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52. 보내심을 받은 이의 삶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12:44-50
설교일시 2012/12/23
오디오파일 s20121223.mp3 [12374 KBytes]
목록

보내심을 받은 이의 삶
요12:44-50
(2012/12/23)

[예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말을 듣고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아니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 나를 배척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내가 말한 이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나는 내 마음 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여 주신 대로 말할 뿐이다."]

• 두 전통의 조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넷째 주간입니다. 지난 한 달 여 우리 마음을 달뜨게 만들었던 선거전이 끝나고 이제는 일상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어떤 이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어떤 이들은 탄식을 내뱉습니다. 새로운 희망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절망의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섣부른 낙관도 절망도 적절치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엄중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대비해야 합니다. 정치인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열어가도록 격려하고, 요구하고, 감시하고, 때로는 비판해야 합니다.

대통령 선거 전을 통해 많은 공약이 제시되었습니다. 시민들에게 주어진 책무는 정치인들이 내놓은 公約들이 빌 공空 자 空約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말이 씨가 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서도 안 되고, 쉽게 망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에는 두 가지 전통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예언자적 전통과 제사장적 전통이 그것입니다. 예언자적 전통은 출애굽 정신에 비추어 현실을 비판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제사장적 전통은 기존 질서를 감싸 안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세도 필요하지만 아론도 필요한 법입니다. 함께 지향해야 할 비전을 앞세우는 이들과 현실을 안돈시키는 이들이 조화를 이룰 때 사회는 건강한 긴장 속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젊은이들과 연세 지긋하신 이들이 서로를 시쁘게 여기거나 미워한다면 그것처럼 커다란 낭비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배워야 할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너무 모릅니다. 말라기의 마지막 대목은 엘리야 예언자가 와서 할 일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내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겠다."(말4:6) 저는 이 말을 두렵게 받아들입니다.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사역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b-16)

지금이야말로 주님을 우리 삶 가운데 모셔야 할 때입니다. ‘빛나는 새벽별’(계22:16)이신 주님이 우리 마음에 떠오를 때 우리는 진정한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 보냄을 받은 자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 대한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보냄을 받은 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수수께끼인 존재입니다. 인류가 이 땅에 등장한 후 지금까지 인간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와 신학자, 시인과 소설가, 과학자들이 나름의 대답을 내놓지만 어떤 대답도 ‘나’의 삶에 대한 답이 되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론적으로는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인생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이런저런 갈림길 앞에 서곤 합니다. 갈림길은 우리 앞에 제기된 물음표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사셨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모색의 시간이 지난 후 예수님은 확고한 대답을 찾으셨습니다. ‘나는 보냄을 받은 자로 이 자리에 있다’. 물론 보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그곳으로 보내셨다’고 생각하는 순간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집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손양원 목사(1902-1945)는 좌우 대립 시기에 자기 아들을 죽인 젊은이를 양아들로 삼는 사랑의 파격을 보여주었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Maksylilian Kolbe, 1894-1941)는 나찌에 의해 아사감옥에 갇힐 위기에 처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를 대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했습니다. 콜베 신부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던 동료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수감자들은 누구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기도와 찬양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아사 감옥은 지옥이었지만, 그가 있어 그곳은 거룩한 성소가 되었습니다. 바티칸은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시대에 사랑의 기적을 보여주었다고 말하며 그를 성인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들은 고난과 고통의 자리를 자신이 보냄을 받은 곳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보냄을 받은 이가 해야 할 일은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대체적인 지향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비빌 언덕이 되어 주고, 살맛을 되찾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만나면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면 귀신을 내쫓으셨고, 외로운 이들을 만나면 벗이 되어 주셨고, 길 잃은 사람들을 만나면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일러주셨고, 삶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꿈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였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빌립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에 밑줄을 긋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그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 심판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당신의 소명을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그것은, 나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4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어둠은 빛의 결핍입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 빛이 없으면 삶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불교도 인간이 처해 있는 상태를 無明(avidya)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무명이란 밝음이 없는 상태 곧 어리석음입니다. 무명은 막힘, 미혹, 장애라고도 옮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참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로 여깁니다. 잠시 동안 주어진 자리나 지위를 자기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조금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당장 태도가 달라지는 이들을 봅니다. 아상이 강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 갇힌 이들입니다.

그런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곧 믿음은 아닙니다. ‘나는 믿습니다’라는 뜻의 라틴어 ‘credo’는 ‘나의 심장을 바칩니다’라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내 삶의 핵심을 주님께 봉헌하는 일입니다. 이런 믿음에 이르지 못해 우리는 무기력합니다. 주일 날 예배에 동참하는 것만 가지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운명 전체를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눅1:38) 전폭적인 헌신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의 운명을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이 빛으로 바뀝니다. 믿는 이들은 순간순간 주님의 뜻을 여쭙고, 그 뜻에 따라 자기 삶의 방향을 바꿀 각오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빛으로 오신 주님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누구를 배제함으로 얻는 저열한 쾌락을 싫어하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야단치기보다는 그들의 죄를 당신의 몸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이 덧거친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서지고 망가지고 어그러진 마음, 날카로운 사금파리처럼 변해버린 마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품어 안아 새로운 존재로 빚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없는 것입니까? 주님은 심판의 때가 온다고 말합니다. 주님을 배척하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그 말씀에 의해 심판 받을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태도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강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로 하나님을 영접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 자체가 심판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타락한 마음 자리에 내버려 두셔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도록 놓아두신 것(롬1:28)이야말로 심판임을 넌지시 가르쳐줍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삶,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소중한 생명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삶,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삶이야말로 심판받은 삶입니다.

• 우리 시대의 마구간
예수님은 당신이 전하신 말씀의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한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고, 또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친히 나에게 명령해 주셨다.”(49)

복음서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놀라는 광경을 더러 봅니다(마7:29, 막1:22). 산상수훈을 다 들은 후 사람들의 반응이 그렇고, 가버나움 회당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의 반응이 그러했습니다. 주님과 대비가 되는 이들은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의 말은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요? 율법학자들은 문헌을 연구해서 얻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회중들의 구체적인 삶에 어떤 울림도 일으키지 못하는 죽은 말일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에 따라 한 말이었기에 생동감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을 유발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쓰다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말씀은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옛말에 ‘응무소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딘가에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으면서 마음을 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랬습니다. 순간순간마다 그의 영혼 속에 전달되는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안다.”(50) 여기서 말하는 영생은 개체로서의 우리 생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삶, 그래서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을 일컫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은 바다를 향해 흘러갑니다. 시냇물이 만나 개울을 이루고, 개울이 만나 강이 되고, 강은 마침내 바다에 이릅니다. 작은 개체로서의 나를 지양하여 더 큰 나를 이루고 마침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입니다. 바로 그것이 영생입니다.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고 계십니다. 주님을 모시기 위해 욕심의 때가 더께로 앉은 우리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영적 나태함의 거미줄을 걷어내야 합니다. 우울함을 떨치고 명랑하게 주님의 빛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베들레헴의 마구간으로 달려갔던 목자들이 떠오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을 뵙기 위해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 거리에서 떠돌고 있는 사람들, 삶에 대한 희망을 이미 포기해 버린 사람들, 말벗조차 없어 외로운 사람들, 바로 그들의 삶의 자리야말로 우리 주님이 머무시는 말구유가 아닐까요?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보냄을 받은 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기다림의 계절에 무거운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용기를 내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12년 12월 23일 12시 14분 17초