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8. 뽕나무 언덕의 성사
설교자
본문 눅19:1-10
설교일시 200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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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언덕의 성사(聖事)
누가복음 19장 1∼10절
(설교자: 손성현 전도사)


1. 거룩한 낭비

여러분, 하나님을 우러르며 예배하는 이 자리에 참 잘 오셨습니다. 마음의 옷깃을 여기고 햇살 같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서 "아버지, 내 삶에 모든 것 되신 주…" 찬양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이 좋습니다. 저도 그런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저에게도 큰 기쁨이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를 다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더 바삐 움직여서 남보다 앞서 가라고 말입니다. 시간을 최대한 아껴서 치열하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이 거대한 문명 사회에서 언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네 삶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일이 되면 어김없이 이 자리를 찾는 분들을 보면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신앙인들의 이런 모습을 "안타까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힘과 시간을 아껴 뭔가 이윤을 남겨도 모자란 판에 헌금까지 내면서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 사회는 무언의 조소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좀 푹 자두면 다음날 일하는 데 더 효율적일 거라고 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에도 세상적 시간의 사슬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교인들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또, 자신은 주일에 느긋하게 예배에 참석하지만, 자녀에게는 그런 "낭비"를 허용하지 않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이 사회가 우리에게 은근히 부추기고 있는 계산적인 시선은 예배하는 이 시간을 "낭비"로 규정지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듯 낭비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관계를 돌아봅니다. 우리의 생명이 사랑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살아갈 것을 결단하는 이 시간이 있기에 우리의 삶은 중심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것을 "거룩한 낭비"라 불렀습니다. 베다니 시몬의 집에 계신 예수께 한 여인이 다가와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계산적인 사람들은 그 행동을 "낭비"로 보았지만, 예수께는 그것을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마가 14:4∼6).

이윤추구라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명백히 "낭비"로 보이는 이 시간,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은총과 마주하는 이 시간을 통해 우리의 삶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거룩한 낭비"의 시간입니다. 나아가,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낭비처럼 보이는 일, 즉 사랑과 봉사의 삶을 통해 주님의 일꾼답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의 삶이 이런 "거룩한 낭비"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이름 앞에 부끄러운 인생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 때문에 온 재산과 인생을 낭비하게 된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삭개오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죠. 그는 세리장이면서 큰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특징만 가지고도 유대 사회에서 이 사람에 대한 평판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동족에게서 세금을 걷어 로마에게 바치는 일을 해서 살아갔습니다. 세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를 위해서, 그것도 이방인인 로마 황제를 위해서 세금을 내야한다는 사실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분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함을 직접 로마에게 터트릴 수 없는 상황에서 유대 백성들의 원망은 자연스럽게, 그 세금 징수 업무를 담당하는 유대인 세리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웃들로부터 경멸의 눈초리를 받는 사람의 마음은 뒤틀리게 마련입니다. 결국, 자신들이야말로 그 사회의 피해자라고 생각한 세리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부를 축적했겠죠. 가난한 동포들은 이런 세리들을 더더욱 미워했을 겁니다.

미움과 착취의 악순환은 계속되고, 세리장이었던 삭개오에게 의지할 것이라고는 재산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원래 그의 이름은 "순진함", "정결함"이란 뜻의 "자카이"(Zakai)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부모가 그렇듯이) 삭개오의 부모는 그가 "착하고 정결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겠죠. 그러나 그 이름 값하며 살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세리장인 그를 "더러운 욕심쟁이 삭개오", "치사한 부자 놈 삭개오"라고 불렀을 겁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삭개오는 비애를 느꼈을 겁니다. 삭개오는 자기 이름 뜻과는 정반대의 삶의 살고 있다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을 겁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채 그저 돈버는 일에만 몰두함으로써 자신의 이름과 현실 사이의 균열에서 오는 절망감을 잊었을 지도 모릅니다.


3. 바늘귀로 들어간 낙타

그런데, 이런 삭개오의 삶에 전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는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알려진 예수라는 사람이, 바로 그가 살고 있는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예수가 그곳을 지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이 말해 주듯이 삭개오는 키가 작은 사람이라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습니다. 다급해진 그의 시야에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습니다. 왜 그런지 예수를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에 삭개오는 부리나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사람들과 얘기하며 천천히 그곳을 지나가고 있던 예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그곳을 그냥 지나쳐 가셨더라면, 그 날의 일은 삭개오에게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 밑을 지나던 예수의 발걸음이 갑자기 멎었습니다. 5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고개를 들어 삭개오를 쳐다보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여기 이 부분은 저에게,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배운 노랫말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내려와요, 내려와요! 착한 삭개오∼" 삭개오라는 이름의 본디 뜻이 "착하고 정결하다"라고 했지요? 예수님이 착한 삭개오라고 했는지 그냥 삭개오라고 했는지 간에, 삭개오는 예수의 그 부름을 듣고, 자기의 존재를 재확인 받는 감격스러운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6절 말씀에 따르면,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와의 만남은 삭개오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강탈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라는 선언에서 그리스어 시제는 미래형이 아니라, 현재형입니다.

