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7. 가끔은 비틀거려도
설교자 김기석
본문 렘 20:7-11
설교일시 201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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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비틀거려도
렘20:7-11
(2012/7/1)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습니다. ‘예레미야가 겁에 질려 있다. 너희는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합니다. 나와 친하던 사람들도 모두 내가 넘어지기만을 기다립니다. ‘혹시 그가 실수를 하기라도 하면, 우리가 그를 덮치고 그에게 보복을 하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 목사님도 외로우세요?
7월 첫날 아침,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며칠 전 농촌에서 목회를 하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물꼬 싸움으로 교인들 간에도 척지는 일이 빈번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답답했는데, 가물었던 대지에 단비가 내려 정말 다행입니다. 타들어가던 농부님들의 다급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금요일 저녁 빗소리에 이끌려 창문 앞에 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반가운 빗소리 들려 산천이 춤을 추우네 봄비로 내리는 성령 내게도 주옵소서” 하는 찬송가를 흥얼거렸습니다. 가뭄이 깊었기에 내리는 비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인생이 어떠한가, 물으면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정직한 답일 겁니다.

지난 주일 오후 집회를 마친 후 몇몇 교인들과 마주앉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가던 중 한 분이 문득 “목사님도 외로우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이 계신 데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요’라고 대답했으면 좋았겠지만, 저는 몇 번이고 힘을 주어 ‘그럼요, 그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언제 외로우냐는 질문에 “말의 무기력함을 절감할 때, 선포하는 말씀이 사건을 일으키지 못할 때”라고 대답했습니다. 친구들에게 문자로 언제 외롭냐고 물었습니다. 한 친구는 ‘서로 옳다는 두 교인 사이에 서 있을 때’라고 답했고, 다른 친구는 ‘주일 오후 모두 떠난 텅 빈 예배당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문득’이라고 답했습니다.

감리교 최초의 조직신학자라고 일컬어지는 정경옥 교수는 1930년 대에 쓴 <그는 이러케 살엇다>라는 책에서 예수의 외로움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가 외로운 것은 한 제자가 자기를 밀고해서도 아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잠을 자다가 흩어져 버린 제자들 때문도 아니고, 베드로가 자신을 모른다고 했기 때문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이 다 어디로 가고 자기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 외롭다는 것보다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다는 것을 외로워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신앙의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서 친구가 없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고독의 사람이요 눈물의 사람이다. 선견을 가진 사람은 군중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어 외로운 예수, 도무지 저나 다른 목회자들의 외로움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한 교우가 우연히 던졌던 질문이 저로 하여금 소명에 대해 재차 묻게 만들었습니다.

• 부름 받은 자로 산다는 것
신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날, 시험 감독관으로 들어오신 교수님은 시험지를 나눠주기 전에 찬송가를 한 장 부르자고 하셨습니다. ‘부름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그때처럼 그 찬송가가 천금의 무게로 다가온 때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가려고 하는 길이 영광의 길 혹은 안락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기에 그 찬송을 우리는 비장하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찬송가를 제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죽음조차도 주를 따르려는 열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결기가 풀려 버렸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내내 샤를 드 푸코의 기도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저를 어떻게 하시든지/감사드릴 뿐입니다/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이루어진다면/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하나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당신을 사랑하옵기에/이 몸을 드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남김없이 이 몸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끝없이 당신을 믿습니다/당신은 나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아멘”

