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0. 샘은 가까운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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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21:14-21
설교일시 20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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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은 가까운 곳에 있다
창21:14-21
(2001/3/11)


위험한 자부심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하갈은 사라의 몸종이었다가 아브라함의 후처가 된 여인입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후처가 된 것은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아기를 낳아 가문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라의 조바심이 결국 힘없는 하갈로 하여금 아브라함의 후처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갈은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갈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사라의 종일 뿐, 주체적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의 질투심 때문에 이전보다 삶이 더 곤고해졌을 뿐입니다. 하갈은 임신 중에도 사라의 구박을 피해 광야로 달아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위로와 권고를 받아들여 주인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문제가 심각합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았던 것입니다. 사라는 이제 당당합니다. 그는 혼잣소리로 말합니다.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게 될 것이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할 엄두를 내었으랴? 그러나 내가 지금,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21:7) 우리는 이 말 속에 담겨있는 위험한 자부심을 읽게 됩니다. 사라의 콧대가 이때부터 1㎝쯤 높아졌다지요?

마침내 파국의 날이 왔습니다. 이삭이 젖을 떼는 날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기쁜 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라의 마음은 편치 못했습니다. 성경은 사라의 심사를 드러내주는 표현을 넌지시 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21:9) 정말 그런건지, 하갈 母子를 미워하는 사라의 눈이 그렇게 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집트 여인'이라는 표현 속에는 하갈에 대한 고의적인 멸시가 담겨있고, 그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이름은 의도적으로 가리워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라는 남편에게 하갈 모자를 내보내라고 압력을 가합니다. 자기가 낳은 아들 이삭과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유산을 나누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세속적이지요? 열국의 어미가 될 사라의 처신으로는 어쩐지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兎死狗烹이 이런 경우인가요?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면서요?


울음 이중주

아브라함은 주저하지만 嚴妻侍下의 사람인지라 사라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의 난처한 처지를 생각해서인지 성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을 받고 하갈 모자를 내보냈다고 전합니다. 날이 밝자 아브라함은 먹을거리 얼마와 물 한 가죽 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에게 주고는 그를 아이와 함께 내보냈습니다. 이게 아브라함식 휴머니즘인가요?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랍 사람들의 신을 벗겨 광야로 내몰았던 사건을 두렵게 회상해 봅니다. 독사와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로 들어간 그들 가운데 살아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갈도 다를 것 없습니다. 맨몸으로 쫓겨난 하갈의 심정에 대해 성경은 한 마디도 전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절망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갈은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21:14).

빈 들입니다. 아무 것도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갈 모자는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합니다. 定處가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요? 전후좌우 어디를 보아도 희망의 조짐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생이 이렇게 적막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흘렀습니다. 얼마 동안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 위해 물이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물은 곧 살 희망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물이 떨어졌습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아들을 덤불 아래에 뉘어 놓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오랫 동안 걸어온 이스마엘이 잠이 든 모양입니다. 그래도 엄마가 함께 있다고 잠을 청하는 아들을 보면서 엄마는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물도 떨어지고, 갈 곳은 없고, 이제 기다릴 것은 죽음 밖에는 없습니다. 하갈은 차마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아이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채 털썩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목을 놓아 웁니다. 들어줄 이 없는 울음이기에 더 처절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이스마엘도 엄마의 울음 소리를 듣고 울기 시작합니다. 절망이 전염된 것이겠지요? 빈 들에서 들려오는 모자의 울음 이중주! 아무도 듣지 않지만 하늘의 하나님은 듣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하갈의 마음을 달랩니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21:17)

'무서워하지 말아라.' '우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이 보다 더 큰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망의 순간이 곧 희망의 시간

절망의 심연으로 빠져들던 하갈과 이스마엘, 자포자기적인 울음 속에 희망을 떠내려보내던 그들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하나님은 가장 큰 희망으로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희망을 잃고, 빈 들 같은 세상에서 방황할 때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게 말씀하십니다.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21:18)

하나님은 먼저 하갈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십니다. 아이를 일으키고 달래는 것 말입니다. 로마로 압송당하던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삶에 대한 희망을 불러 일으켰던 것처럼, 하갈은 희망의 증언자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하갈은 광야로 내쫓긴 이스마엘의 운명이 불쌍해서 통곡했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위해 다른 계획을 세우고 계셨습니다.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내쫓긴 그 아이가, 멸시받는 그 아이가 큰 민족의 조상이 된다니 말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 채 절망의 강물에 희망을 떠내려보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샘은 이미 거기에 있다

하나님은 하갈의 눈을 밝게 하십니다. 눈이 밝아진 하갈은 샘을 발견하고는 가죽부대에 그 물을 담아 아이에게 먹입니다. 이제 비로소 하갈은 죽음으로부터 돌이켜 생명을 향하고 있습니다. 없던 샘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절망감, 혹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한 원망이 하갈로 하여금 그 샘을 보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갈의 눈이 열렸을 때 그는 '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샘은 이미 거기에 있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바로 옆에 샘을 두고도 목마름에 신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누군가와의 갈등 때문에 잠을 못 이룬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문제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그 문제를 풀어가야 할지 몰라 난감한 경우 말입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생각해보면 그 문제가 그렇게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해결이 쉽지 않습니다. 해결하려면 오히려 더 꼬이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눈을 뜨면, 달리 말해 하나님이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 눈을 뜨게 하시면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기도 생활을 하는 이들은 경험합니다.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하소연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문제가 사라져버렸음을 말입니다. 외적인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이 후련해지고 가벼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경우가 태반입니다. 조금 높은 산에만 올라가도 우리가 지지고 볶고 하는 문제들이 작게 여겨지는 데 어찌 안 그렇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解決되기 보다는 解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던 미움과 갈등이 봄눈 녹듯 사라져버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눈을 열어주셨을 때 하갈은 샘을 발견했습니다. 샘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물을 길으러 먼 곳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샘물이 넘치는 곳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샘이 되어야 한다

며칠 전 삼성동 코엑스에서 이민·유학 박람회가 열렸는데 이틀 간에 무려 5만여명이 몰려가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대다수가 30-40대였다니 참 큰 일입니다. 그들은 덤불 숲에서 지쳐 쓰러진 이스마엘을 바라보는 하갈의 심정으로 자녀들을 보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육제도 하에서 아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민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떠났습니다. 떠나는 그들을 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류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땅에 자녀들과 함께 남아서 희망을 일구게 될 것입니다. 지쳐 쓰러진 이스마엘, 울부짖고 있는 이스마엘을 일으키고 달래야 할 책임이 하갈에게 있는 것처럼 우리들은 더 좋은 교육 풍토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때입니다.

샘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샘에서 물을 길어 아이들의 마른 목을 축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들로 키우기보다는 남들과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자기 이익에 약삭빠른 아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합니다. 샘물이 곁에 있건만 그것을 긷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 삶 속에서 퍼올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숙자가 죽은지 보름만에 발견되고, 실직자들의 음산한 신음소리가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세상, 샘이 어디 있냐고 묻지 마십시오. 바로 우리들이야말로 서로에게 샘이 되어야 합니다. 샘, 그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21:20).

하나님은 광야에서 삶을 일구어가는 이스마엘을 돌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현재를 유보한 채 삽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계획은 잘 세우지만 오늘을 아름답게 사는 일에는 대단히 미숙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현재밖에는 없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은혜 받아야 할 시간이고,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시간인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십시오. 그러면 행복은 바로 이곳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샘은 이미 우리 곁에 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이 바로 샘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꿈이 바로 우리들의 꿈이 되기를 바랍니다. 꿈꾸는 자들은 기적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