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50. 암담한 세월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3:1-6
설교일시 2012/12/09
오디오파일 s20121209.mp3 [12593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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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담한 세월을 넘어
눅3:1-6
(2012/12/9)

[디베료 황제가 왕위에 오른 지 열다섯째 해에, 곧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유대를 통치하고, 헤롯이 분봉왕으로 갈릴리를 다스리고, 그의 동생 빌립이 분봉왕으로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을 다스리고, 루사니아가 분봉왕으로 아빌레네를 다스리고,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서에 적혀 있는 대로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여라. 모든 골짜기는 메우고, 모든 산과 언덕은 평평하게 하고, 굽은 것은 곧게 하고, 험한 길은 평탄하게 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이다."]

암담한 시절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이해인 수녀는 대림절 둘째 주 초를 밝힌 후 이런 참회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말로만 용서하고 마음으로 용서하지 못한 적이 많은/저의 옹졸함을 부끄러워 합니다./말로만 기도하고 마음은 다른 곳을 헤매거나/일상의 삶 자체를 기도로 승화시키지 못한/저의 게으름과 불충실을 부끄러워합니다./하찮은 일에서조차 고집을 꺾지 않으며/교만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날들을/뉘우치고 뉘우치면서/촛불 속에 녹아 흐르는/저의 눈물을 봅니다."(<12월의 촛불 기도> 중에서)

우리는 지금 어떤 초를 밝히고 있습니까? 이런 성찰조차 없이 대림절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세상은 참으로 어두웠습니다. 누가는 오늘의 본문에서 그 때를 상징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먼저 디베료(Tiberius, 주후 14년-37년)입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이어 통일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초기에는 개혁조치를 많이 내렸지만, 나이가 많아지면서 나폴리 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카프리 섬에 들어가 요비스 빌라를 짓고 거기에 칩거했다고 합니다. 황제는 측근들을 통해 로마를 다스렸지만 점차 반역이 일어날까봐 두려워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그의 시대는 한 마디로 공포정치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 땅을 다스리던 헤롯 아켈라오를 폐위시킨 후 로마가 파견한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26년경부터 36년까지 총독으로 재임했는데, 유대교와 유대 문화를 멸시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과 여러 차례 충돌했습니다. 황제의 얼굴이 그려진 깃발을 예루살렘에 들여왔다가 저항에 직면했고, 수로 건설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성전 금고에 손을 댔다가 거의 봉기 수준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분봉왕(tetrarch)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를 다스리던 사람입니다. 분봉왕이란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영토의 1/4을 다스리는 영주라는 뜻입니다. 야심만만했던 그는 분봉왕의 지위에 만족할 수 없었고, 아버지 헤롯대왕의 영토를 전부 다스릴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도시 세포리스를 재건해 수도로 삼더니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갈릴리 호숫가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는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따 그 도시를 디베랴(티베리우스)라고 정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대 토목공사에 막대한 예산이 들었음은 불문가지입니다. 그는 건설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갈릴리와 베뢰아의 농민들을 수탈했습니다. 당시 갈릴리의 전체 인구가 15만 명이 채 안 되었다고 하니 갈릴리 민중들이 겪은 억압과 수탈의 현실이 어떠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은 갈릴리의 북부와 동쪽 지역인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다스렸고, 루사니아는 안티레바논 산맥 너머의 땅, 그러니까 갈릴리로부터 아주 먼 땅을 다스렸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정치적 지형도를 제시한 후에 두 사람의 대제사장, 즉 안나스와 가야바를 언급함으로 당시의 종교적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에 의해 임명된 사람들이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보다는 황제의 뜻을 어기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정치도 종교도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누가는 그 시대 상황을 그렇게 요약한 후에 딱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그 어둠이 지극한 시대에 홀로 깨어 양심의 등불을 밝혔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서 들려오는 법입니다. 화려한 성전, 크고 안락한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변방에서 울리는 그 야인의 음성은 지치고 낙심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 하늘의 북소리였습니다.