주님의 부름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그다지 행복한 길은 아닙니다. 지난주에 몇몇 교우들이 ‘예수를 믿는 것도 참 힘든 일이지만, 청파교회에 와서 인생이 더 어려워졌다’고 말해서 함께 웃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함께 하고 싶으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안락한 삶과 신앙적 삶은 양립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 속에 현현하신 하나님과 만난 후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불평하는 백성과 그 백성들에 넌더리를 내며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의 경계선에 서서 둘 사이를 중재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건 참 힘겹고도 외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예언자들의 운명도 그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청중들이 듣고 싶은 말을 전한 것이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을 전했습니다. 예언자의 말은 때로는 위로와 격려이지만, 경고와 책망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랑받기보다는 기피의 대상이 되곤 했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예언자를 찾아와 ‘부담이 되는 주님의 말씀’(Burden of Yahweh)이 있냐(렘23:33)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대답은 “너희가 바로 나에게 부담이 된다”였습니다. 사람들이 부담스럽다고 하는 말을 선포해야 하는 게 부름 받은 이의 어쩔 수 없는 운명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형제자매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끊어진 것을 이으시고, 부서진 것을 고치십니다. 예언자들이 말씀을 전했는데도 백성들이 듣지 않는다면 그 벌은 자기에게로 돌아가지만, 듣지 않으리라 예단하고 전하지 않으면 그들의 벌은 예언자에게 돌아갑니다.
• 예언자의 탄식
말씀을 선포하는 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영광과 찬탄이 아닙니다. 그는 백성들의 삶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폭력’과 ‘파멸’을 외치자,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말은 아주 격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7)

번역이 너무 점잖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속이셨다’는 말은 원래 달콤한 말로 자기를 ‘꾀었다’는 말이고, ‘나를 이기셨다’는 말은 마치 강간을 하듯 힘으로 자기 의지를 관철시켰다는 뜻입니다. 불경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는 절박합니다. 가깝던 사람들까지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그가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하는 것, 그처럼 외로운 일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런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9)

하지만 그런 다짐도 부질없습니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어떤 뜨거움 때문에 그는 말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심정에 깊이 공감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새로운 길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그는 차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지만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길, 그것이 부름받은 이들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러합니다.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절망의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리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어리석은 자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신앙생활을 너무 쉽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땅 짚고 헤엄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얕은 곳에서 헤엄을 치면 물에 빠질 염려는 없습니다. 하지만 수영의 참 맛은 깊은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속에서 맛볼 수 있습니다. 신앙은 안전한 것, 자기에게 이로운 것만 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풍덩 자기를 내던질 수 있을 때 신앙은 자랍니다.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세상 풍조를 거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겁은 안전한지를 묻는다. 편의주의는 정치적인가를 묻는다. 허영은 인기 있는가를 묻는다. 그러나 양심은 옳은가를 묻는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마하트마 간디의 이 말은 진리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 중인 사람들이 언제든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안전과 편의주의, 허영심이 아니라 양심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때, 그 때는 분명 실존적인 위기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고양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 의회 앞에 소환되어 그동안 써왔던 모든 주장들을 철회하고 책을 불사르라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황제의 명령을 들었을 때 그는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 그는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해서 행하는 것은 위험하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그는 자기 확신과 신념을 위해 죽기로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의 발이 땅에 닿지 않았던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부력이 그를 떠올려주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때부터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주님은 내 옆을 지키는 용사
위대한 신앙인들은 인간적 번민이나 갈등조차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나를 위해 깨어 있어 달라고 부탁한 후, 몇 번씩이나 엎드려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마26:38-39). 하나님의 사람들은 번민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자신의 운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 번민의 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로운 존재로 빚으시는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이 참 적실합니다.

“너희는 회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며,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사30:15)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서 투정만 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면 그는 늪과도 같은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신뢰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현존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11절의 예레미야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처럼 보여도 당신의 사람들 가까이 계시면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 속에 힘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우리는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보냈는지 알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적들의 침입을 막아야 했고, 안으로는 성벽을 쌓고 성전을 건축하는 등 재건 사업에도 박차를 가해야 했습니다. 모든 여건은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룹바벨을 격려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힘으로도 되지 않고, 권력으로도 되지 않으며, 오직 나의 영으로만 될 것이다.”(슥4:6)

역사를 새롭게 하는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영에 지핀 사람들은 자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스룹바벨 앞에서는 평지일 뿐이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지금 절망의 큰 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탄식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탄식을 그치십시오. 주님이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울타리가 되어 주시고, 그 큰 산을 허물어 새로운 역사를 짓도록 하십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우리가 맺는 많은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지 않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우리는 신앙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손해를 봐야 할 때도 있고, 조롱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외로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길이고, 하나님께 우리를 비끌어매는 길입니다.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금년의 절반을 충만한 은혜의 시간으로 바꾸어내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07월 01일 12시 05분 0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