 욕망과 악의와 권력욕을 상징합니다.

아기와 지친 산모 그리고 근심에 싸인 아버지, 이것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나라들이 처한 현실인 동시에,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 대한 절묘한 은유가 아닐까요?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 헤롯이 지배하는 세상, 힘이 공의를 억누르는 세상에서 여린 생명은 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아버지 요셉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마리아에 비해 교회사에서 홀대받고 있지만, 정말로 중요한 존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는 마리아와 예수의 든든한 울타리입니다. 그는 자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수용했습니다. 라르슈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다친 새 한 마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그림을 매우 좋아한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손의 주인공은 혹시 새가 떨어질까 봐 손을 많이 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혹시 새가 짓눌릴까 봐 꽉 쥐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 손은 보금자리처럼 새를 지탱하고 붙잡아 주며, 따뜻하게 해 주고 안정감을 줍니다. 다친 새는 때가 되면 다시 기운을 차리고 날 수 있을 것입니다.”(장 바니에,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 59-60쪽)

바니에는 아버지란 이렇게 새를 감싸고 있는 손과 같다고 말합니다. 연약한 자를 붙들어주지만, 소유하거나 강요하지는 않는 손, 참 아름답습니다. 요셉이 바로 이런 손과 같은 인물이 아닐까요? 빛의 화가인 렘브란트는 <이집트 피신>을 주제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제게 인상적인 것은 1627년에 그린 작은 작품입니다. 짙은 어둠을 뚫고 성 가족이 애굽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나귀를 끌며 앞장선 요셉의 옷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고, 신발조차 신지 못했습니다. 너무 다급히 떠나온 때문일까요? 아니면 신발을 신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것일까요? 그가 메고 있는 가방은 안에 든 것이 별로 없는 듯 엄부렁합니다. 요셉은 고개를 돌려 마리아와 아기를 살핍니다. 나귀 등에 앉은 여인도 초라해 보입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 천은 투박합니다. 마리아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먼 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주듯 나귀도 지친 듯 보입니다. 렘브란트는 자기 시대의 부랑자들의 신산스런 모습을 염두에 두고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상황은 절박하지만, 그들 사이에 흐르고 있는 신뢰와 사랑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정은 모든 구성원이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곳일 겁니다. 이 세대의 가치관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곳, 잘났든 못났든 모든 구성원이 주눅 들지 않고 살 수 있는 곳 말입니다. 우리 교우들의 가정이 그런 거룩한 장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 확대된 가정
하지만 신앙인에게는 또 다른 가정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막3: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불러 모으신 확대된 가족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서로를 낯선 사람 혹은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다친 새를 손으로 감싸 안는 조심스러움으로 서로를 보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삶을 연습하라고 우리를 공동체로 인도하셨습니다.

교회는 이 덧거친 세상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언제든 돌아가 안길 수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경쟁 사회에 내몰려 내상을 입고 살아가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기를 펼 수 있는 곳,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삶에 미리 지친 젊은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되는 곳,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묻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이 격려 받을 수 있는 곳, 노년의 지혜가 소중하게 존중되는 곳, 문밖에 선 듯 마음이 스산한 이들이 언제든 돌아와 따스함을 회복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 곳, 바로 그곳이 가정으로서의 교회일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아직 교회 문 밖에 있는 이들 가운데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 헤롯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피난길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낮은 땅으로 육화해 내려오셨듯이 교회도 그들 곁에 다가가야 합니다. 환난을 겪는 이들을 위해 친히 장막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계7:15)을 가장으로 모셨으니, 우리도 누군가의 장막이 되어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위태로운 삶을 계속하고 있는 이들을 보호해주는 요셉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들까지도 내 식구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평화의 물결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고, 버름한 사이를 더 멀어지게 하는 증오의 언어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 가슴은 점점 황폐해져 갑니다. 우리 시대에 진보적 가치를 끊임없이 주장하며 역사를 선도한다고 자부했던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 요즘 사람들 말로 ‘멘붕’(멘탈 붕괴)에 이른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보이는 모습은 그들이 비판해왔던 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혹하게 말한다면 오히려 더 심해 보이기도 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교회는 이런저런 일로 상처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우정과 환대에 바탕을 둔 세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이야기가 지리산가리산 두서가 없게 되었습니다만 우리는 부모 세대보다 정신의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매개자가 되어주신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입니다. 정신의 그릇이 커진다는 것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연약한 생명을 감싸 안는 품이 되는 것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자신도 불안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만 기어코 가족들을 지켜내기 위해 책임을 다하는 요셉의 거룩한 마음을 되새기십시오. 그는 영적 인간의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이정표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우리 위에 장막을 쳐주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 시린 이들을 위해 장막을 치는 마음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 때 우리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더욱 더 친밀한 사랑의 보금자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05월 13일 12시 01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