요단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면 어쩔 수 없습니다. 외쳐야 합니다.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하필이면 왜 강일까요? 사람들은 옛날부터 강을 신성하게 생각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지금도 갠지스강을 어머니 강이라 하여 신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갠지스강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하면 죄가 씻어진다고 믿습니다. 갠지스 강가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죽어서 그 강물 위에 두둥실 떠가는 자신을 황홀하게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강은 이처럼 죽음과 재생의 상징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요단강은 신성한 강입니다. 광야가 많은 그 땅에서 요단강은 거의 유일한 젖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최북단에 우뚝 솟은 해발 2743미터의 헬몬산에서 발원하여 유대 땅 한복판을 남북으로 가르며 흐르는 그 강은 갈릴리 호수를 지나면서 강폭이 넓어지고, 세계에서 가장 낮은 요단 계곡을 타고 흐르다가 마침내 사해에 이릅니다. 유대 땅의 뭇 생명들이 그 강에 기대어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단강은 생명의 강이라는 상징성도 갖지만 경계로서의 상징성이 더 강한 강입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동편 지역으로부터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은 옛 삶을 청산하고 새 삶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으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러한 상징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로운 삶의 길로 그 백성을 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베푼 세례의 의미입니다. 누가는 그것을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성전에 나아가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그게 당시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는 다른 길이 있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민중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하는 성전 체제, 오히려 사람들을 의무와 두려움 속에 묶어 두던 성전 체제에 대한 부정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강도의 소굴이라고 했던 그 체제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숨이 막혀옴을 느낍니다. 오늘의 교회의 운명도 다를 바 없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전이나 대제사장이 아니라 새로워지고 싶다는 마음의 열망이 죄를 씻어준다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고 싶다는 갈망을 품고 있습니까?

회개의 열매
마음의 변화, 삶의 변화가 없는 회개는 거짓입니다. 값싼 은혜에 취한 종교인들은 많습니다. 웨슬리가 말하는 ‘거의 기독교인들’(almost christian) 말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언어를 입에 달고 살고, 봉사와 선교 사역에도 빠짐없이 동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자아’의 한계를 깨치고 나아가 더 깊은 차원을 향해 자기 삶을 끝없이 개방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는 율법적 의무가 아니라 은혜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쁨과 자유함으로 세상을 섬깁니다. 삶의 변화는 저절로 따라 옵니다.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마음이 찔린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10) 요한의 대답은 간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쉽습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세상에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전쟁의 뿌리는 가난과 기근이니 말입니다. 나눔이야말로 평화의 길입니다. 왜 이걸 실천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을 모아두려 합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줄 것은 없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회개의 현관에 들어서지 못한 겁니다.

세리들에게 한 대답이나 군인들에게 한 대답도 심플합니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13)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14) 자기들의 힘과 지위를 이용하여 잇속을 차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지킬 것을 지키며 사는 게 회개한 삶입니다. 우리는 요한의 말을 각자의 상황에 맞춰 얼마든지 확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신명기서 30장은 하나님의 명령은 하늘 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그것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하지만 삶의 방식을 바꾸어 살다보면 마음이 변화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은 참 다양합니다. 어떤 방식이 되었건 이번 대림절에는 우리 모두 참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도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길을 닦는 사람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외치는 광야의 소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이사야가 한 예언은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갈 즈음을 시대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포로생활을 마치고 백성들이 귀환할 때 어려움이 없도록 길을 닦으라는 하늘의 소리를 들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 깊은 불신과 분열의 골짜기를 메워 화해와 상생의 삶을 가능케 하고, 스스로 큰 체 하며 거들먹거리는 이들은 낮추어 겸손하게 만들고, 저마다 제 좋을 대로 살던 삶에서 벗어나 모두가 함께 지향해야 할 세계를 향해 돌아서도록 하고, 가난하고 천대받던 이들조차 존중 받는 평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갈망하는 이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은 맥을 놓고 기다리면 안 됩니다. 길을 닦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가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버밍햄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동료 목사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곤 합니다. 그 중에 한 대목이 참 인상적입니다. 그는 아침에 텍사스의 한 백인 형제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면서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 백인 형제는 때가 되면 유색인종들 모두가 동일한 권리를 누릴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마틴 루터 킹과 지지자들이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실현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법이라는 점잖은 충고도 곁들였습니다. 하마터면 저도 그의 말에 설득당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마틴 루터 킹은 이것이 시간에 대한 비극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견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이상하고도 비합리적인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십시오.

"시간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시간은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생산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사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은 선량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 비해서 시간을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사악한 사람들의 증오에 찬 언행뿐만 아니라, 선량한 사람들의 겁에 질린 침묵에 대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인류의 진보는 필연의 수레바퀴가 굴러 가다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류의 진보는 기꺼이 신의 협조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 없다면 시간은 사회를 정체시키는 세력의 동맹자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는 데는 적절한 시기가 따로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간을 창조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약속을 실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국가정책을 인종불평등의 모래밭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단단한 바위 위로 끌어 올려야 할 때입니다."(클레이본 카슨 엮음, <마틴 루터 킹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바다출판사, p 251-252)

저는 마틴 루터 킹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선한 뜻을 가진 사람들은 이제 침묵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 말해야 합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참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약하고 안일한 삶에서 벗어나십시오. 지금 우리들을 향해 오고 계시는 주님은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주님께 우리의 온 존재를 맡길 때 주님은 우리를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12월 09일 11시 58분 49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