이 사건은 삭개오에게만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 예수는 많은 유대인들을, 많은 종교인들은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대부분 예수께 실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앞장인 누가복음 18장 18∼25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겸손할 뿐 아니라, 성경의 계명을 아주 잘 지키는 나무랄 데 없는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가진 것을 제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에 말에 그는 근심하며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며 한탄하셨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뭐라 요구하기도 전에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결단하고 나섰습니다.

예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삶, 그것은 착실한 종교인으로서 가진 돈과 지위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무사히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요청 앞에, 이웃의 고통 앞에 철저하게 응답하는 결단, 철저한 변화야말로 예수께서 인간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임을 삭개오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던 삭개오는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감행함으로써 답답했던 예수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안겨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삭개오의 이야기를 대해서, 발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 목사님이 한 말이 저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손뼉치며 기뻐하셨다!"

우리 안에 있는 이기적인 욕망이 이웃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과 더불어 팽창할 때, 우리는 소유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낙타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탐욕, 과시 욕, 과도한 자녀교육 욕, 가족 이기주의, 꼭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그것을 사고야마는 소비 욕……. 과연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욕심의 크기가 낙타보다 못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을 듣고도 실천을 회피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상황은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뽕나무 위에서 예수의 눈길과 만난 삭개오는 예수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더 많은 삭개오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여러분이 제1, 제2의 삭개오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인 마음 씀씀이를 포기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결단하는 삶을 살 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또 한 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4. 뽕나무 언덕을 서성이며

제2청년회 회원들과 이 본문을 놓고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습니다. "예수와 이렇게 만난 뒤, 삭개오는 뭐 하며 살았을까? 계속해서 세리로 살았을까? 아니면 세리라는 직업을 버리고 새 삶을 시작했을까?" 성경은 삭개오가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클레멘스는 삭개오가 가이사랴 지방의 감독이 되어 베드로와 함께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어쨌든, 제가 만일 삭개오였다면 이렇게 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다짐했던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다가, 그러다가 가끔씩 그 다짐이 약해지고, 세상과 타협하려는 마음이 생겨날 때며, 예수님의 눈길과 처음으로 만났던 그 뽕나무 언덕을 찾아가, 그 나무를 어루만지고, 잠깐 나무에 올라가 그 때 예수님의 얼굴을 가만히 그려볼 겁니다. 죄인인 나를 바라보시며 말 건네 오셨던 그분의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거룩한 삶에 대한 열정을 다시 일깨울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에게는 청파교회가 바로 그런 뽕나무가 되었습니다. 겉보기에도 저는 키가 작죠? 보이지 않는 영혼의 키도 작은 편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청파교회에서 생활한 적지 않은 그 기간을 통해서, 전에는 알 수 없었던 예수님의 눈빛, 예수님의 음성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지금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 교회가 영혼의 뽕나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이곳을 통해 주님의 시선과 만나고, 주님의 음성과 만나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단순히 기독교적 교양을 함양하는 곳이 아닙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의 시선을 의식하고, 나를 새로운 삶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입니다. 삭개오에게는 그곳이 뽕나무 위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바로 이 교회 공동체 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이 사라져갈 때, 경쟁과 소비를 부추기는 세상과 싸우면서 지치고 피곤할 때,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과 봉사가 "낭비"처럼 여겨질 때, 여러분, 이곳에 찾아와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멀리 있어 이곳에 찾아오지 못하면, 이곳을 향해 마음의 창문을 열고 잠깐이라도 기도하십시오. 예배를 통해 듣는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 말씀에 결단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럴 때 이곳은 그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영적인 생명력을 공급해 주는 거룩함의 원천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청파교회라는 뽕나무에 올라오셨습니다. 이 거룩하고도 소중한 시간에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과 만나 새로운 삶을 결단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것은 손성현 전도사의 이임 설교입니다. 그와의 좋은 만남은 계속될 것입니다. 좋은 만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